본문으로 바로가기

글로벌메뉴



리뷰

존재의 기록, 기억의 자화상: 진 마이어슨과 정연두 (HPF Visible Sounds, Audible Pictures, 20…
노지은 / 2026-09-01 / HIT : 59

존재의 기록, 기억의 자화상

- 진 마이어슨과 정연두, 작품이 한 사람을 증명하는 방식

 

노지은

(​음악평론가)

 

 

화음 프로젝트 페스티벌 X 푸투라서울 지구의 밤

Visible Sounds, Audible Pictures Day1, 2

2026. 6.11. - 6.12. 저녁 7시 푸투라서울

 

 

  예술가의 자화상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 윤동주, 「자화상」​ 

 

  윤동주의 「자화상」에서 화자는 우물 속을 들여다본다. 물속에는 달과 구름, 하늘과 바람, 가을이 있고, 그 사이에 한 사나이가 있다. 자화상은 한 사람의 얼굴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그를 둘러싼 풍경, 지나온 시간, 마음속에 남은 장면들이 함께 비칠 때 비로소 한 존재의 윤곽이 생긴다.

 

  화음 프로젝트 페스티벌 X 푸투라서울 Visible Sounds, Audible Pictures의 첫날과 둘째 날은 그런 의미에서 두 예술가의 자화상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진 마이어슨의 왜곡된 이미지와 정연두의 구성된 풍경에는 각자가 지나온 삶의 조건과 기억의 방식이 스며 있다. 음악은 이를 해설하기보다 이미지 곁에 또 다른 시간의 층을 놓는다. 그때 작품 안에 남은 존재의 결은 더 깊이 들리기 시작한다.

 

  초여름의 북촌은 이미 하나의 무대처럼 붐볐다. 골목을 오가는 사람들, 오래된 한옥의 지붕선, 새로 생긴 가게들의 간판과 창문 너머의 불빛이 한꺼번에 시야에 들어왔다. 그 길을 지나 푸투라서울에 들어서는 일은 단순히 공연장을 찾아가는 이동이라기보다, 익숙한 일상의 감각에서 조금씩 벗어나는 과정에 가까웠다. 로비에는 웰컴 드링크를 든 관객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고, 2층 통유리창 너머로는 푸른 풍경이 번지고 있었다. 정숙한 콘서트홀의 긴장감보다는, 아직 무엇을 마주하게 될지 알 수 없는 가벼운 설렘이 공간에 감돌았다.

 

 

  진 마이어슨 — 왜곡된 삶의 기록

 

  첫날 만난 진 마이어슨의 이미지는 작가를 정면으로 보여주는 초상이 아니었다. 서울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입양된 한국계 디아스포라 작가인 그는 회화에서 출발해 디지털 왜곡과 영상, 설치, AR 등으로 작업을 확장해 온 작가다. 이날 상영된 〈Event Horizon〉, 〈Descendent〉, 〈Soul Asylum〉은 강렬한 색채와 뒤틀린 형상, 계속 회전하고 흔들리는 이미지의 흐름을 통해 화면을 단순한 시각적 표면이 아니라 하나의 움직이는 생명체처럼 느끼게 한다.

 

  처음에는 그 이미지들이 디지털 기술의 산물처럼 보였다. 그러나 공연 뒤 이어진 대담을 듣고 나니, 그 기술의 표면 아래 놓인 것은 오히려 한 사람의 사적인 삶의 기록임을 알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작업이 추상적인 개념이나 번뜩이는 실험적 착상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한국인으로서, 입양인으로서, 한 인간으로서, 아버지로서 살아온 여정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인지 그의 영상 속 왜곡된 이미지들은 단순한 시각 효과를 넘어, 끊어진 계보와 상실된 기억, 그리고 다시 연결되고자 하는 욕망의 흔적으로 읽힌다.

 

eb14ab5c4fed074740c53636f06ef4e0_1788196
Visible Sounds, Audible Pictures Day1

 


  소리로 다시 보는 이미지

 

  우미현의 〈Looplab: Inward Drift〉는 그 이미지의 내부로 조용히 미끄러져 들어가는 음악이다. 영상 속 둥근 형태와 거친 질감, 노란 빛과 어두운 색조가 교차하는 가운데 현악사중주는 명확한 선율을 제시하기보다 색채와 밀도의 변화로 관객의 감각을 하나의 흐름 안으로 끌어들인다. 음악은 이미지의 표면을 따라가기보다, 그 질감의 깊이와 중심을 향해 가면서도 끝내 도달하지 않는 움직임을 소리의 결로 다시 펼쳐 보인다.

 

  이어진 최진석의 〈Superimpositions〉와 배동진의 〈Asylum Field〉 역시 각기 다른 방식으로 진 마이어슨의 이미지를 바라보게 한다. 최진석의 음악이 영상의 파편들을 각기 다른 소리의 파편으로 되받아쳤다면, 배동진의 음악은 무대 안팎을 오가는 음향과 공간감을 통해 이미지가 사라진 뒤에도 그 잔상이 여전히 남아 있는 듯한 시간을 만든다. 화음챔버오케스트라의 연주는 이 서로 다른 접근을 과도하게 하나로 묶으려 하지 않았다. 각각의 음악은 이미지에 붙은 설명이 아니라, 이미지를 다시 보게 하는 또 하나의 시선이 된다.

 

  그중에서도 이날 가장 선명하게 기억되는 장면은 작품 이후 이어진 대담 중, 객석 한쪽에 앉은 어린 딸을 바라보던 작가의 따뜻한 미소였다. 그 순간 영상 속 DNA, 가족, 정체성, 역인과성이라는 말들은 더 이상 멀리 있는 개념이 아니라 한 사람의 삶으로 되돌아왔다. 작품 속 왜곡은 만든 이의 시간과 기억을 향해 열려 있었고, 그 감각은 작가의 작은 몸짓과 표정 속에서도 문득 이어졌다. 이날 진 마이어슨의 이미지들이 내게 ‘존재의 기록’으로 남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정연두 — 어긋남 속 존재의 의미

 

  둘째 날 푸투라서울의 무대는 전날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객석이 놓였던 가로로 긴 공간 위로 세로로 긴 화면 세 개가 펼쳐졌고, 화면 앞쪽에는 서로를 마주 본 두 대의 그랜드 피아노가 놓였다. 이 배치는 관객을 천천히 하나의 풍경 속으로 끌어들이며, 정연두의 작품과 음악이 공간 전체로 확장될 것임을 예고하는 듯했다.

 

  정연두의 작업은 얼굴 대신 풍경을 세운다. 풍경은 만들어지고, 지워지고, 다시 놓인다. 그 과정 속에서 기억은 하나의 고정된 장면이 아니라 계속 구성되는 대상으로 나타난다. 진 마이어슨의 이미지가 왜곡을 통해 사적인 삶의 흔적을 남긴다면, 정연두의 풍경은 구축과 해체의 과정을 통해 오래된 기억의 자리를 드러낸다.

 

  〈Syncopation #5〉는 임지선의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디아스포라〉에서 출발한 영상이다. 정연두는 이 음악이 품은 어긋남과 이질적인 공존의 감각을 자신의 풍경으로 옮겨왔다. 한 대의 피아노는 본래의 방식대로 울리고, 다른 한 대는 현이 제거된 무율 피아노로서 타악기적 소리를 냈다. 같은 피아노라는 이름 아래 놓였지만, 두 악기는 끝내 하나의 목소리로 합쳐지지 않았다. 이는 불화라기보다, 서로 다른 기억이 같은 공간 안에서 공존하는 방식처럼 느껴졌다.

 

  영상에는 강릉 단오제와 신주 빚기의 과정, 쌀을 도정하는 노동, 자연의 변화와 의식의 장면들이 교차해 나타났다. 처음에는 피아노라는 서양악기와 단오제의 풍경이 이질적으로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 이질감은 작품의 핵심으로 바뀌었다. ‘싱코페이션’이라는 제목처럼, 이 작품은 강약의 자리를 바꾸듯 우리가 평소 주목하지 않았던 장면들을 앞으로 끌어냈다. 단오제의 화려한 의식보다 노동자의 몸짓, 누룩이 발효되는 시간, 자연이 자기 리듬을 이어가는 장면들이 더 오래 시선을 붙들었다. 그 안에는 의식의 중심보다 주변의 움직임을, 완성된 장면보다 보이지 않는 시간을 바라보려는 작가의 시선이 있었다. 바로 그 어긋남 속에서, 보이지 않던 존재들이 하나의 생명력 있는 장면으로 들리고 보이기 시작했다.

 

eb14ab5c4fed074740c53636f06ef4e0_1788197

Visible Sounds, Audible Pictures Day2 

 

 

  작가의 기억이 세운 풍경들

 

  이어진 〈Documentary Nostalgia〉에서 자화상은 얼굴이 아니라 풍경의 제작 과정 속에 놓인다. 이 작품은 원래 사운드가 없는 무성 영상이다. 고정된 카메라 앞에서 여섯 개의 풍경이 차례로 설치되고 해체되는 동안, 화면 뒤에 숨어 있어야 할 작업자들은 주황색 작업복을 입고 등장한다. 풍경의 제작 과정이 노출될수록, 관객은 그것을 더 이상 자연스러운 배경으로 받아들일 수 없게 된다. 화면은 풍경의 환상을 깨뜨리지만, 바로 그 균열 속에서 풍경이 품고 있던 시간과 흔적이 서서히 드러난다.

 

  이때 장석진의 음악은 영상의 과정을 그대로 따라가지 않는다. 오히려 무심하고 건조한 노동의 장면 너머에 숨어 있던 사적인 정서를 조심스럽게 열어 보인다. 여기에 연주자들과 지휘자가 영상 속 작업자들과 같은 주황색 작업복을 입고 등장한 장면은 이 작품의 구조를 무대 위로 확장했다. 그들은 단순히 음악을 연주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영상 속 풍경을 함께 만들고 해체하는 또 다른 작업자의 자리에 서 있었다.

 

  특히 무대 위에 둘만 남은 첼로와 피아노가 서정적인 이중주를 들려주는 순간, 화면 속 작업의 무미건조함과 음악의 아름다움은 서로 이질적으로 맞물렸다. 사실 이 음악은 이번 페스티벌을 위해 영상에서 삭제된 앞부분에 새롭게 삽입된 곡이었다. 그 사실을 알고 나니, 이 장면은 작품의 빈자리로 음악이 스며들어 또 하나의 기억을 세우는 순간으로 다가왔다.

 

  이 풍경들에는 작가의 기억이 여러 겹으로 스며 있다. 중간중간 등장해 마술쇼를 하듯 짧은 동작을 보이고 사라지는 인물은 처음에는 어울리지 않는 해프닝처럼 보였지만, 작가가 유년 시절 좋아했던 무성영화의 감각과 맞닿아 있다. 마지막 장면에서 정상에 오른 등산객의 뒷모습 역시 작가의 방황기와 연결된다. 정연두의 작품에서 자화상은 얼굴 대신 풍경의 형태를 띤다. 〈Documentary Nostalgia〉는 그렇게 작가의 얼굴을 보여주지 않고도, 그가 품은 기억의 자리를 조용히 비춘다.

 

 

  작품 속에 남은 자화상

 

  윤동주의 우물 속 사나이는 달과 구름, 바람과 가을 사이에 있다. 얼굴은 홀로 놓이지 않고, 그를 둘러싼 풍경과 함께 비친다. 진 마이어슨과 정연두의 작품도 그러했다. 진 마이어슨의 이미지는 끊어진 계보와 가족의 감각을 왜곡된 표면 위에 남기고, 정연두의 풍경은 주변부를 바라보는 시선과 오래된 기억의 자리를 세워 보인다. 두 작가의 작품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한 사람의 시간을 품은 자화상이 된다.

 

이때 화음의 음악은 그 자화상을 대신 그려주지 않는다. 작곡가들의 음악 또한 미술작품 안으로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이미지를 대변하는 언어가 아니라, 이미지 곁에서 또 다른 감각과 시간을 여는 목소리다. 우미현, 최진석, 배동진의 음악이 진 마이어슨의 이미지를 다시 보게 한다면, 임지선과 장석진의 음악은 정연두의 풍경 안에서 보이지 않던 존재와 기억의 결을 들리게 한다.

 

  예술은 한 사람을 직접 말하지 않고도 그가 지나온 시간을 남긴다. 때로 그것은 왜곡된 표면으로, 어긋난 소리로, 잠시 세워졌다 사라지는 풍경으로 나타난다. 이번 페스티벌의 첫날과 둘째 날은 이미지와 음악 사이에서 한 존재가 잠시 형체를 얻는 순간으로 남는다. [畫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