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는
운명 같은 건 없다
있는 건 오로지
새날...
광화문 교보문고의 글판에 근사한 문구가 걸렸다. 정현종의 시 ‘아침’의 한 구절이다.
시인의 절창에 무릎을 친 것은 나뿐이었을까?
누군들 한 때 폭풍 같은 열정, 운명 같은 사랑을 꿈꾸지 않았으랴마는, 언제부턴가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것은 거대한 폭풍이나 격정적인 파도가 아니라 끊임없는 잔물결들이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다.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던 상처를 치유해 준 것은 우황청심환이 아니라 시간이었고, 무의미해 보이는 일상의 반복 속에서도 새날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물론 소리 없이 흘러가는 시간 속에, 잔잔한 일상의 수면 아래, 타인이 미처 알아차리지 못하는 자기만의 끊임없는 일렁임이 있었다는 전제 하에 말이다.
아마도 그 즈음이었던 듯싶다. 예술에 대한 내 기호도 조금씩 달라졌다. ‘총 맞은 것처럼’ 보는 이를, 듣는 이를 압도하는 천재성이 번뜩이는 작품보다는, 시간과 노동의 흔적이 집적된 성실하고 견고한 작품에 더 정이 가기 시작했다. 무릇 감동이란 천둥 같은 외침이 아니라, 두고두고 되새겨지는 노을 같은 은은함이어야 한다고, 한 때 빛났다가 이내 사라져버리는 화려한 불꽃이 아니라, 제 나름의 심지로 주위를 밝히는 따뜻한 등불 같은 것이어야 한다고 믿게 되었다. 예술은 충격이 아니라 울림이어야 한다. 도발이 아니라 위로여야 한다.
최태훈의 조각은 어느 순간 현대미술로부터 소외되어버린 노동의 가치, 손맛의 의미를 일깨워주는 ‘시간의 흔적’(Skin of Time)이다. 아주 흔한 재료 ‘철’을 대하는 그의 자세는 진지하고 집요하다. 끊임없는 일렁임, 그 전투의 흔적은 긴 세월 치열하게 살아온 사람의 주름진 얼굴처럼, 갖은 풍파 속에 패이고 긁힌 고목의 피부처럼 드러나 있다. 애매하고 모호한 반복과 변주의 일상이 삶을 모두 설명해 주는 것은 물론 아니다. 때로 운명 같은 파도가 덮치는 것이 인생이므로. 상처에는 드디어 크고 작은 구멍이 뚫렸다. 나달나달해진 인생은 더 이상 갈 곳이 없다. 그러나 길이 끝난 그 지점에서 꿈이 시작된다. 작가는 그 상처 안에 불을 밝혔다. 따뜻하고 아름답다. 패이고 긁힌 상처, 혹은 뻥 뚫린 그 구멍들이 아니었다면 그것은 아름답기는커녕 그저 캄캄한 고철덩어리 벽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인생도 예술도.
자칫 고철덩어리 벽으로 남을 수도 있을 인생에 대한 두려움일까, 아니면 항거일까? 임지선의 'Impossible Possibility'는 모순적이다. 불가능한 희망이라니. 그러나 희망은 마지막에 죽는다던가. 부정하려고 하면 할수록 희망은 힘이 세다. 높고 신경질적인 음색으로 현들은 머뭇머뭇 불안하게 희망을 탐색한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큰소리로 위협하기도 하고 나지막이 달래기도 해 보지만, 여전히 캄캄하고 질긴 벽은 만만치 않다. 그러나 예서 멈출 수는 없다. 조각가의 칼질처럼, 화가의 붓질처럼, 분노와 희망과 사랑과 절망을 담은 저마다의 활켜기도 지칠 겨를이 없다. 드디어 희망의 한 자락을 암시하듯 좀처럼 틈을 주지 않던 현의 반복과 변주, 그 상처투성이의 일상 속으로 금속성이 감도는 비브라폰이 끼어든다. 그리고 마침내 마림바의 둔중하지만 부드러운 울림이 먼 불빛처럼 따뜻하게 다가온다.
누군가 밖에서 비추어주는 것이 아니라 안으로부터 바깥으로 내뿜는 빛. 희망도 그런 것이리라. 봄이 오고 아침이 오는 것은 누군가 총칼 들고 혁명을 해서가 아니다. 그래서 시인도 노래했으리라. 희망의 바깥은 없다고.
희망의 바깥은 없다
새로운 것은 언제나 낡은 것들 속에서
싹튼다 얼고 시들어서 흙빛이 된 겨울 이파리
속에서 씀바귀 새 잎은 자란다
희망도 그렇게 쓰디쓴 향으로
제 속에서 자라는 것이다 지금
인간의 얼굴을 한 희망은 온다
가장 많이 고뇌하고 가장 많이 싸운
곪은 상처 그 밑에서 새살이 돋는 것처럼
희망은 스스로 균열하는 절망의
그 안에서 고통스럽게 자라난다
안에서 절망을 끌어안고 뒹굴어라
희망의 바깥은 없다
(도종환, ‘희망의 바깥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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