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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2013 화음프로젝트 페스티벌 평론 "문일근-화음 프로젝트 페스티벌"
문일근 / 2013-12-16 / HIT : 1044

화음 프로젝트 페스티벌

 

1130 & 12 8

 

문일근

 

 

미술과 음악은 창작 과정이 어떻게 다를까? 미술이 자연에 대한 예술의 세계를 구체적 묘사에서 상상의 세계로 발전되고 현대에 이르고 있음에 반해 음악은 시작에서부터 상상의 세계에서 음상의 구체화라는 작업을 지속되고 있다.

그렇다면 주어진 주제에 대한 음상의 세계는 어떻게 나타날까? 화음 프로젝트 페스티벌은 예술을 창조와 재창조(연주의 재창조가 아닌)라는 이분법으로 접근 또 다른 영역의 구체화를 시도하고 있다. 그리고 표출영역을 제한된 악기를 통해 성취되었을 때와 이미 완성된 미술작품을 대상으로 했을 때는 어떻게 나타나고, 그 표출방법을 제한했을 때와 넓혔을 때 어떻게 나타날까를 시도하고 있다.

1130일이 비올라나 콘트라베이스를 통해 각자에게 주어진 작품에서 얻어진 영감을 표현하고 있다면 12 8일은 하나의 작품에 대한 다섯의 음악적 영감을 그리고 있다. 이 두 콘서트는 미술 작품을 대상으로 음악적 영감을 표출한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개인적으로 작품이 주어진 쪽에서는 비교적 여유 있는 음상들이 제시되고 있음에 반해 같은 작품에 대한 다섯의 음악적 시각에서는 제한된 영역을 발견하게 한다.

왜 그런 결과가 나왔을까? 물론 평자의 시각의 옳고 그름의 문제이기 보다 어떤 점에서는 심리적인 결과의 소산이 아닌가를 생각하게 한다. 주최 측의 시도나 배려는 어쩌면 그런 상대적인 주제의 부담을 최소화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음을 보게 한다.

즉 일품오색의 경우 작곡가와의 사전 대담이나 연주현장에서 청중을 대상으로 작품에 대한 작가의 의견을 듣는 등 대화를 통한 상호감이나 교감을 함으로서 오픈 마인드를 통한 대중성을 강조하고 있기도 한다. 그런 상호성, 작가와 주최 측, 작가와 청중과의 교류는 폐쇄적이고 이기적일 수 있는 작가의 마인드를 사회적이게 한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지만 화음의 의도는 작가에게서 나타날 수 있는 다른 작곡가는 어떻게? 라는 부담을 최소화할 여지를 제고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것은 또한 앞으로도 비슷한 유의 작업을 계속할 것으로 추측되는 화음의 배려(?)이기도 하겠지만 궁극적으론 작가의 현실감각을 높이는 계기를 마련해 줄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시도는 시도라기보다는 예술이 당연히 지향해야 하는 영역확장이라고 보는 게 더 타당한 시각일 것이다.

 

음악사적으로도 예술 상호 영역간의 그런 시도는 끝없이 자행되고 있었다. 베토벤의 바이올린 9번 소나타 크로이첼은 결과적으로는 비판의 대상이 되었지만 대문호 톨스토이가 문학으로 표현함으로써 고유의 예술 영역을 교류의 영역으로 열었고, 무소르그스키는 친구인 화가 하르트만의 유작전시회를 "전람회의 그림"으로 명명, 피아노를 통해 영감을 구체화하고 있으며(후에 라벨이 오케스트라로 편곡,명성을 높였다) 작곡가 드뷔시는 상징파 문인들과의 교류를 통해 상징파의 영역을 열었다.

그것의 발전은 문학에서 화가들의 고유 영역이었던 인상주의를 음악으로 흡수하면서 그들과 동등한 자신만의 영역을 개척하고 있다.이런 상호성은 고유성만이 존재하는 예술영역간의 교류의 문을 열었던 효과도 있었지만 빈번함 보다는 고유성만 강조된 역사성으로 인해 위축 될 수밖에 없었고 어쩌면 작가들의 자기한계 극복의 장으로 활용된 게 아닌가 하는 점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특히 현대는 각 예술장르의 영역이 무의미할 정도로 장르 간 교류가 빈번해 졌다. 그런 점에서 화음의 이 프로젝트도 우리 음악계에 어떤 형태로든 직 · 간접적으로 지대한 영향을 끼칠 것이다. 그런 모습들은 평자가 본 두 프로젝트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물론 당연한 것은 소재의 명료성이다. 서구적 관점에서도 작품의 소재는 이미 오래전에 주변이 아니고 새로움에서 찾아야 했다. 그게 동양 음악에 대한 그들의 관심으로 나타났다. 상대적으로 우리에게는 무한일 정도의 소재가 넘치지만 아직은 우리 것에 대한 창작자들의 관심이 지대하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다. 그런 현실에서 미술이 소재가 된다는 것은 마치 아이디어의 보고로 인식할 정도로 눈이 트인다.

특히 화음에서 소재로 한 일품오색은 이런 기획자에 의한 시도도 가능하지만 가까운 친지나 그룹으로 했을 때 또 다른 양상으로 전개될 가능성이 높다. 물론 기획에 대한 치밀성이나 작곡가들에 대한 배려라는 점에서는 당연치 떨어지겠지만 창작과 교류라는 점에서는 중요한 이정표의 제시다. 특히 서구에서는 하나의 대본이나 테마에 대한 창작자들의 관심이 시대를 초월 오페라로 쓰여 지고 있음을 감안하면 이 시도는 분명 창작 계에 중요한 지표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시도와 결과라는 관점에서 봤을 때 11 30일에 이루어진censership 128일에 이루어진 일품오색에는 개념적 관점에서 상반된 양태로 나타나고 있다. 그것은 시간예술의 연속성과 영속성의 차이로 구별할 수 있을 것이다.

 

음악예술에는 시간의 절대성이 아니라 상대성이라는 관점에서 연속성과 영속성의 시간종속적인 절대가치로 존재 한다. 음악의 시간적 공간을 전제한 시간개념은 프랑스의 음악학자 브를레 여사가 화성 속에도 음악적시간이 있다고 정의함으로서 현대음악의 시간개념의 폭을 넓힌바 있다. 이때의 시간이 영속성의 시간인데 비올라와 베이스로 이루이진 censership에서는 시간 개념이 연속성을 보이며 직접적인 시간어법으로 전해진 반면 일품오색에서는 앙상블 구성상의 장점이 그대로 직시된 영속성의 시간이 되고 있었다. 물론 구성의 특성상 충분히 가능한 일이고 그것은 한대섭과 석윤복의 작품에서 유난히 두드러졌지만 개념적 관점에서 보면 조선희나 유진선, 이수현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런 시간 개념에 비해  censership콘서트에서는 4곡 모두 시간의 유동성을 지니고 있었다.

왜 그런 결과가 났을까? 어쩌면 작품에 대한 상대인식에서 비롯된 게 아닌가 생각 된다. 이런 점은 censership 의 네 작품이 모두 개인적 특성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음에서도 알 수 있다.

임지선의 "메모리"속에 담긴 기억의 편린들뿐 아니라 개성적이면서도 이기적인 의지가 작품을 주관적 이기 속에 각인시키는 점에서 작가의 개성을 엿보게 한다.

백영은의 "남자의 길"에는 소통의 장이 있다. 개념적으로 드로잉을 통한 회상성과 실체를 통한 구체성이라는 상반된 아이디어에서 출발하고 있지만 각 곡에 담긴 성격적인 요소는 다분히 다양한 감성으로 그려지고 있어서 작가의 의도를 분명히 드러낸다.

김성기의 "비 온 후"에는 자연적 뉘앙스보다는 크림트와 비엔나라는 상관관계를 구체화한 듯한 화풍이 비올라를 통해 때론 화려하게 펼쳐지면서 작가의 특성을 보이고 있다.

이와는 상반되게 상념의 시간을 그린 장은호의 “아리아”에는 중심점에 회귀한다는 점에서 동양의 윤회사상을 엿보게 한다. 결국은 우리가 삶속에서 몸부림치며 새로운, 혹은 더 높은 곳으로 향하려는 의지를 보이지만 궁극적으론 흙으로 돌아가는 인생의 여정이 보인다.

이렇듯 각 작품은 작가의 취향이 때론 직접적이게 때론 간접적이게 나타나면서도 자신의 개성을 보이고 있다.

 

반면 일품오색에는 성격적인 요소보다 작품성이 두드러지고 있는 점에서 censership과 괘를 달리 한다. 동양화가 그렇듯 “미인도”에는 수묵화에 담채 색 정도가 담긴 여유롭고 풍성함은 마치 르네상스 화가들이 즐겨 그린 풍만한 볼륨의 여인상이 연상되기도 하며 담백하면서도 고아한 교태까지도 넘실되는 우아한 풍채와 무엇인가를 응시하는 듯한 시선에서 묻어나는 교태 등은 실로 신윤복의 담대함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이수현의 “미인도”는 능동적이어서 또 다른 해석의 묘미를 전해 준다. 그것은 한국적이라는 정서의 영역 한계를 넘어서 더 넓은 세계로 펼치려는 시도가 보인다.

유진선이 음악으로 그린 그림 속에는 그가 시도한 mi in do처럼 작품의 외형을 그린 선율 선 속에 여인네들의 말 못하는 그러나 가슴에 담고 있는 모든 정서가 함축되어 녹아 있다. 수묵화의 정서를 미인도를 통해 자신만의 나름대로의 설정을 시도한 듯 인상을 받는다. 자신의 이기적일 정도의 개념을 정리하기 위해 국악의 농음을 현의 비브라토를 통해 표현한 것이라든가 톤의 볼륨을 통해 색의 농도를 나타내려한 듯 한 표현 속에도 꾸준한 시도가 보인다.

조선희의 음화에는 여백을 통한 조선 여인들의 삶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시집살이나 속박, 자신에 대한 회한 등을 견뎌야 하는 여인들의 삶의 속성 그 자체일 것이다. 듣고도 안 들은 척, 보고도 못 본 척, 그리고 입을 다물고 살아야 하는 우리네 여인들의 삶이 녹아 있다.

한대섭의 작품에는 신윤복의 그림에서 보는 정지된 시간이 유유함을 지니고 흐르고 있다. 그것은 타악기를 동반한 7중주의 앙상블구조를 안정되면서도 생동감이 넘치는 선적, 수평적 구조를 이루고 있어서 화폭의 고풍스러움을 시대적 음상으로 객관화하고 있다.

석윤복의 시간에는 신윤복의 미인도에서 보여 지는 이미지가 강하게 오버랩 된다. 물론 그 이미지는 시간성보다 판화의 구상이 돋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음악에서 연주는 창작자의 구상을 대신 실천한다는 점에서 재창조 예술이다. 그러나 일품오색에서의 시도에는 창조, 재창조-창조, 재창조라는 재생예술의 연결 고리가 미술과 작곡, 그리고 연주로 이어지면서 음악의 새로운 영역을 열어 가고 있는 점이 신선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