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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레퍼토리 프로젝트 Inspiration with Paintings Ⅱ: Sound Play] 고양된 상상력과 공감각
김인겸 / 2023-12-11 / HIT : 595

고양된 상상력과 공감각

김인겸 (음악평론가)

2023 레퍼토리 프로젝트 - Inspiration with Paintings Ⅱ: Sound Play

2023년 12월 1일(금) 오후 7시 30분

서소문성지역사박문관 콘솔레이션홀 

 

 

  프롤로그 레퍼토리 프로젝트, 소통을 기획하다

 

  필자는 몇 년 전부터 화음챔버오케스트라(이하 화음이라 한다)의 연주를 주목해 오다 작년부터 화음의 비평가그룹의 일원으로 비평작업에 참여해 오고 있다. 이 글의 프롤로그에서는 지난 2년 동안 화음의 연주를 감상하고 화음의 관계자와 소통하면서 느낀 소회를 기획이라는 관점에서 풀어보고자 한다. 음악비평 작업을 한 지 10년이 넘었고, 애호가로서도 40여 년간 수많은 음악회를 접하며 화음이 보여준 차별성은 일회적이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고 그 차별성을 조금씩 규명해 보고 싶다는 의욕이 생겼다. 차별성을 구성하는 요소는 한두 가지로 요약하기 어렵겠지만, 우선 기본 방향 설정이라는 차원에서 기획을 분석의 잣대로 삼으려 한다.

 

  음악을 만든다는 일은 지극히 개인적인 작업을 기반으로 한다. 작곡가는 누군가 만나거나 어떤 특정 장소를 가거나 그림이나 연극 등 다른 예술을 접하거나 해서 영감을 받아도 곡은 결국 혼자 쓴다. 연주자도 레슨을 하거나 받거나, 오케스트라나 실내악단에서 앙상블로 연주할 때 협업하지만, 이 모든 활동은 개인의 음악성과 연주력이 토대가 된다. 그럼에도 하나의 음악회가 무대에 올려지는 과정을 살펴보면 관계자 개개인의 역량과 작업을 기초로 하되, 총괄적인 기획의 손길은 필수불가결하다. 기획은 누가, 어떻게, 어떤 이유로 하는지도 중요하나, 이것을 규명하기 위한 기획 주체와의 인터뷰는 차후로 미루고 기획의 결과물에 한정해서 이 글을 서술하고자 한다.

 

  필자는 이번 연주회를 포함하여 올해 화음의 레퍼토리 시리즈 4번의 연주회에 대한 비평을 썼는데, ‘레퍼토리 프로젝트라는 제목 자체가 기획성이 강한 음악회임을 직관적으로 보여준다. 그렇다면 기획의 내용은 무엇이며 그 방향은 어디로 향하고 있을까? 두 질문에 대한 답을 하나로 뭉뚱그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것은 사회와의 소통이라고 생각한다. 화음의 올해 프로젝트는 모두 음악의 메시지성()에 주목했고, 이는 소통 없은 메시지는 죽은 메시지라는 웅변으로 필자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화음이 웅변하는 소통은 음악인끼리의, 음악계 내부에서의 소통을 포괄하되, 사회와의 소통까지 지향한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래서일까. 올해 레퍼토리 프로젝트의 마지막 연주회에 관한 글을 쓰는 지금, 필자의 머릿속에는 여러 화두가 맴돈다. 특히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에서 열린 이번 연주회는 화음뿐만 아니라 한국 음악계의 미래를 그리는 데 참조해야 할 무대라고 생각하며 이어지는 본론에서 그 근거를 구체적으로 밝힌다.

 

  상상력, 다감각에서 공감각으로

 

  예술의전당 같은 전문 연주공간은 잘 설계된 음향구조와 리허설의 편리성, 청중의 감상 편의 등 많은 장점을 지닌다. 반면 전문 연주공간의 틀에 음악을 가둬 다소 상투적인 음악회로 흐를 위험도 내포한다. 그래서 가끔은 전문 연주공간이 아닌 다른 목적을 위해 지어진 건물이나 복합 문화공간에서 연주를 하면 그 공간이 갖는 특유의 장소성이 음악회 자체의 성격을 바꾸기도 한다.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은 특히 회화의 영감이라는 이번 주제에 최적화된 장소였다. 천주교 박해의 역사를 간직한 공간이라는 사실이 주는 경건함에 더하여, 연주가 진행된 콘솔레이션홀은 지하공간의 어두움과 하늘과 맞닿아 있는 듯한 공간구조로 인해 성찰과 소통이 양립가능한 공간으로 느껴졌다. 연주가 진행됨에 따라 개별 작품이 모두 공간과 조화되며 공간을 가득 메웠고, 그렇게 구성된 전체 연주회는 회화의 영감이라는 주제를 형상화하는 데 성공했다.

 

  무대 뒤에 펼쳐진 스크린은 음악회 무대에 부수적으로 덧붙은 소품의 수준을 넘어 무대 전체를 감싸고 객석을 압도하는 규모였다. 즉 장소뿐만 아니라 무대와 스크린의 배치까지 기획자는 주제를 고려했다고 생각한다. 때로 양은 질로 전화(轉化)한다. 스크린의 크기가 딱 그랬다. 단순히 영상을 큰 화면으로 본다는 차원을 넘어서 명실상부하게 그림[]과 음악[]이 화음(畵音)이자 화음(和音)이 되었다.

스마트폰과 유튜브가 지배하는 시대라 멀티미디어, 즉 다중매체는 익숙하다. 스마트폰을 켜면 유튜브에서 영상과 소리가 혼연일체가 되어 흘러나오고, 우리는 그것과의 물아일체(物我一體)의 경지에 자주 빠지곤 한다. 그러나 모바일에서 광범위하게 벌어지고 있는, 미디어가 현대인의 시각과 청각을 포획하고 있는 사태는 정보전달의 유용성과 흥미본위의 쾌감 증대라는 측면을 제외하고 예술적 감수성과 상상력 측면에서 장점을 발견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왜냐하면 표면적으로는, 바로 위에 언급했다시피 애초에 만들어진 목적이 정보전달과 흥미 유발에 있고, 그 목적 달성에 있어 효율성이 중요한 덕목이기 때문이다. 이면으로 들어가 모바일 멀티미디어가 작동하는 양상을 살펴보자. 모바일 멀티미디어에서 시각과 청각은 별개이지만, 사실상 결합되어 한 몸으로 움직인다. 필자는 편의상 이를 결합된 다감각이라 명명한다. 모바일 멀티미디어의 결합된 다감각에서 시각과 청각은 병렬적으로 존재하는 동시에 결합된 형태로 본래의 목적(정보전달과 흥미 유발)에 충실하게 복무한다. 이때 감각의 전이나 화학적 통합은 이루어지기 어렵다. 유튜브 영상을 볼 때 종종 소리를 끄고 자막에 의존하여 영상을 봐도 큰 무리가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반면 이번 연주회에서 경험한 멀티미디어는 다감각을 초월해 공감각으로 차원을 높인다. 모바일 멀티미디어의 속도는 내면에 이미지(혹은 심상)를 형성할 틈을 주지 않는다. 그러나 화음의 음악과 그림은 시()와 유사하게 청각과 시각에 의해 산출된 감각이 마음속에 재현될 수 있는 소통의 지연, 틈을 허락한다. 달리 말해 음과 이미지에 의해 감각적 경험이 재생되거나 새로 만들어진 것이다. 여기에서 소통의 지연이 매우 중요한데, 이 틈은 상상력의 발동을 가능케 하는 공간이다. 여기에서의 상상력은 망상이나 공상과는 달리, 이미지를 포착하거나 만들어 내거나, 그렇게 형성된 이미지를 조합하고 변형하여 새로운 형상을 만들어 내거나, 기존에 존재하는 것을 토대로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사물의 이미지를 빚어내거나, 이질적인 사상들 사이에 새로운 질서를 부여하여 종합하고 통일하는 힘을 의미한다. 이 같은 맥락에서의 상상력은 딱딱하게 굳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모바일 멀티미디어에서의 결합된 다감각과는 다르게 여러 감각을 넘나들고 여러 감각이 소통하는 공감각(共感覺), 열린 감각을 가능케 하는 힘으로 작용한다. 하나 덧붙이자면 이때의 공감각을 추동하는 상상력은 철저히 개인에게 개별화된 주관적 상상력을 말하는 게 아니다. 바슐라르(Gaston Louis Pierre Bachelard, 1884-1962)는 예술가가 창조한 이미지의 원형을 우리가 이미 알기 때문에 예술작품에서 아름다움을 느끼고 감동하는 게 아니라 우리의 상상력 때문이며, 인간 정신의 가장 깊은 심층을 지배하는 근본 이미지가 상상력의 독자적인 작용을 가능하게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두 가지를 시사하는데, 첫째, 인간이 가진 상상력의 보편성 덕분에 이에 기반한 소통이 가능함을 알 수 있다. 둘째, 우리는 누구나 상상력을 활용하면 예술을 잘 향유할 수 있고, 이에 따라 우리의 삶은 끊임없이 스스로를 새롭게 하며 능동적인 변화를 얻을 수 있다는 전망을 가진다.

 

  화음의 연주와 음악

 

  그래서일까, 필자는 121일 저녁 730분부터 9시까지 90분 동안 감상한 화음의 연주회에서 수많은 상상의 순간을 경험했고, 이는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단순히 볼거리가 많았다거나 처음 접하는 공간의 새로움에 압도당했다는 게 아니다. 그날 저녁을 기점으로 나를 거쳐간 수많은 사람들, 읽었던 소설과 시편들, 경험하거나 보았던 사건들이 점멸하며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되풀이했다. 특히 과거에 읽었던 시들이 강렬하게 떠올랐는데, 이는 백영은과 배동진의 작품에서 더욱 그러했다. 아무래도 시 장르 자체가 감각을 매개하는 예술이라 음악과 그림 사이에 시라는 언어예술이 다리를 놓은 것 같다.

 

  화음프로젝트 Op. 225로 위촉되어 백영은이 작곡해 세계 초연한 <타악기와 현악합주를 위한 기억”>(2023)은 함께 선보인 마키노 다카시의 <그래픽 스코어 #1 수면>과 의식을 먼 과거로 이끄는 듯했다. 내 의식이 가닿은 곳은 시인 백석이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에서 창조한 아득한 세계였다. 다카시의 점멸하는 듯 반짝이는 빛은 눈[]을 연상케 했고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고 노래한 백석의 내면과 이어졌다. 시에서도 실제로 오지 않은 나타샤가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라고 노래한 백석의 절창처럼 겪지 않은 경험은 백영은의 음악을 통해 내 기억으로 바뀌고 있었다. 자칫 흐릿해질 수 있는, 예술을 매개로 창조된 경험은 타악기에 의해 비교적 선명하게 다가왔다. 다만 이런 관점에서 타악기의 볼륨이 조금 더 컸어도 괜찮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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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번째 작품인 슈만(Robert Alexander Schumann, 1810-1856)<동화그림책>은 안성민이 피아노 파트를 현악오케스트라로 편곡해서 작품의 분위기가 원곡보다 따뜻해지고 부드러워진 점이 인상적이었다. 원곡에서 비올라와 피아노가 대결하는 것 같은 대목에서 긴장도가 높아지는 데 반해, 편곡판에서는 현악오케스트라가 솔로 비올라를 감싸는 듯하여 무대와 잘 어울렸다. 예술감독 박상연이 직접 선택한 파울 클레(Paul Klee, 1879-1940)의 그림들에서는 빨간색이 도드라져 슈만의 작품과 조화를 이루었다. 비올라 독주를 맡은 에르완 리샤의 원숙하고 섬세한 연주 또한 무대의 완성도를 완벽에 가깝게 끌어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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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주회 전체의 표제이기도 한 후반부의 첫 작품인 배동진의 <사운드플레이-호모파베르>(2016)는 화음프로젝트 Op. 170으로 위촉되어 작곡된 곡으로 필자도 이미 감상한 적이 있다. 게다가 작곡가가 제목에 호모파베르를 추가하도록 계기를 만들기도 한, 개인적으로 아주 좋아하는 작품이다. 당시 필자는 <사운드플레이>를 들으며 작곡가가 쓴 프로그램노트처럼 전통적인 오케스트라에서 내뿜는 기계적 반복성을 함께 느꼈고, 음악을 듣고 며칠이 지나지 않아 지금도 잊히지 않는 꿈을 꾸었다. 꿈에서 하얀 연미복을 입은 연주자가 <사운드플레이>를 무표정하게, 그러나 매우 정확하게 연주하고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모든 연주자의 얼굴이 하나같이 똑같았다! 그때 필자는 엄청난 공포감을 느껴 바로 꿈에서 빠져나왔다. 마치 복제인간 오케스트라 같은 그 꿈에서 들은 연주는 엄청난 연주력으로 빛났고 그래서 기괴했다. 그래서인지 이번 연주를 오래전부터 기다렸다. 관악기가 있기는 해도 현악오케스트라로 다소 축소된 버전이라 그 부분이 어떻게 작용할지도 궁금했다.

 

  이번에는 기계적 반복성보다 이행준의 시각작품인 <네뷸라 라이징>의 영향인지 파편화된 현대인의 고독이 떠올랐다. 배동진의 작품은 시인 기형도의 조치원의 세계로 나를 이끌었다. 최소화된 화음은 어두운 차창 밖에는 공중에 뜬 생선 가시처럼 놀란 듯 새하얗게 서 있는 겨울나무들로 배경을 이루었고, 반복되는 음표는 어떤 결의를 애써 감출 때 그렇듯이 청년들은 톱밥같이 쓸쓸해 보였다. 호모파베르, 즉 도구적 인간은 원래 도구를 사용하는 인간을 의미하는데, 현대사회가 고도화될수록 인간이 다른 인간을 도구화하는 게 진짜 호모파베르가 아닌가 해서 섬뜩하다. 플랫폼 기반의 노동이 활성화될수록 호모파베르 경향은 더욱 강해질 것이다.

 

  <사운드플레이>의 규칙적인 리듬 때문인지 어두운 무대와 어울려 기차와 간이역이 자꾸만 떠올랐다. 기형도의 조치원에 이어 곽재구의 사평역에서가 연달아 생각난 것이다. 눈 오는 겨울밤 막차를 기다리는 추운 변두리 역에서 사람들은 오래 앓은 기침 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 담배 연기 속에있지만,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기형도의 작품은 평론가 김현이 쓴 대로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으로 전망이 보이지 않는다면, 곽재구의 작품은 톱밥난로의 불빛에서 희망을 노래한다. 이번에 들은 <사운드플레이>에서 필자 또한 차가운 반복 너머에서 따뜻한 온기를 발견했다. 곽재구가 시에서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 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라고 쓴 대목처럼 배동진도 이 작품 어느 깊숙한 구석에 그러한 희망을 새겨둔 것 같다. 언젠가 고속열차가 아닌 좀 느리게 가는 기차를 탈 일이 있을 때 배동진의 이 작품을 꼭 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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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지막 작품인 레스피기(Ottorino Respighi, 1879-1936)<보티첼리 삼부작>을 들으며 선곡한 프로그래머(화음의 이사이자 음악평론가인 송주호로 추정된다)와 지휘를 맡은 화음의 예술감독 박상연, 그리고 연주한 화음의 단원들 모두에게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다. 정말 좋은 기획에 훌륭한 연주가 어우러진 무대였다. 커다란 화면에 펼쳐진 보티첼리의 작품을 감상하며 르네상스 시대 인문주의의 재생과 아직 중세적 감각이 혼재된 모습을 느낄 수 있었는데, 이는 고대 로마까지 거슬러서 과거에서 음악적 재료를 찾아 쓴 레스피기의 기법과 음악세계가 묘하게 관통하는 지점이었다. 사실 이런 작품의 연주는 속된 말로 뭉개면 안 되고 아주 정교하게 맞춰가야 하는데, 지난번 연주회 평론에서 필자가 쓴 것처럼 화음은 음색을 포함해 앙상블 자체가 정교하여 세밀화를 보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질 때가 있을 정도라서 <보티첼리 삼부작>은 화음의 장점이 아주 잘 드러난 레퍼토리였다.

 

  에필로그 음악회의 지평에 관하여

 

  화음이 지난 30여 년 동안 한국음악계에서 음악과 예술의 지평을 넓혀온 업적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어느 때에 그 속도가 좀 늦추어졌을 때도 있었을 것이고 잠시 머뭇거린 때도 있었겠으나, 거시적으로 보면 계속 전진해 왔다. 그림이 있는 갤러리라는 공간에서 음악을 연주하는, 지금은 보편적인 발상이었지만 당시에는 파격을 실행했다.

 

  어떤 개인이든 단체든 미래에 대한 전망과 비전을 설계하고 이를 실천함으로써 실현하려는 가치를 정립하는 행위는 매우 중요하다. 최근 2년 동안 꽤 가까운 거리에서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화음을 관찰하고, 분석하고 감상하며 글을 쓴 사람으로서 화음은 새로운 지평을 여는 일에 많은 열정과 에너지를 투입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화음은 음악회의 형식과 내용에 관한 혁신을 통해 음악회 자체의 성격과 나아갈 바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올해 마지막 레퍼토리 프로젝트에서 필자는 함께 자리한 청중과 말 없는 교감을 통해 화음이 가고 있는 미답의 길에 동반자가 적지 않음을 느꼈다. 적어도 그동안 본 바로 지지자들은 양적으로 증가하고 있고 질적으로도 단단해지고 있다. 이렇게 만들어진 공감대가 넓어져 감에 따라 음악회, 더 나아가 공연예술의 새로운 지평도 확장될 것이고, 그 과정에서 소통과 상상력의 장() 또한 크게 열릴 것이다. [畵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