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화(畵)음(音) 프로젝트 페스티벌의 첫번째 연주회 “정물화평도”에 다녀와서
장선화 / 2014-10-15 / HIT : 1637
백영은 작곡가의 작품 "저 산 너머" 와 “정물화평도”에 담긴 감상자의 시선.
2014년 화(畵)음(音) 프로젝트 페스티벌의 첫번째 연주회 “정물화평도”에 다녀와서
장선화
2014년 화음 프로젝트 페스티벌의 첫번째 연주회 “정물화평도”가 지난 10월 4일, 가을 햇살이 아늑한 늦은 오후 4시에 제주도립미술관에서 열렸다.
제주도립미술관은 녹음이 우거진 숲에 둘러쌓인 넓은 부지 안에 자리잡고 있어서 마치 숲 속 공원과 같은 느낌을 주는 정다운 곳이다. 특히나 돌과 물과 바람이 한데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있어 고즈넉하면서도 넉넉한 분위기를 조성하여 작품을 감상한다기 보다는 그냥 작품의 느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게끔 만들어진 여유로운 예술적 쉼의 공간이다.
이번 화음 프로젝트의 첫 음악회 정물화평도는 이런 제주도립미술관이라는 공간의 장점을 살려 그 공간에 딱 어울리는 음악을 선보였다. 마알간 가을 햇살이 미술관 유리벽을 통해 비쳐드는 로비에서 연주회를 열어 자연의 한가운데 있다는 느낌을 한껏 담았던 것도 그러했고, 무대에 전시되어 있던 선이 뚜렷하고 원색의 배합이 도드라지는 김만수 화백의 화폭 안에 오롯이 담긴 여유로운 동양적 향취가 그러했으며, 또한 밀고 당기는 소리의 깊이와 움직임으로 마치 붓 선이 담아내는 음영, 농담과 힘의 변화를 그려내듯 음악을 사색적이면서도 정답게 시각적으로 옮겨낸 백영은 작곡가의 정갈한 음악이 그러했다. 이는 음악을 다만 듣는 것으로, 그리고 그림을 다만 보는 것으로 남겨두지 않고 음악과 그림의 감상에 실로 오감이 다 열리게 하는 것이었다.
이 날 연주회의 프로그램에는 백영은 작곡가의 첼로 독주를 위한 “저 산 너머…”와 동 작곡가의 현악삼중주와 타악기를 위한 “정물화평도” 이렇게 총 두 곡의 화음 프로젝트 작품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음악과 미술의 어우러짐이 유난히 긴밀하고, 또한 그 어우러지는 방법이 한 작곡가의 작품이면서도 서로 달라서 음악과 미술과의 교감을 더욱 두드러지게 했다.
첫 연주곡이었던 “저 산 너머”(화음 프로젝트 Op. 48)는 감상자를 한만영 화백의 그림 “시간의 복제 - 금강산” 안으로 초대하여 화폭 위에 그려지지 않은 그림 속의 풍경을 감상하게끔 했다. “시간의 복제 - 금강산”은 단조롭고 뚜렷한 두개의 곡선과 흐르는 듯 굽이치는 희미한 선의 조합으로 만져질 듯 가깝지만 추상적인 산과 머얼리 희미하지만 그래서 더 산 다운 산을 화폭에 담아냄으로써 그림을 보는 사람이 화폭에 그려진 선 너머로 그려지지 않은 산을 보도록 하는 작품이다. 백영은 작곡가는 그녀의 작품 “저 산 너머”에서 그녀가 본 그 화폭에 그려지지 않은, 선 너머의 산을 음악으로 마저 그려낸다. 그래서 작품을 감상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화폭 너머에 있는 산 너머의 산을 곳곳이 굽이굽이 골짝마다 두루 다니며 풍경을 감상하게끔 한다.
이 날 초연된 마지막 연주곡 “정물화평도”(화음 프로젝트 Op. 128)는 이와 반대로 화폭 내에서 감상자의 시선을 안내하고 그 움직임을 동행하는 역할을 맡는다. “서양의 기법으로 가장 동양적인 것을 화폭에 담고 싶다”는 제주 출신 김만수 화백의 그림 “정물화평도”에는 단조로운 직선과 곡선으로 공간을 나누고 화려하게 대비되는 원색으로 그 공간을 채움으로써 생긴 서양 화법의 추상적이고 평면적인 공간 안에 청포도, 국화, 도자기, 붓, 비단방석 등 옛 선비의 서가에서 옮겨놓은 듯한 사물들이 한껏 동양적인 정취를 풍기며 오롯이 들어앉아 있다.
백영은 작곡가의 “정물화평도”는 이 사물들을 음악을 통해 눈으로 만지듯이 그 사물들의 느낌을 그려낸다. 지극히 동양적인 선율을 연주하는 현악 삼중주로 밤하늘의 구름의 흐름을 담고, 부서지는 듯한 별의 반짝임을 트라이앵글과 실로폰으로 담아내고, 돌연 들려오는 풍경소리로 투명한 바람까지 담아낸다. 알알이 떨어져 이곳 저곳 흩어져 있는 통통한 포도알, 흐르다가 고여 한곳에 모이는 물, 비단 방석의 사락거리는 소리, 풍성하면서도 소박한 국화가 있는 단아한 가을 단상… 화폭에 담긴 어느 사물 하나도 음악으로 어루만져지지 않는 것이 없다.
그러다가 돌연 음악은 그림 속에서 살아있는 사람을 찾아낸다. 작곡가 자신은 작품 연주 이전 곡 소개에서 곡의 중간에 김만수 화백의 다른 그림 안에 있는 정자에 정좌하고 있는 한 사내가 말을 하는 부분이 나온다는 것을 언급했는데, 내게 들리기에는 누군가 말을 한다기 보다는 그냥 그림 속 정물들 중 필통에 꽂혀있는 붓을 꺼내들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 안에 그려지는 흐르는 듯이 힘있고도 부드러운 동양화의 선. 그림 속의 도자기 속 그림이 음악으로 그려짐으로써 완성되는 것 같았다. 그리고는 첼로의 글리산도로 문풍지 발라진 문이 살며시 열리면서 누군가가 방 안을, 방안의 풍경을, 아니 방 안의 사물들을 들여다보고, 그리고는 서서히 방 밖으로 나와 전체 그림을 바라봐주고… 그러고 나면 이미 곡이 끝날 즈음이다.
이제야 알게 된다. 그림 속에 있던 그 사람이 그림을 감상하던 나였음을. 음악의 안내를 받으며 숨막힐 듯 화폭 안에서 정감어린 시선으로 사물을 만져주다가 바라봄으로 그 사물을 완성시키는 나의 시선을… 백영은 작곡가의 “정물화평도”에서는 한편으로는 화폭에 담겨진 장면 장면을 천천히 마음을 다해서 바라보아주는 감상자의 정다운 시선이 느껴지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 정다운 시선들을 그려냄으로써 그것을 깨닫게 하고자 하는 작곡가의 소리없는 의도가 느껴진다. “그림에서 받은 나의 느낌을 음악으로 담아내고 싶었다”는 그녀의 말이 어떤 특정한 느낌을 표현하고 싶었다는 말 만이 아니라 한명의 감상자로서의 자신의 시선을 담아내고 싶었다는 말임을 새삼 깨닫게 된다.
두 작품 모두에서 백영은 작곡가는 그림을 감상하는, 그리고 감상을 통해 그림을 완성해내는 감상자로서의 자신의 애정어린 시선을 그녀의 음악 안에 담았다. 음악을 듣는 감상자는 그녀의 시선을 따라 그림을 통해 초대받은 상상의 세계 깊숙한 곳에서 혹은 화폭 안 곳곳에서 그림이 그려내고 있는 그림을 찾아낸다. 정말 억지스러움 없이 자연스러운 감상으로의 초대다.
동양적인 선의 정취를 담아내는 만큼 소리의 밀고 당김이 유난히 민감한 작품들이었는데, 이를 서두름 없이 여유롭게 연주해 낸 연주가들, 첼리스트 이헬렌, 바이올리니스트 김지윤, 그리고 비올리스트 에르완 리샤의 기량에도 경탄을 금할 수 없다. 그림으로의 초대가 두드러지는 두 곡의 현대작품 사이에 베토벤의 현악 3중주를 위한 세레나데를 연주함으로써 잠시 현실 세계로 돌아와서 정갈한 햇살의 여유를 즐길 수 있도록 한 프로그램 연출자의 기지에도 박수를 보낸다. 이는 자칫 어렵게 느껴질 수 있는 현대음악을 천천히 그 여운을 즐기면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분위기를 무르익게 하는데에도 크게 도움이 되지 않았나 싶다.
어린이 관람객들이 많아 장내가 다소 산만하였다는 것이 조금 아쉬움으로 남는다. 하지만 그것도 그날 연주회에 나름 자연스러움과 정겨움을 한층 더해주었을 꺼라고 위안 아닌 위안을 삼아본다. 어쩌면 여유로운 예술적 쉼의 공간으로서 제주도립미술관이 제공하는 이런 자유스러운 감상의 분위기가 백영은 작곡가의 곡을 더 한층 빛나게 할 수 있지않았을까 감히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