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음 프로젝트 Op.74-'존재(存在)에의 노래'
김은하 / 2008-12-15 / HIT : 1073
<화음프로젝트 op. 74>
「존재(存在)에의 노래」- 김은하(Eun-Ha KIM), 음악평론가
지난 12월 10일 <몽인아트센터>에서 열린 《화음프로젝트》의 중심에는 유럽 및 해외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작곡가 심근수의 작품이 있었다. 클라리넷, 비올라 그리고 피아노를 위한 『당신은 삶은 크게, 죽음은 나직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언제나 존재하라고 반복하셨습니다(Du sagtest leben laut und sterben leise und wiederholtest immer wieder: Sein)』는 《화음프로젝트》의 취지에 의거, 화가 도윤희의 작품들이 창작의 원천이 되었다.
현재 <몽인아트센터>에 전시되고 있는 도윤희의 회화와 설치가 갖는 주제는 《눈이 없는 시선》, 시각적 예술에서 보는 것을 그리고 대상 혹은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고 인식하기 위해 필요한 외부적 빛이라는 익숙한 매체에 의존할 것을 거부하고 눈이 아닌 마음으로 보기를 추구하는 작가의 취지가 온전히 숨쉬는 작품들이 심근수의 음악으로 투영되는 가운데, 주목할 것은 릴케가 동반된다는 사실이다. 이번 프로젝트에는 따라서 그림도 있고 음악도 있고 그리고 문학도 함께 하는 창작의 무대이며 이들 예술적 융합의 기저에 <존재>에 대한 세 사람의 시각이 함께 한다는 점이 큰 의미로 다가오는 시간이었다. 그 뿐만이 아니라 작곡가가 라이너 마리아 릴케(Rainer Maria Rilke)의 두 시행을 작품의 제목으로 채택함으로 인해 예술적 융합의 차원에 종교적 맥락이 결합되면서 주제에 대한 복합적 관계형성이 이루어지는데, 이는 작품의 긴 제목이 릴케의 『기도시집(Das Stunden-Buch)』의 제1부 《수도사 생활의 서(書) (Das Buch vom M?nchischen Leben)》(1899)를 이루는 장문(長文)의 기도 시 중 두 행이기 때문이다.
1901년과 1903년에 각각 쓰여 진 제2부 《순례의 서(Das Buch von der Pilgerschaft)》와 제3부 《가난과 죽음의 서(Das Buch von der Armut und vom Tode)》에 비해 릴케의 실존주의적 철학으로부터의 영향과 문학적 표출이 강력하게 주지되지 않는 초기의 작품이지만,1) 제1부에서 릴케 자신이 비잔틴 양식의 성화(聖畵)를 그리는 화가라는 시적 주체로 스며들어 예술가의 삶과 작업이 곧 수도사의 고독과 오로지 신에게 스스로를 바치는 고행과 다름이 아님을 연이어지는 시들 속에 표현해내고 있다. 예술과 종교와의 관계가 한 시인의 삶과 예술적 작업의 차원에서 작용한다고 할 때, 작곡가 심근수가 위의 두 행을 발췌하여 작품의 제목으로 정한 이유가 도윤희의 그림과 연관하여 과연 어디에 있을까? 릴케가 시적 재료인 언어로 행하는 예술에서 종교성을 찾는다고 할 때, 다시 말해 시적 작업을 하는 고독한 영혼인 시인의 삶이 녹아내리는 과정인 작업과 그 결정체인 시에서 존재의 가치를 가늠할 때, 도윤희의 그림들이 담아내는 의미를 작곡가는 어떻게 파악하였을까에 대한 답은 연주회 날 작곡가가 자신의 작품이 연주되기 직전 작품 및 작곡취지에 대해 소개하는 와중 상당 부분 전달되었다.
함축된 언어로 청중에게 가능한 많은 것을 설명하고자 한 작곡가의 말 중 자신이 도윤희의 작품에서 '빛의 내부로 사라져 들어가는 듯하고, 빛이 아니면서 빛나며, 어둠이 아니면서 어두운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는 언급에서 빛이 우리가 아는 물리적 반사의 매체인 빛이 아니라 그림 속에서 발생하는 주체로서의 존재이고 어두움 또한 단순 대비의 명암으로서의 한 축이 아니라 그 또한 그림 속 표현의 다층구도에서 서서히 확인되는 존재라는 인상을 주었다. 즉 그림 속에서 살아나는 빛과 그 빛이 동반하는 어두움이라는 존재의 이중성을 작곡가는 감지하였고 이를 음향적 차원에 반영하면서 마치 정지된 듯 움직이지 않는 음향 속에 운동성을 투영하려 했으리라 본다. 선율적, 리듬적 윤곽 없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음향과 반복되는 구도 속에 음향들 사이의, 더 정확하게 말해서 음향의 저편으로 사라진 정적의 공간이라는 두 음향적 존재감에서 그리고 간혹 음향의 울림 속에 화성적인 것과 비화성적인 것이 공존하는 것 또한 위 이중적 존재의 구도에 의거한 것이 아닐까? 화가의 작업과 삶의 의미가 점철되어 작품 속 <존재>의 고유성이 경험되어지듯 작곡가의 작품 속에서 그가 갖고 있는 음향에의 개념은 <들리는 존재>와 <들리지 않는 존재>의 구도 속에서 예술적, 인간적, 종교적 차원의 합일점을 들여다보게 한다.
작곡가가 예술적 존재의 문제를 종교적인 것과 연관시킬 의도가 없었다면 릴케의 시행이 여기에 함께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작품위촉 당시 작곡가가 독일에 주 거주지를 갖는 관계로 화가 도윤희의 작품들을 메일로 받아보며 작업하였기 때문에 작곡가가 미리 알지 못하였을 수도 있으나, 화가 도윤희가 작업할 때 스스로 침잠하고 잠언, 시, 또는 일기 형식으로 내려적는 과정과 시간을 통해 창작에의 고뇌가 감지되는 것에서 릴케가 피력하는 예술가의 수도적 자세가 발견되는 것이며,2) 그러기에 작곡가의 의식의 네트워크에 의해 엮여진 존재에 관한 예술과 종교의 구도가 더욱 설득력을 얻는다.
'당신은 삶은 크게, 죽음은 나직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언제나 존재하라고 반복하셨습니다.' 이 대목의 의미는 앞 뒤 시행의 전개를 놓고 얘기할 때 종교적으로 매우 거대 논지로 들어갈 수 있다. 왜냐하면 이 다음 이어지는 전개에 태초의 죽음, 즉 카인의 아벨에 대한 살인 이야기가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작게 말하지만 종교적 차원에서 죽음은 배제되지 않았음을 나타내는 것과 함께 신은 죽음을 작게 말하나 시적 화자인 릴케는 이 부분을 크게 말하려한다는 뜻이 들어있을 수도 있다.
죽음과 삶이 결국은 존재를 형성하는 기본 요건이자 존재의 이중 면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모습, 죽음을 인지하지 않는 삶에서 존재의 의미가 성립될 수 없다는 주제에의 다양한 예술적 해석의 풍요로움이 종교적 해석의 차원과 결합되어 표출되기도 하고(릴케), 내면적 존재의 인식이라는 측면에서 빛과 시각을 새로이 정의내림으로 인해 시각, 청각과 같은 감각의 구분 또한 새로운 공감각적 인식으로 작용하기도 한다(도윤희).3) 이러한 문학과 회화에서 발견되는 공유 인식과 더불어 음향의 들림과 들리지 않음의 관계에서, 그리고 음향의 구성요건 중 화성과 비화성의 공존이 반복되는 구조 속에 <존재의 이중성>은 심근수의 음악에서 그렇게 릴케의 시(詩)속 신의 요구를 반영하고 있다.
20세기 이후의 소위 현대음악에 고전, 낭만과 같은 시대적, 미학적 개념들과 달리 공통된 양식에 대한 직감이 결여되어 있는 것은 시대 고유의 특성이며 핸디켑이 아니다. 현대음악에 대해 누군가 시대적으로 공통된 미학의 부재(不在)를 이야기한다면, 이는 취향의 문제를 떠나 그 사람의 미학적 주소가 아직 현대에까지 이르지 못함을 의미한다. 문제는 이러한 현상이 비단 일반 청중의 문제가 아니라는 데에 있다. 이는 연주자들의 현대 음악에 대한 접근 방법과 태도에 연관되는 이야기이다. 현대음악에 있어 작곡가 개인별로 다양한 미학에 의거하여 작품을 바라보고 해석해야 하는 까닭에 분명 연주자들에게 요구되어지는 부분들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시대와 함께하지 않는 미학으로 현대 작품들을 감당해 내려할 때 연주자들에게 연주가 즐거울 리 없고 힘들게만 여겨질 터, 작곡가와의 작업이나 접촉이 연주이전까지 충분히 이루어지지 못하는 경우 및 사정은 요즘과 같은 음악가들의 활동 무대와 스케쥴에 근거하여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문제는 그러나 현대음악을 대할 때 작품 안에 내재하는 심층적인 층위에 대해 연주자가 고민하는가에 있다. 현대 음악은 어찌 보면 이러한 측면에서 이전 시대의 음악들보다 더 적나라하다. 작품 내적인 부분에의 파악과 스스로의 관점이 전제되지 않을 때 그 모습이 너무나도 여실히 드러나는 것이 현대음악이다. 관객들이 알아채든 그렇지 않든, 연주를 위해 기울인 작업에의 노력, 기획의 취지, 공유를 위해 함께 한 시간들에 연주회는 아무런 의미를 주지 못한다. 악보에 적힌 그리고 적혀있지 않은 음향의 기저에 어떤 생각들이 들어있을지 알지 못하고 어찌 해석이 나올 수 있을까. 아무리 훌륭한 기량과 연주력이 모여도, 또 연주되는 공간의 음향이 좋고 나쁘고를 떠나 연주자의 시각이 확보되지 않고 그들의 가슴이 울리지 않는 연주는 모두의 가슴에 공허함만을 안겨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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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3부로 갈수록 죽음에의 대면, 삶 속에 죽음을 인식하는 것에의 소위 실존적 죽음의 이해로 귀결되는 부분이 강력히 표출된다.
2) <몽인아트센터>의 전시관 1층의 한 귀퉁이에 마련된 작은 방안 책상 위에 놓인 책자에 적어내린 작가 도윤희의 글들은 그녀의 사고의 흐름과 작품에서 발현되는 내면화된 고뇌의 모습을 감지케 한다.
3) 이러한 공감각적 인식의 독특함은 『보인다기 보다는 차라리 들리는』, 『액체가 된 고민』, 『고삐 풀린 저녁』과 같은 도윤희 작품들의 제목들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존재(存在)에의 노래」- 김은하(Eun-Ha KIM), 음악평론가
지난 12월 10일 <몽인아트센터>에서 열린 《화음프로젝트》의 중심에는 유럽 및 해외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작곡가 심근수의 작품이 있었다. 클라리넷, 비올라 그리고 피아노를 위한 『당신은 삶은 크게, 죽음은 나직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언제나 존재하라고 반복하셨습니다(Du sagtest leben laut und sterben leise und wiederholtest immer wieder: Sein)』는 《화음프로젝트》의 취지에 의거, 화가 도윤희의 작품들이 창작의 원천이 되었다.
현재 <몽인아트센터>에 전시되고 있는 도윤희의 회화와 설치가 갖는 주제는 《눈이 없는 시선》, 시각적 예술에서 보는 것을 그리고 대상 혹은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고 인식하기 위해 필요한 외부적 빛이라는 익숙한 매체에 의존할 것을 거부하고 눈이 아닌 마음으로 보기를 추구하는 작가의 취지가 온전히 숨쉬는 작품들이 심근수의 음악으로 투영되는 가운데, 주목할 것은 릴케가 동반된다는 사실이다. 이번 프로젝트에는 따라서 그림도 있고 음악도 있고 그리고 문학도 함께 하는 창작의 무대이며 이들 예술적 융합의 기저에 <존재>에 대한 세 사람의 시각이 함께 한다는 점이 큰 의미로 다가오는 시간이었다. 그 뿐만이 아니라 작곡가가 라이너 마리아 릴케(Rainer Maria Rilke)의 두 시행을 작품의 제목으로 채택함으로 인해 예술적 융합의 차원에 종교적 맥락이 결합되면서 주제에 대한 복합적 관계형성이 이루어지는데, 이는 작품의 긴 제목이 릴케의 『기도시집(Das Stunden-Buch)』의 제1부 《수도사 생활의 서(書) (Das Buch vom M?nchischen Leben)》(1899)를 이루는 장문(長文)의 기도 시 중 두 행이기 때문이다.
1901년과 1903년에 각각 쓰여 진 제2부 《순례의 서(Das Buch von der Pilgerschaft)》와 제3부 《가난과 죽음의 서(Das Buch von der Armut und vom Tode)》에 비해 릴케의 실존주의적 철학으로부터의 영향과 문학적 표출이 강력하게 주지되지 않는 초기의 작품이지만,1) 제1부에서 릴케 자신이 비잔틴 양식의 성화(聖畵)를 그리는 화가라는 시적 주체로 스며들어 예술가의 삶과 작업이 곧 수도사의 고독과 오로지 신에게 스스로를 바치는 고행과 다름이 아님을 연이어지는 시들 속에 표현해내고 있다. 예술과 종교와의 관계가 한 시인의 삶과 예술적 작업의 차원에서 작용한다고 할 때, 작곡가 심근수가 위의 두 행을 발췌하여 작품의 제목으로 정한 이유가 도윤희의 그림과 연관하여 과연 어디에 있을까? 릴케가 시적 재료인 언어로 행하는 예술에서 종교성을 찾는다고 할 때, 다시 말해 시적 작업을 하는 고독한 영혼인 시인의 삶이 녹아내리는 과정인 작업과 그 결정체인 시에서 존재의 가치를 가늠할 때, 도윤희의 그림들이 담아내는 의미를 작곡가는 어떻게 파악하였을까에 대한 답은 연주회 날 작곡가가 자신의 작품이 연주되기 직전 작품 및 작곡취지에 대해 소개하는 와중 상당 부분 전달되었다.
함축된 언어로 청중에게 가능한 많은 것을 설명하고자 한 작곡가의 말 중 자신이 도윤희의 작품에서 '빛의 내부로 사라져 들어가는 듯하고, 빛이 아니면서 빛나며, 어둠이 아니면서 어두운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는 언급에서 빛이 우리가 아는 물리적 반사의 매체인 빛이 아니라 그림 속에서 발생하는 주체로서의 존재이고 어두움 또한 단순 대비의 명암으로서의 한 축이 아니라 그 또한 그림 속 표현의 다층구도에서 서서히 확인되는 존재라는 인상을 주었다. 즉 그림 속에서 살아나는 빛과 그 빛이 동반하는 어두움이라는 존재의 이중성을 작곡가는 감지하였고 이를 음향적 차원에 반영하면서 마치 정지된 듯 움직이지 않는 음향 속에 운동성을 투영하려 했으리라 본다. 선율적, 리듬적 윤곽 없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음향과 반복되는 구도 속에 음향들 사이의, 더 정확하게 말해서 음향의 저편으로 사라진 정적의 공간이라는 두 음향적 존재감에서 그리고 간혹 음향의 울림 속에 화성적인 것과 비화성적인 것이 공존하는 것 또한 위 이중적 존재의 구도에 의거한 것이 아닐까? 화가의 작업과 삶의 의미가 점철되어 작품 속 <존재>의 고유성이 경험되어지듯 작곡가의 작품 속에서 그가 갖고 있는 음향에의 개념은 <들리는 존재>와 <들리지 않는 존재>의 구도 속에서 예술적, 인간적, 종교적 차원의 합일점을 들여다보게 한다.
작곡가가 예술적 존재의 문제를 종교적인 것과 연관시킬 의도가 없었다면 릴케의 시행이 여기에 함께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작품위촉 당시 작곡가가 독일에 주 거주지를 갖는 관계로 화가 도윤희의 작품들을 메일로 받아보며 작업하였기 때문에 작곡가가 미리 알지 못하였을 수도 있으나, 화가 도윤희가 작업할 때 스스로 침잠하고 잠언, 시, 또는 일기 형식으로 내려적는 과정과 시간을 통해 창작에의 고뇌가 감지되는 것에서 릴케가 피력하는 예술가의 수도적 자세가 발견되는 것이며,2) 그러기에 작곡가의 의식의 네트워크에 의해 엮여진 존재에 관한 예술과 종교의 구도가 더욱 설득력을 얻는다.
'당신은 삶은 크게, 죽음은 나직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언제나 존재하라고 반복하셨습니다.' 이 대목의 의미는 앞 뒤 시행의 전개를 놓고 얘기할 때 종교적으로 매우 거대 논지로 들어갈 수 있다. 왜냐하면 이 다음 이어지는 전개에 태초의 죽음, 즉 카인의 아벨에 대한 살인 이야기가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작게 말하지만 종교적 차원에서 죽음은 배제되지 않았음을 나타내는 것과 함께 신은 죽음을 작게 말하나 시적 화자인 릴케는 이 부분을 크게 말하려한다는 뜻이 들어있을 수도 있다.
죽음과 삶이 결국은 존재를 형성하는 기본 요건이자 존재의 이중 면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모습, 죽음을 인지하지 않는 삶에서 존재의 의미가 성립될 수 없다는 주제에의 다양한 예술적 해석의 풍요로움이 종교적 해석의 차원과 결합되어 표출되기도 하고(릴케), 내면적 존재의 인식이라는 측면에서 빛과 시각을 새로이 정의내림으로 인해 시각, 청각과 같은 감각의 구분 또한 새로운 공감각적 인식으로 작용하기도 한다(도윤희).3) 이러한 문학과 회화에서 발견되는 공유 인식과 더불어 음향의 들림과 들리지 않음의 관계에서, 그리고 음향의 구성요건 중 화성과 비화성의 공존이 반복되는 구조 속에 <존재의 이중성>은 심근수의 음악에서 그렇게 릴케의 시(詩)속 신의 요구를 반영하고 있다.
20세기 이후의 소위 현대음악에 고전, 낭만과 같은 시대적, 미학적 개념들과 달리 공통된 양식에 대한 직감이 결여되어 있는 것은 시대 고유의 특성이며 핸디켑이 아니다. 현대음악에 대해 누군가 시대적으로 공통된 미학의 부재(不在)를 이야기한다면, 이는 취향의 문제를 떠나 그 사람의 미학적 주소가 아직 현대에까지 이르지 못함을 의미한다. 문제는 이러한 현상이 비단 일반 청중의 문제가 아니라는 데에 있다. 이는 연주자들의 현대 음악에 대한 접근 방법과 태도에 연관되는 이야기이다. 현대음악에 있어 작곡가 개인별로 다양한 미학에 의거하여 작품을 바라보고 해석해야 하는 까닭에 분명 연주자들에게 요구되어지는 부분들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시대와 함께하지 않는 미학으로 현대 작품들을 감당해 내려할 때 연주자들에게 연주가 즐거울 리 없고 힘들게만 여겨질 터, 작곡가와의 작업이나 접촉이 연주이전까지 충분히 이루어지지 못하는 경우 및 사정은 요즘과 같은 음악가들의 활동 무대와 스케쥴에 근거하여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문제는 그러나 현대음악을 대할 때 작품 안에 내재하는 심층적인 층위에 대해 연주자가 고민하는가에 있다. 현대 음악은 어찌 보면 이러한 측면에서 이전 시대의 음악들보다 더 적나라하다. 작품 내적인 부분에의 파악과 스스로의 관점이 전제되지 않을 때 그 모습이 너무나도 여실히 드러나는 것이 현대음악이다. 관객들이 알아채든 그렇지 않든, 연주를 위해 기울인 작업에의 노력, 기획의 취지, 공유를 위해 함께 한 시간들에 연주회는 아무런 의미를 주지 못한다. 악보에 적힌 그리고 적혀있지 않은 음향의 기저에 어떤 생각들이 들어있을지 알지 못하고 어찌 해석이 나올 수 있을까. 아무리 훌륭한 기량과 연주력이 모여도, 또 연주되는 공간의 음향이 좋고 나쁘고를 떠나 연주자의 시각이 확보되지 않고 그들의 가슴이 울리지 않는 연주는 모두의 가슴에 공허함만을 안겨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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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3부로 갈수록 죽음에의 대면, 삶 속에 죽음을 인식하는 것에의 소위 실존적 죽음의 이해로 귀결되는 부분이 강력히 표출된다.
2) <몽인아트센터>의 전시관 1층의 한 귀퉁이에 마련된 작은 방안 책상 위에 놓인 책자에 적어내린 작가 도윤희의 글들은 그녀의 사고의 흐름과 작품에서 발현되는 내면화된 고뇌의 모습을 감지케 한다.
3) 이러한 공감각적 인식의 독특함은 『보인다기 보다는 차라리 들리는』, 『액체가 된 고민』, 『고삐 풀린 저녁』과 같은 도윤희 작품들의 제목들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