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과 형태로 읽은 음악, 생명을 말하다
김윤진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
5월 11일 저녁, 혼자서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을 찾았다. 혼자서 음악회를 보러 간 건 처음이었지만, 보다 음악에 집중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찾아간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은 매우 깔끔한 느낌이었다. 개인적으로 큰 무대는 무대에 오른 연주자의 아우라가 느껴지지 않고 마치 DVD를 감상하고 있는 느낌이라 좋아하지 않는데, 이번에는 너무 크지도 않고 너무 작지도 않아서 무척 마음에 들었다. 내 자리는 2층이었는데, 처음엔 멀어서 보이지 않을까봐 걱정했지만 오히려 맨 앞줄부터 맨 뒷줄까지 한눈에 살펴볼 수 있어 좋았다.
무대 양 옆에는 이번 화음쳄버오케스트라 연주회를 통해 발표되는 신곡 ‘Shadow of Shadow'의 모티브가 된 이재효씨의 조각 작품이 놓여 있었다. 전체적인 분위기는 포멀했지만, 동시에 편안한 느낌이어서 나도 오랜만에 클래식을 제대로 감상한다는 압박(?)에서 해방되어 자유롭게 음악을 감상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연주된 세 곡의 곡 중 내 인상에 남은 것은 1부에 연주되었던 두 개의 곡이었다. 첫 번째 연주된 곡은 모차르트의 세레나데 제13번 G장조, ‘아이네 클라이네 나흐트무지크’였다. 익숙한 곡이라 멜로디를 전체적으로 즐기면서 연주자들을 세심히 살펴볼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 매우 놀랐던 것은 연주자들의 수준이 매우 높다는 것이었다. 나는 문화예술공연에 관해서는 서양쪽의 공연이 훨씬 수준이 높을 것이라는 일종의 사대주의(?)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다.
아마 내가 알고 있는 유명 연주자나 작곡가들이 다 서양 사람이라 그런 것 같다. 제대로 국내 오케스트라(외국 연주자가 섞여있긴 했지만)가 연주하는 걸 듣는 건 처음이었는데, 거의 완벽하게 CD에서 들었던, 혹은 그 이상의 음과 생동감이 전해지는 걸 듣고 깜짝 놀랐다. 아마 그 생동감의 원천은 연주자들의 뛰어난 실력도 있었겠지만, 시각적인 효과도 무척 컸던 것 같다.
쳄버오케스트라라고는 하지만 내 생각보다 꽤 연주자가 많았는데, 그들이 모두 하나처럼 움직이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특히 지휘자도 없는데 시작이 모두 정확하게 맞아떨어지는 점이나 곡이 끝날 때까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모든 주자들의 보잉이 딱딱 맞아떨어지는 게 매우 통일적인 느낌을 주었다. 오케스트라 전체를 리드하는 바이올린 리더의 역할이 무척 커 보였는데, 리더가 이러한 전체의 통일성을 이끄는 동시에 자신은 멜로디를 주도하면서 몸도 이리저리 흔들기도 하고, 멜로디에 따라 발도 맞춰 까딱거리고 하는 것이 곡을 듣는 재미를 무척 더해 주었다.
리더를 제외하고 내 눈에 유독 들어온 건 유일하게 서서 연주하는 두 명의 베이스 주자, 특히 그 중에서도 왼쪽에 서 있었던 사자머리를 한 키 큰 연주자(나중에 프로그램에서 이름을 찾아보니 ‘카트린 트리크봐르트’라는 분이라고 한다)였다. 그의 악기가 갖고 있는 강렬한 붉은 빛, 그리고 그만의 독특한 아우라는 들리는 듯 안 들리는 듯 울리는 베이스음에 자꾸 내 귀를 기울이게끔 했다.
반복과 주제의 교차 등 철저하게 형식을 갖춰 쓰여진 고전시대의 곡답게 깔끔함을 유지하면서도 이러한 연주자들의 다양하고 독특한 모습들이 일정한 규칙 속에서 활발히 움직이는 생동감을 불어넣어줘서 ‘분홍빛’ 모차르트를 굉장히 잘 살렸다는 느낌이 들었다. 문득 이 오케스트라의 이름, 화음(畵音)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어쩌면 연주자들은 그들의 소리와 음색뿐만 아니라 형태와 움직임 전체로 음악을 그려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런 그들의 모습에서 이른바 ‘아우라’라는 것이 생겨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보다 빨리 모차르트의 곡이 끝나고, 한차례 퇴장과 재입장이 반복된 다음 작곡가 임지선의 ‘Shadow of Shadow’가 무대에 올랐다. 예상은 했지만 현대 곡이라 그런지 불협화음이 주된 음을 이뤘고 다소 무섭다는 느낌까지 주기도 했다. 그렇지만 생각보다 어렵게 들리지는 않았다. 처음 딱 듣고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같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다소 원시적으로 들리는 음율 덕분인 것 같았다.
피치카토 같이 수업시간에 배운 주법을 사용해서 예쁜 소리를 냈던 이전 곡과는 달리 이번 곡에서는 피치카토, 글리산도 등 같은 주법을 사용했음에도 이를 조금 비틀어 금속 마찰음 같은 소리, 바람소리처럼 짙고 거친 음색 등을 나타내는 등 특이한 표현을 하고 있었다. 첼로와 베이스 소리는 마치 낮은 타악기 소리처럼 들렸는데, 베이스의 경우 손으로 뜯는 부분이 굉장히 기괴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다소 정형화된 연주와는 동떨어진 듯한 악기 활용에, 어쩌면 악기를 연주하는 기교보다는 악기를 구성하고 있는 ‘나무’ 혹은 ‘활’ 등 그 재료나 모습 자체를 이용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약간 혼란에 빠져 무대 옆에 있는 조각작품을 천천히 바라보며 대체 이 작품과 이 음악이 무슨 상관이 있는 것일까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죽은 나무들의 모음이 둥그런 원을 그리며 입체적으로 서 있는 조각 작품. 문득 모차르트가 살아서 활발하게 움직이는 생명을 그렸다면, 이 곡은 원시적이고 거친 선율을 통해 그 역동성을 반어법적으로 표현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 하는 생각이 들면서 ‘이 음악회가 단순히 아무 곡이나 고른 것이 아니라, 커다란 주제 안에서 하나의 흐름을 갖추고 있는 거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모네가 같은 루앙 성당을 보고 수많은 인상을 화폭에 남겼던 것처럼, 지금 이 오케스트라도 같은 ‘생명’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그 다양한 측면을 담아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거기까지 생각이 이르자 이 난해한 곡을 듣는 것이 갑자기 즐거워졌다.
상당히 지적인 사고를 요하는 곡이었지만, 그것 자체가 어쩌면 클래식, 혹은 현대 음악을 듣는 즐거움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연주회 프로그램이 유기적인 하나의 ‘주제’를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은 내게 꽤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정말 ‘음악으로 이뤄진 미술 특설 전시회’에 와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처음으로, 연주자와 곡과 그리고 감상자인 나 자신이 모여 무언가를 완성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쩌면 음악을 듣는 것, 그리고 연주회에 오는 것은 이러한 소통을 위한 것은 아닐까?
나는 사실 예술에 조예가 깊은 편은 아니다. 클래식 음악과 미술을 좋아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나에게 있어 ‘무척 특별한 경험’으로 한정되어 있는 경우가 많고, 평소 살면서는 예술 비슷한 주제에 관해 별로 관심이 없었다. 많은 사람들처럼 가끔 가다 좋은 음악이 있다면 듣고, 좋은 미술이 있다면 가서 보곤 했지만 그것은 순간의 즐거운 유희였을 뿐, 어떤 주제에 대한 진지한 탐구 혹은 학문적인 발견과는 거리가 멀었다. 한마디로 나는 예술을 가볍고 편협한 방식으로만 즐겨왔었다.
이런 나에게 이번 ‘화음쳄버오케스트라 정기연주회’는 예술, 특히 음악이라는 것이 어떻게 사람들과, ‘나’와 소통할 수 있는지를 알려주었다. 비로소 쉬운 음악과 어려운 음악, 듣기 좋은 음악과 생소하게 느껴지는 음악을 어떻게 함께 들을 수 있는지를 알게 되었다고나 할까? 이번 음악회를 통해 무척 많은 것을 배운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