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이 악보되고 음악이 물감되어
동아일보 / 2008-08-14 / HIT : 1039
‘음악이 보이고, 그림이 들린다.’
11일 오후 8시 서울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 무대에는 영화 필름을 사용해 만든 형형색색의 동그라미들이 어우러지는 화가 김범수 씨의 대형 걸개그림 ‘비욘드 디스크립션’이 전시된다. 그리고 그 앞에서 23명의 화음챔버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작곡가 전상직 씨가 작곡한 ‘현을 위한 비욘드 디스크립션’을 연주한다. 1996년 창단된 화음챔버오케스트라가 서른 번째 정기 연주회를 갖는다. 이 실내악단의 대표 상품은 ‘화음(畵音)프로젝트’다. 이들의 연주회장은 곧 미술관이고, 전시장은 콘서트홀이 돼 왔다. 거기엔 늘 새로 태어나는 같은 이름의 ‘그림(畵)’과 ‘음악(音)’이 있었다.
○ 연주회 뒤엔 그림값 올라
“무소륵스키의 ‘전람회의 그림’을 비롯해 쇤베르크, 칸딘스키, 메시앙 같은 수많은 예술가가 이미지에서 영감을 받았어요. 피카소와 스트라빈스키와 발레뤼스, 말러와 클림트 등 경계를 넘어선 만남이 없었다면 그들의 예술이 가능했겠습니까.” (미치노리 분야•콘트라베이스)
화음프로젝트는 13년 동안 경기 남양주시 서호미술관을 비롯해 가나아트센터, 스페이스C,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 등 미술관과 연주홀에서 열렸다. 최정화, 다니엘 부엔디 등 66명의 화가와 백병동 이영조 임준희 씨 등 39명의 작곡가가 참가해 왔다. 화음프로젝트의 음악 감독을 맡고 있는 박상연(비올라) 씨는 “화음프로젝트는 오늘의 음악과 오늘의 미술을 동시에 즐길 수 있는 현장”이라고 말했다.
“난해한 인상을 주는 ‘현대음악’이라는 말 대신 ‘현장음악’이라는 말을 쓰고 싶어요. 콘서트홀이 아닌 현장에서 듣는 오늘의 음악이지요. 미술, 영화 등 시각적인 이미지는 관객들에게 새로운 음악을 듣게 해주는 중계자 역할을 해줍니다. 영화 속 음악을 화면 없이 듣는다고 생각해 보세요. 아마 5분도 못 들을걸요.” (박상연)
매회 화음프로젝트 연주에 참가한 화가들의 작품은 값이 오른다. 해당 작품이 10∼15분짜리 음악으로 다채롭게 해석되기 때문이다. 바이올리니스트 배익환 씨는 “그림은 예술품이자 상품적 가치를 지녀 팔리기도 하지만 음악은 순간의 예술이어서 그렇진 않다”며 “하지만 앞으로 화집과 음반으로 화음프로젝트의 소장 가치를 높이고 싶다”고 말했다.
○ 지휘자 없는 오케스트라
화음챔버오케스트라는 지휘자 없이 미치노리 분야와 배익환 씨를 비롯해 첼리스트 조영창, 비올리스트 마티아스 북홀츠 등 4명의 리더그룹이 단원들과 토론을 통해 악단을 이끌어간다. 화음프로젝트 리허설 도중 의견 다툼도 적지 않지만 웃음도 끊이지 않는다.
“그림은 맘에 들지 않으면 찢어버릴 수 있잖아요. 그런데 연주는 한 번 하면 끝이에요. 연주할 때는 정밀화처럼 정확하게, 수묵화처럼 과감하게 감정을 컨트롤해 나가야 해요. 음악가들은 악보를 외우는 버릇이 있어서, 그림을 한 번 보면 다 외워버린다니까요.(웃음)” (조영창)
“미술은 한눈에 감동받지만, 음악은 시간의 예술이에요. 누구나 하루는 24시간이고, 1시간은 60분이고, 메트로놈 박자의 움직이는 시간은 다 똑같아요. 그 시간을 어떻게 운용하느냐가 음악이지요. 그러나 음악과 미술의 공통점은 둘 다 색깔이 있다는 점입니다. 처음엔 정확한 테크닉이 중요하지만 나중엔 규율을 깨고 자신만의 창의성과 색깔을 담아내야 대가가 될 수 있어요.” (배익환)
최근 ‘베토벤 첼로 소나타 전곡’(알레스 뮤직) 등 3장의 음반이 국내에서 출시된 첼리스트 조영창 씨는 이번 음악회에서 하이든 첼로협주곡 1번을 협연한다.
-동아일보 전승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