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글로벌메뉴



비평

[2017 음악으로그리는 오륜기 리뷰] 음악의 근원적 가치의 회복
송주호 / 2017-08-23 / HIT : 1128

음악의 근원적 가치의 회복
- 화음쳄버오케스트라의 ‘음악으로 그리는 오륜기’ 비평
글|송주호(음악칼럼니스트)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 (창세기 2:19)

 

아담의 언어
성서에 따르면 인간이 창조되고 처음으로 한 말은 각 생물들의 이름이었다. 오늘날처럼 축적된 단어와 싱징이 없었을 최초의 때에 어떤 방법으로 이름을 지었을까? 독일의 철학자 발터 베냐민(Walter Benjamin: 1892-1940)은 이 첫 언어에 주목했다. 그는 아담의 언어는 그 자체가 부연설명이 필요 없이 대상물의 특징을 직접적으로 반영했으며, 더 나아가 이름 그 자체가 그 대상물과 같은 존재라고 보았다. 즉, 아담에게 있어서 언어는 기호가 아닌 영혼의 외피였다. 그래서 아담은 자신의 언어로 자연과 직접 소통할 수 있었다. 아담의 말은 자연이 들을 수 있었고, 아담은 자연의 소리를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담은 선악과와 함께 타락하고 말았다. 언어 역시 상징과 개념 없이 이해할 수 없는 한낱 도구로 전락했고, 또한 인간은 더 이상 자연의 소리를 이해하지 못하게 되었다. 결국 인간은 자연을 거슬러 땀 흘려 일하게 되었고, 자연은 이에 응대하여 잡초와 해충을 내놓는, 인간과 자연 사이에 갈등의 고리가 끼워지기 시작했다. 베냐민은 이것을 ‘언어의 타락’이라고 말했다.
다행히도 베냐민은 부정적인 결론으로 마무리하지 않았다. 그는 아담의 언어의 회복이라는 무거운 임무를 예술에게 부여했다. 아담의 언어의 회복은 이해가 아닌, 감각과 직관으로서 파악되는 최초의 언어의 기능을 회복하는 것으로, 곧 자연과의 소통을 회복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니 감각으로 소통하는 예술이 그 임무를 수행할 유력한 후보자가 된 것이다. 실재로 글, 그림, 음악 등으로 자연을 묘사하고 마음을 표현하여 공감과 감동을 불러일으켰던 예술은, 베냐민의 주문 이전에도 아담의 언어의 회복을 위해 노력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류는 예술을 통해 태고의 이상향을 회상해왔던 것이다.
예술이 이러한 능력을 가진 것은 아담의 타락 이후에도, 그리고 바벨탑 이후에도, 말하는 언어와 달리 최초의 언어의 기원에서 벗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공간과 색으로 규정되는 시각 예술이나 소리로 조직되는 청각 예술의 근본은 1만년 인류의 역사 속에서 변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모든 인류는 음악으로 자신을 표현하고 모두와 소통함으로써 하나 될 수 있으며, 이로써 현재의 비극을 극복하고 아담 시대의 인류가 누렸던 영혼의 즐거움을 회복할 수 있다.

 

‘음악으로 그리는 오륜기’의 프로그램
지난 2017년 7월 5일 문화체육관광부가 주최하는 평창문화올림픽의 일환으로 예술의전당에서 열렸던 화음쳄버오케스트라의 ‘음악으로 그리는 오륜기’ 프로그램은 이러한 연장선상에 있는, 매우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지구상의 여섯 대륙의 음악을 연주한다는 것, 이것은 대화가 불가능한 인류의 어그러진 모습으로부터 음악을 통해 바벨탑 이전의 언어, 더 나아가 타락 이전의 아담의 언어로 회복하고자 함을 의미한다.
이번 프로그램이 감각과 직관으로 파악되는 언어로서의 예술의 근원적인 역할을 적극적으로 수행하는 데에는, 내용의 측면에서 인류의 다양한 모습을 담고 있는 작품들로 구성되어있다는 특징도 기여한다. 임지선의 <그림자의 그림자>와 필립 글래스의 <바이올린 협주곡 2번 ‘아메리카의 사계’>는 자연을 추억하고, 윌리엄 그랜트 스틸의 하프 협주곡 <에낭가>는 피에 흐르는 선조의 땅을 향수하며, 피터 스컬소프의 모음곡 <에싱턴항>은 역사 속에 발견되는 인간의 오만과 과오를 되돌아보고, 아스토르 피아솔라의 <탱고 1번>과 <탱고 2번>은 오늘날 우리들의 모습을 직설적으로 외쳐댄다.
이렇게 자연과 인류, 그리고 과거와 현재의 이미지가 음악이라는 하나의 언어로 말해짐으로써 언어의 근원적 모습, 즉 직관적 소통과 본질에 접근하는 특별한 경험을 객석의 관객들은 누리게 된다. 그랜트 스틸의 <에낭가>를 듣고 최초의 인류가 태어난 아프리카(고고학적으로 인류의 탄생지는 문명의 발상지인 매소포타미아가 아니라 아프리카 중부 빅토리아 호수 부근이다.)와 대륙의 끝에 위치한 우리의 음악이 강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충격을 받은 한 음악학자의 고백은 이번 음악회가 성공적이었음을 방증한다. 자연을 극복하고자 하는 인간의 노력이 무참히 스러진 이야기를 담은 스컬소프의 <에싱턴항>은 음악이 갖는 서술력에 대해 다시 한 번 감탄하고, 피아솔라의 거친 탱고에서 부자연스러운 현대인의 삶과 몸부림에 공감하는 것은 이미 오래전이다.

 

연주에 대하여
하지만 음악이라는 예술 행위에서는 특별히 고려해야할 점이 있다. 작곡과 연주가 동등한 지위를 가진다는 점이다. 미술에서도 작가와 제작자가 구분되는 경우가 적지 않지만 제작자가 겉으로 드러나는 경우는 없다. (2017년 8월에 미술가 조영남이 대작 논란으로 검찰로부터 1년 6개월 구형을 받은 것은 머리를 복잡하게 한다.) 구술 작가는 작가로서 인정받기도 하지만 연주자의 위상에는 미치지 못한다. 음악이 이렇게 별다른 모습을 띠는 것은 구체적인 형태로 존재하지 않아 1회성의 속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연주자를 통해 현상 구현이 반드시 필요하며, 또한 이 과정에서 그들에게 해석이라는 재창조의 기회가 주어지기 때문에, 연주는 작곡에 버금가는 남다른 위상을 갖게 된다.
연주를 통한 현상 구현은 언어의 실현으로 연결된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 중요성은 더욱 커진다. 악보 자체는 문자와 같아서 기호에 불과하지만, 그것이 읽히고 들려질 때 비로소 음악은 언어로서의 기능을 수행하여 그 근원적 의미에 도달할 자격을 갖추게 된다. 더 나아가 아담의 언어라는 예술의 근원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표현하려는 대상에 대한 본질을 담고 있어야 하며, 또한 그 대상이 상징이나 개념이 아닌 감각적이고 직관적으로 전달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연주를 생각해보자. 연주 방식과 악곡의 해석에 있어서 시대적 유행과 관습에 침잠하여 의미를 상실시키는 경우도 있고, 반대로 개성적인 표현에 집중하여 혼잣말을 하는 경우도 본다. 특히 개성은 선악과와 같아서, 선악과 시비를 분별하는 지혜를 줄 수도 있지만, 자신의 넋두리의 일방적이고 폭력적인 강요가 되어 모든 것을 잃게 할 수도 있다. 이를 방어하기 위해 부차적인 해설을 필요로 하는데, 이것은 곧 일종의 음악의 타락이다. 또한 음악의 바벨탑을 쌓는 것과 다르지 않다. 레토 니클러가 연출한 쇤베르크의 오페라 <모세와 아론>에서 아론이 만든 황금송아지가 ‘ICH’, 즉 ‘나’라는 글자로 형상화되었다는 것은 이것과 상통하는 바가 있다. 황금송아지를 통해 신과의 소통을 꾀하려는 것 같지만, 사실은 모세를 통해 이뤄지던 소통을 무시하고 인간만의 방법으로 일방적인 의지를 표현하는 것일 뿐이다. 이렇게 불통이라는 이름의 타락은 ‘관계’가 아닌 ‘일방’에 집착할 때 쉽게 나타난다.
그렇다면 어떻게 연주에 있어서 의미를 상실시키지 않으면서 개성이 일방과 바벨탑이 아닌 소통과 지혜를 발휘하게 할 것인가? 선악과의 쓰디쓴 끝맛을 경험했던 20세기가 지나고 21세기를 살아가는 오늘날, 음악은 온 인류의 소통과 공감을 회복할 필요를 느끼고 있다. 물론 이것은 모더니즘의 파기와 무비판적 복고를 의미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인류의 역사를 통해 형성된 고전 언어와 지난 세기에 얻어진 새로운 음악적 언어 모두 소중한 인류 역사의 산출물로, 지난 그 누구도 누릴 수 없는 우리 시대의 축복이며, 소통가능성을 가진 지혜의 재료들이다. 여기서 앞에서 언급한 오늘날 연주에 대한 상반된 두 경우는 공통적으로 대상에 대한 탐구가 부족해서 나타나는 양상이라는 데에 해결점이 있다. 대상이란 구체적일 수도 있고 추상적일 수도 있으며, 작곡가의 의도일 수도 있고, 연주자에 의해 재설정된 의도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음악이 스스로 이 대상을 말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서사적 구조에 집중된 해석이 요구된다. 가사가 있는 곡이라면 표면에 드러나 있지만, 기악곡이라면 나름대로의 서사적 구조를 획득해야 한다. 악기가 가사를 버리고 독립적인 기악곡으로 우뚝 설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따라서 서사적 구조를 중심으로 전하고자 하는 대상에 대해 탐구함으로써 의미를 확립하고, 여기에 개성을 부여해야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연음악은 매우 특이한 경우인데, 이것은 작곡가나 연주자가 아닌 감상자가 서사적 구조를 창조해내야 한다. 즉, 우연음악에서는 감상자도 동등한 예술가의 지위를 획득한다.)

 

화음쳄버오케스트라의 성과
화음쳄버오케스트라의 ‘음악으로 그리는 오륜기’ 연주회는 그 좋은 예이다. 현대적 표현에 익숙한 그들의 경험과 탁월한 서사적 해석을 바탕으로 하는 전달력은 아담의 언어로서의 음악 예술의 역할을 구현하는 실례를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청중으로부터 앞서 언급했던 반응과 평가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이를 통해 프로그램의 의도가 직관적으로 간파된 까닭이다. 20여 년간 새로운 음악에 대한 도전으로 단련된 그들의 성과는 분명 단기간에 따라갈 수 없는 수준의 것이다. 음악과 그림뿐만 아니라 이제는 스토리가 더해져, 우리 시대의 음악이 음악의 근원적 가치를 회복하는 데 지속적으로 선두적인 역할을 해주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