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 연주 에세이-모티브의 재발견 No. 8
바그너 <트리스탄과 이졸데, 전주곡과 사랑의 죽음> 모티브
박현(바이올리니스트, 화음챔버오케스트라 단원)
바그너는 1859년 완성한 음악극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통해 음악과 드라마의 완벽한 결합을 꿈꿨다. 음악의 동기와 주제는 등장인물과 그 감정을 대변하는 라이트모티프(Leitmotiv)1)로서 이야기의 전개를 따라 재등장하며 변모하는데, 이는 자연스레 음악극을 하나의 큰 흐름으로 엮는다. 총 3막으로 이루어진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각 막은 대사와 노래의 구분 없이 하나의 악장처럼 멈춤 없이 전개된다. 여기서 오케스트라는 노래의 반주가 아닌 작품의 일부로서 주인공들의 감정과 극 전반의 분위기를 이끄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지난 11월23일 제45회 정기연주회에서 화음챔버오케스트라는 <트리스탄과 이졸데, 전주곡과 사랑의 죽음>을 연주했다. <사랑의 죽음>은 3막 끝에 이졸데가 부르는 마지막 아리아를 바그너가 관현악곡으로 편곡한 것으로, 전주곡과 묶어 독립된 관현악곡으로 연주된다. 이번 화음 공연에서는 작곡가 안성민이 편곡한 챔버오케스트라 버전을 연주했는데, 바그너가 설계한 대규모 오케스트라 편성을 11성부 악기편성에 분담시키는 작업은 편곡자와 연주자 모두에게 큰 도전이었다. 소리의 볼륨과 두께는 달라졌더라도 바그너가 각 선율과 모티브에 담아낸 스토리를 그대로 재연하고자 했던 과정이었다. 바그너는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라이트모티프를 어떻게 만들어냈을까?
악보 1. 마디 1-3, ‘트리스탄’ 모티브와 트리스탄 화성
전주곡의 첫 모티브는 첼로에서 오보에로 이어지는 선율로, 첼로는 아득한 곳에서 떠오르듯 단6도로 음을 도약시켰다 반음씩 가라앉지만, 오보에는 보다 분명한 톤으로 희망의 여지를 주며 반음씩 상승한다. 바그너는 첫 세 마디에 걸친 모티브에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비극적 사랑에 대한 슬픔과 열망을 담아냈다. [악보1](피아노 리덕션)에 보여지듯, 상승했다 무너지는 첼로의 네 음은 ‘슬픔(Grief)’, 반음씩 상승하는 오보에의 네 음은 ‘갈망(Desire)’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트리스탄의 절망적인 마음에 드리워지는 한 가닥 희망 같은 끌림. 이렇게 모순적 감정을 담아내는 모티브의 더욱 중요한 지점은 이 두 작은 동기가 겹치는 순간에 오케스트라가 만들어내는 화성에 있다. 2마디 첫 박, 작은 크레센도 봉우리에서 부딪히는 이 화성은 음악사에 중요하게 언급되는 트리스탄 화음(Tristan Chord)2)이다. 이 화음은 1865년 초연 당시에는 이해되기 어려웠던 불협화음으로, 증6화음의 비틀린 소리는 극단적인 모호함과 긴장감을 만들어낸다.
이 모호하고 어떻게 해결 될지 모르는 화음위에 얹어진 극적 모티브는 세 번 상승하며 반복되다 ff안에서 위장종지3)로 숨을 고른다. [악보2]의 17마디와 같이 모든 전환점엔 앞선 선율의 끝과 새로운 선율의 시작이 맞물린다. 바그너가 의도한 무한선율4)의 예이다. 오케스트라가 남긴 열기를 이어 받아 첼로는 도입부의 불안했던 톤을 벗어나 보다 확실해진 감정을 노래한다. [악보2]에 표시된 첼로의 선율은 길게 연장된 호흡 안에서 상승한다. 붓점 리듬위에서 상승하는 세 음과 급격히 하강하는 두 음 패턴을 반복하며 조금씩 용기를 내듯 감정을 f까지 끌어올린다. 19마디 첼로가 C에서 B♭음에 이르는 음정은 바그너의 전형적인 도약으로, 단7도의 불완전한 도약은 애절함을 더한다. 이 두 번째 모티브는 ‘사랑’을 의미하는 라이트모티프로, 음악극 1막 5장에서 트리스탄과 이졸데가 서로의 이름을 부르는 장면에 재등장하여 두 사람의 감정을 표현한다.
악보 2. 마디 16-21, ‘사랑’ 모티브의 전개
첼로가 시작한 ‘사랑’ 모티브 선율에 2바이올린과 1바이올린이 화답하고, 다시 첼로가 모티브를 변형시켜 이어받는다. [악보3]에 표시된 25마디의 첼로 선율은 앞서 나온 ‘사랑’ 모티브의 앞뒤 순서를 바꾼, 하강하는 음 뒤로 상승하는 세 음으로 이루어져있다. 이 변형된 모습은 ‘사랑’ 모티브에서 파생 된 것으로, ‘사랑의 묘약’을 마신 두 연인을 묘사한다. ‘사랑의 묘약’ 모티브는 45마디에서 오보에가 재현하는데, 그 전까지 관악과 현악은 ‘사랑’ 모티브의 단편을 주고받으며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63마디에서 A장조로 전환되며 음악의 색채가 밝아지는데, 현악성부의 32분음으로 상승하는 스케일과 3도씩 하강하는 붓점 모티브는 대조를 이룬다. [악보4]에 표시된 73마디부터는 현악성부가 유니슨으로 ‘사랑 ’모티브를 연주하며 반음씩 상승하다 강렬하게 부딪히며 비극을 예고한다. [악보5]에 표시된 84마디 두 바이올린이 연주하는 ‘사랑’ 모티브의 끝은 비올라와 첼로가 연주하는 맨 처음 ‘트리스탄’ 모티브와 맞닿는다. 전주곡의 종결부에서는 처음과 달리 관악과 현악이 짝을 이루어 ‘슬픔’과 ‘갈망’모티브를 주고받는다. 음색은 점점 가라앉고 더블베이스와 첼로의 담담한 피치카토로 끝맺는다.
바로 이어지는 ‘사랑의 죽음(Liebestod)’은 이졸데의 아리아 <Mild und leise(부드럽고 조용하게)>의 관현악곡으로, 바그너가 추구한 가사(드라마)와 음악의 완벽한 일치를 보여준다. 죽어가는 트리스탄을 발견하고 그를 향해 부르는 이졸데의 마지막 노래는 비극이라기엔 너무나 평온하고 마침내 죽음으로 결합되는 사랑의 승리를 그린다. 바그너의 관현악버전에서는 주제 선율을 베이스클라리넷이 시작하지만 안성민 편곡에서는 바순으로 대체된다. 도입부의 머리엔 “매우 절제된 시작(Sehr mässig beginnend)”이라는 지시어가 적혀있는데, 이졸데가 “부드럽고 조용하게 그가 미소 지으며 다정한 눈길을 보내는 것이 여러분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나요?”라고 노래하는 가사 내용에 맞는 속도와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악보6]에 표시된 ‘사랑의 죽음’ 모티브는 상승하는 완전4도와 반음씩 하행했다 질문처럼 상승하는 선형을 가진다. 이 모티브는 두 마디 호흡으로 연주자도 노래처럼 레가토(legato) 주법으로 음들을 최대한 연결한다. 바순에서 클라리넷, 호른, 비올라, 바이올린 순으로 성부를 옮겨가며 이어지는 이 모티브는 120마디부터 조성과 텍스쳐를 통해 변화한다. 이 구간은 “...별빛에 싸여 하늘 높이 오르는 것이 보이지 않나요?”라는 가사에 맞춰 하프와 현악트레몰로가 더해지면서 광채와 빛을 표현한다. 속도가 더해진 123마디부터 주제선율은 호른, 바이올린과 플롯으로 옮겨가고 나머지 모든 성부는 대선율과 모티브 단편을 더해 감정의 밀도를 채운다. 노래의 절정은 155마디 이졸데가 “...청아한 울림으로 나를 에워싸고 출렁이는 것은 잔잔한 파도일까요?”라는 구절로, 악보7.에 표시된 플롯과 바이올린의 선율은 하행했다 상행하는 모티브 안에서 점점 커지는 감정의 파도를 만들어낸다. 여기서 2바이올린, 비올라, 첼로는 삼연음으로 활을 갈라서 느린 트레몰로의 효과를 만든다. 연주자로서 음향을 많이 의논했던 부분으로, 현악앙상블은 활의 속도와 무게를 조절해 내림·올림활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어 소리를 일치시켰다. 또한, 출렁이는 파도를 연상시키는 다이나믹 효과를 위해 활의 양을 변화시켰는데, 개인의 소리가 두드러지기 쉬운 작은 편성에서 더욱 섬세하게 고민해야할 작업이었다.
트리스탄을 향한 이졸데의 사랑노래는 그녀가 함께 죽음을 선택하고 트리스탄의 주검위로 쓰러지며 끝맺는다. 현악의 삼연음도 작아지며 선율은 아르페지오로 하행하고 179마디에서 세밀한 트레몰로로 변한다. 노래의 마지막 구절은 다음과 같다. “파도치는 물결 속에, 바다의 소리 속에 세상이 숨 쉬는 그 맥박 속에 빠져들어 나를 잊어버리려합니다. 오, 다시없는 이 기쁨이여.” 이제는 말이 없는 이졸데 위로 오보에가 ‘파도’ 모티브를 느리게 연주하고, 바이올린이 이를 받아 더욱 느린 리듬으로 반복한다. 내려갔다 올라가는 선형의 선율은 더 이상 내려가지 않고 B-C#-D#-E-F#음으로 올라 마침내 결합한 연인을 축복하듯 완전한 종지를 이룬다. [畵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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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도동기. 인물, 아이디어, 사물을 나타내는 주제나 동기. 바그너나 그 이후 작곡가들의 오페라에서 짧고 상징적인 음악적 구조를 만들기 위해 사용되었다.
2) 근음으로부터 증4, 증6, 증9도의 음정들로 이루어진 화음. 바그너 <트리스탄과 이졸데>에서 사용되며 많은 논란을 일으켰으며, “조성화성 발전의 끝”으로 일컬어지고 한다.
3) 위장종지(Deceptive Cadence), 끝나는 착각을 주는 허위종지. V-vi
4) 무한선율(Unendliche Melodie), 바그너가 음악극에서 추구한 작곡기법으로 기악과 성악 폴리포니의 끝없는 연속, 종결감이 없이 이어지는 선율을 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