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의 연주에세이-모티브의 재발견 No. 9
모리스 라벨, <현악사중주 바장조>(1903) 1악장
박현
(바이올리니스트, 화음챔버오케스트라 단원)
모리스 라벨(1875-1937)은 클로드 드뷔시와 함께 20세기 인상주의 사조를 대표하는 작곡가로 불린다. 그의 음악을 인상주의적 이라고 느끼는 이유는 그가 화성을 기능적 역할보다 분위기와 음색 변화를 위한 표현적 역할로 사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라벨 자신은 인상주의라는 용어를 거부하고, 오히려 자신의 음악이 고전적 바탕을 지녔음을 강조하였다. 그는 바그너의 표현적 화성과 무소르그스키가 사용한 러시아 선법, 그리고 선배였던 드뷔시의 음악에 영향을 받았으며, 가브리엘 포레를 사사하며 프랑스 음악의 색채를 그만의 어법으로 이어나갔다. 고전적 형식의 틀 위로, 새로운 멜로디와 화성을 제시한 그의 음악은 후기로 갈수록 재즈 등 다양한 영향도 보여준다. <현악사중주 바 장조>는 라벨의 유일한 현악사중주 작품으로, 그가 파리음악원에 재학 중이던 1903년 완성되었다. 당시 앙드레 제다쥐(Andre Gédalge)와 대위법을 공부하며 선율이 그 어떤 음악요소들보다 우선시 되어야한다는 가르침에 영향을 받았다. 그는 이 작품을 유럽의 권위 있는 로마 대상 (Prix de Rome) 콩쿠르에 출품하였으나 수상하지 못했고, 곡을 헌정한 스승 포레마저 짧은 마지막 악장을 들어 “균형감을 잃은 실패작”이라며 가치를 인정하지 않자 결국 파리음악원을 떠난다. 학업과 작곡인생의 실패로 끝날 수 있었던 이 일은 오히려 라벨의 작곡 스타일을 좋아했던 관객들의 호응을 불러일으키며 그만의 작품세계를 넓히는 계기가 된다. 앞서 발표된 드뷔시의 현악사중주와 비슷하다는 지적을 받기도 했는데, 1905년 드뷔시는 그에게 편지를 보내 “신과 나의 이름으로, 절대 그 현악사중주의 한 음이라도 건드리지 말라...”고 그를 지지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라벨 현악사중주는 발표 당시 인정받지 못했던 라벨의 혁신적 음악어법들로 가득 찬 작품이다. 그는 어떻게 현악사중주에 음악적 색채를 불어넣었을까?

현악사중주 1악장은 소나타형식의 틀을 따르며 F장조로 시작한다. 하지만 [악보1]의 제1바이올린 선율은 F장조에서 기대하는 B♭을 포함하지 않고 D-E-F-G-A-C음들로 이루어져 조성을 모호하게 만든다. 투명한 음색으로 시작한 선율은 네 번째 마디를 향해 커졌다 작아지며, 간결한 네 마디 프레이즈를 만든다. 2도, 4도, 5도로 도약하는 제1바이올린의 주제 선율과 달리 제2바이올린과 첼로는 각각 A♭과 F음에서 한음씩 상승하는 스케일로 긴 호흡을 이룬다. 다음 네 마디 선율은 같은 리듬 모티브를 가지지만, A♭장조로 조성을 바꿔 하행하다 G단조에 다다른다. 여기까지를 4+4 프레이즈 구조를 가진 8마디 선율로 묶을 수 있지만, 네 마디 만에 조성을 바꾼 선율은 이질적으로 느껴진다. 앞서 화성의 변화를 주었다면, 다음 여덟 마디는 짜임새와 음향의 쓰임이 두드러진다. [악보2]는 듣기엔 같은 두 마디의 반복이지만, 제1,2바이올린은 반진행하는 각자의 성부를 번갈아 연주한다. 연주 주체가 바뀌며 빚어지는 섬세한 음색의 변화와 입체적인 음향 효과를 의도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첫 16마디에 이르는 1주제 영역은 간결한 구조 안에서 다양한 화성과 음색의 변화를 이루며, 작품 전체를 통해 전개될 모티브를 제시한다.

경과구는 제2바이올린과 비올라, 즉 내성의 짜임새가 특징적이다. 긴 호흡을 가진 제1바이올린과 첼로의 선율과는 대조적으로 내성은 가벼운 십육분음으로 음악을 전진시킨다. [악보3]에서와 같이 제2바이올린은 온음계가 두드러지는 십육분음을 이어서, 비올라는 활을 갈라서 연주한다. 연주자로서는 짝을 이룬 두 성부가 아티큘레이션을 통일하지 않는 것이 통상적이지 않게 느껴지지만, 라벨은 레가토(Legato)와 데타셰(Détaché) 중간의 아티큘레이션을 의도한 것으로 이해된다. 활을 강하게 누르지 않고 투명한 울림을 주는 프랑스 음악 특유의 음색이 돋보이는 부분이다. 사실 이 부분은 1893년 발표된 드뷔시 현악사중주와 종종 비교되는 구간으로, [악보4]의 드뷔시 현악사중주에도 매우 닮은 내성의 텍스쳐를 볼 수 있다.


경과구 선율의 후반 모티브는 작품의 느린 3악장에 재등장하며 순환적 구조를 만들어낸다. 경과구 끝엔 제2바이올린이 테누토로 음마다 무게를 더해 A음에 머물며 새로운 주제로의 전환을 준비한다. [악보5]의 조성이 변화하는 구간엔 라벨의 특징적인 8음 음계(Octatonic Scale)를 발견할 수 있다. 8음 음계는 조성이 어디로 해결될지 모르는 중립적 성격을 가지는데, 라벨은 현악사중주 전반에 이 음계를 사용하여 모호하고 신비로운 화성을 만들어낸다. 이 구간에 쓰인 음들은 A-B♭-C-(D♭)-E♭-E-(F#)-G로, [악보5]의 52마디 첼로가 피치카토로 연주하는 E♭-A음이 8음 음계를 확정짓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어 55마디 첼로의 음이 A-D로 바뀌면서 자연스럽게 D단조로 조성을 옮긴다. 첼로의 한 음으로 조성이 방향이 결정되는 순간이다. 제2바이올린을 따라(Suivez) 늦춰졌던 흐름은 템포를 회복하고, 제1바이올린과 비올라가 옥타브 유니슨으로 연주하는 신비한 제2주제 선율은 제2바이올린의 3도 트레몰로와 첼로 피치카토로 부드럽게 감싸진다.


발전부에서는 새로운 선율이 비올라에서 시작되어 제1바이올린-첼로를 오가며 발전된다. 선율을 제외한 성부들은 경과구 내성과 같은 짜임새로 음계와 음색을 변화시킨다. 온음 음계(Wholetone scale), 오음 음계(Pentatonic), 8음 음계(Octatonic)를 통해 다양한 화성 팔레트 안에서 발전하며, 속도와 다이나믹을 고조시켜 긴장감을 더한다.
재현부에서는 고전적 형식을 따라 제2주제가 처음 조성인 F장조로 재현된다. 하지만 조성을 변화시키는 방식은 무심할 정도로 간결하다. [악보5]의 전개부와 [악보6]의 재현부를 비교하면 달라진 것은 A-D에서 C-F로 변하는 첼로의 두 음 뿐 이다. 이렇듯 라벨은 중요한 전환점을 크게 드러내는 대신 피치카토 음을 통해 치밀하고도 섬세하게 음악의 변화를 만들어낸다.
C#장조로 시작되는 종결구에서도 화성의 색채는 마지막까지 변화를 멈추지 않는다. 첼로의 C#지속음 위로 속도가 점점 느려지면서 경과구 선율 모티브가 온음계과 선법 음계를 통해 변화하는데, 제1바이올린의 선율은 높게 상승하여 음역을 팽창시킨다. [악보7]에서와 같이 마디마다 커졌다 작아지는 호흡 안에서 선율은 하행하는 온음을 통해 가라앉는다. 마지막 마디 제1바이올린 선율이 C음에 다다르고 나서야, 첼로와 비올라는 피치카토의 가장 여린 터치로 F장조의 온전한 울림을 만든다. [畵音]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