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죽음의 볼레로-화음 프로젝트 Op.78
성혜영 / 2009-04-28 / HIT : 1111
화음 프로젝트 Op.78
임지선의 "Secret of Golden Color - Klimt's Confession"
“예술이란 자기 자신을 그 운명에 적응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 맞붙어 씨름을 벌이는 사람들의 호소”(쇤베르크)라고 한다. 그 호소의 생명력이 바로 예술의 생명력이다. 세기말 비엔나. 구스타프 말러와 아놀드 쇤베르크, 오토 바그너와 아돌프 로스, 구스타프 클림트와 오스카 코코슈카... 음악, 건축, 미술 등 저마다의 영역에서 주어진 운명에 딴죽을 걸었던 용감한 씨름꾼들의 호소는 한 세기가 훌쩍 지난 오늘까지도 쟁쟁하게 울린다.
“시대에는 그 시대의 예술을, 예술에는 자유를!” 기치로, 아카데미즘으로부터의 해방을 외쳤던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1862-1918). 그가 서울에 왔다. 캘린더와 포스터, 혹은 찻잔 위에서 황금빛 색채와 장식적인 디테일로 화려함을 뽐내던 짝퉁 클림트를 볼 때마다 그의 호소가 안타깝게 느껴지던 차였다.
모순으로 가득찬 <유디트> 앞에서 그의 호소를 다시금 생각해 본다. 비잔틴풍의 황금빛 장식을 배경으로 황후의 장신구를 걸친 <유디트>는 ‘비엔나의 모나리자’라고도 불리는 클림트의 대표작이다. 그러나 유디트는 더 이상 적장 홀로페르네스에게 복수를 하는 정숙한 여인의 이미지가 아니다. 왜장을 끌어안고 장렬한 최후를 맞이한 논개의 기개나, 꽃잎처럼 스러진 낙화암 삼천궁녀의 비련도 찾아 볼 수 없다. 도발적이고 당당한 그녀는 오히려 관능적인 팜므 파탈(femme fatale) 살로메에 가깝지만, 비통의 극치인 듯, 신성체험의 황홀경인 듯, 그녀의 표정은 기묘하게도 미켈란젤로의 <피에타>상의 성모와, 베르니니의 <성 테레사의 엑스터시>를 닮았다.
얼핏 현란한 황금빛과 장식적인 패턴이 눈을 황홀케 하지만, 잠시 호흡을 고르면 정체를 알 수 없는 칠흑 같은 어둠이 곳곳에 숨어있다. 유디트의 머리가 그렇고 베어진 적장의 두상이 그렇다. 밝고 경쾌한 에너지로 충만한 화면 뒤에 죽음과 지옥, 타나토스의 그림자가 호시탐탐 공격의 기회를 엿보고 있는 듯 섬뜩하다. 갑옷(?)은 가슴을 드러낸 어깨 위로 란제리처럼 흐느적거리고, 성직자들의 법복의 색깔이기도 한 보라색으로 표현된 점도 아이러니다. 이처럼 요부와 성녀, 에로스와 타나토스의 이미지가 극단적으로 혼재하는 <유디트>의 호소는 황홀한 신화가 아니라 불편한 진실이다. 혼란한 세기말 풍경, 나조차도 알 수 없는 내 안의 풍경을 의식하기 시작한 심리적 인간의 절규인 듯도 하다.
작곡가 임지선은 <유디트>의 호소를 어떻게 보고 들었을까? 화음 프로젝트 Op.78, <황금빛 비밀-클림트의 고백> (Secret of Golden Color - Klimt's Confession). 그 제목만으로도 작곡가는 헐렁한 수도승의 복장 속에 감추어진 클림트의 들끓는 내면에 주목했음이 분명하다. 바이올린과 오보에가 밝고 투명하게 금빛 찬란한 생의 찬가를 부르고 있다면, 첼로와 더블 베이스는 무겁고 진중하게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둠의 의미를 집요하게 탐색하는 듯하다. 아, 생의 덧없음이여! 잡힐 듯 말듯 이내 사라지는 신비로운 하프 선율에 취해 잠시 천상의 열락을 맛보다보면 어느 틈에 죽음의 그림자가 성큼 다가와 있다. 그러나 피할 수 없다면 즐기라던가. 운명과의 한 판 씨름을 위해 그 깊은 어둠 속으로 저벅저벅 걸어 들어가야 하는 것이 예술가의 몫이다. 그것은 시끌벅적한 악다구니가 아니라 과묵한 전사의 비장하고 결연한 호소여야 할 터, 첼로와 더블 베이스의 울림이 그 심연을 표현하지 못하고 만 공간적 제약이 못내 아쉬움으로 남는다.
개인도 사회도, 인정하기도 드러내기도 싫은 자신의 치부를 대면하는 일처럼 두려운 일이 있을까. 프로이드 식으로 말하자면 “파묻히고, 망각되었으며, 억압되고, 부인된 과거에 대한 일종의 고고학적 발굴”은 고통을 동반한다. 그러나 지붕을 걷어내면 어디나 신들의 드라마가 있다던가. 인간은 누구나 달래주지 않아 혼자 울고 있는 그림자를 내면 깊숙이 감춘 채 살아가는 존재다. 박완서는 “너만 그런 게 아니라, 남들도 다 그렇다는 위로처럼 확실하고 참담한 위로는 없다”고 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학과 예술의 임무는 바로 그 위로라고 나는 생각한다.
과연 ‘참담한 위로’도 위로일까? ‘절대로 이길 수 없는’ 삶이라는 괴물과의 씨름이 비록 패배로 끝난다 하더라도 그 절망의 한 귀퉁이에서도 반짝이는 어떤 따듯함. 그것이 바로 예술가가 지켜내야 할 마지막 보루이자 위로이고 아름다움이다. 그 아름다움을 위해 음악가는 음과 음 사이에서 침묵하고, 시인은 단어와 단어 사이에서 머뭇거리고, 화가는 색과 색, 선과 선 사이에서 고민하는 것일 게다. 덧없어 더욱 아름다운 것이 인생이고 예술이라던가. 어쩌면 우리는 한 순간의 열락을 찾아 긴 생을 헤매고, 또 그 한 순간의 행복을 품고 비루한 생을 견디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임지선의 "Secret of Golden Color - Klimt's Confession"
“예술이란 자기 자신을 그 운명에 적응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 맞붙어 씨름을 벌이는 사람들의 호소”(쇤베르크)라고 한다. 그 호소의 생명력이 바로 예술의 생명력이다. 세기말 비엔나. 구스타프 말러와 아놀드 쇤베르크, 오토 바그너와 아돌프 로스, 구스타프 클림트와 오스카 코코슈카... 음악, 건축, 미술 등 저마다의 영역에서 주어진 운명에 딴죽을 걸었던 용감한 씨름꾼들의 호소는 한 세기가 훌쩍 지난 오늘까지도 쟁쟁하게 울린다.
“시대에는 그 시대의 예술을, 예술에는 자유를!” 기치로, 아카데미즘으로부터의 해방을 외쳤던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1862-1918). 그가 서울에 왔다. 캘린더와 포스터, 혹은 찻잔 위에서 황금빛 색채와 장식적인 디테일로 화려함을 뽐내던 짝퉁 클림트를 볼 때마다 그의 호소가 안타깝게 느껴지던 차였다.
모순으로 가득찬 <유디트> 앞에서 그의 호소를 다시금 생각해 본다. 비잔틴풍의 황금빛 장식을 배경으로 황후의 장신구를 걸친 <유디트>는 ‘비엔나의 모나리자’라고도 불리는 클림트의 대표작이다. 그러나 유디트는 더 이상 적장 홀로페르네스에게 복수를 하는 정숙한 여인의 이미지가 아니다. 왜장을 끌어안고 장렬한 최후를 맞이한 논개의 기개나, 꽃잎처럼 스러진 낙화암 삼천궁녀의 비련도 찾아 볼 수 없다. 도발적이고 당당한 그녀는 오히려 관능적인 팜므 파탈(femme fatale) 살로메에 가깝지만, 비통의 극치인 듯, 신성체험의 황홀경인 듯, 그녀의 표정은 기묘하게도 미켈란젤로의 <피에타>상의 성모와, 베르니니의 <성 테레사의 엑스터시>를 닮았다.
얼핏 현란한 황금빛과 장식적인 패턴이 눈을 황홀케 하지만, 잠시 호흡을 고르면 정체를 알 수 없는 칠흑 같은 어둠이 곳곳에 숨어있다. 유디트의 머리가 그렇고 베어진 적장의 두상이 그렇다. 밝고 경쾌한 에너지로 충만한 화면 뒤에 죽음과 지옥, 타나토스의 그림자가 호시탐탐 공격의 기회를 엿보고 있는 듯 섬뜩하다. 갑옷(?)은 가슴을 드러낸 어깨 위로 란제리처럼 흐느적거리고, 성직자들의 법복의 색깔이기도 한 보라색으로 표현된 점도 아이러니다. 이처럼 요부와 성녀, 에로스와 타나토스의 이미지가 극단적으로 혼재하는 <유디트>의 호소는 황홀한 신화가 아니라 불편한 진실이다. 혼란한 세기말 풍경, 나조차도 알 수 없는 내 안의 풍경을 의식하기 시작한 심리적 인간의 절규인 듯도 하다.
작곡가 임지선은 <유디트>의 호소를 어떻게 보고 들었을까? 화음 프로젝트 Op.78, <황금빛 비밀-클림트의 고백> (Secret of Golden Color - Klimt's Confession). 그 제목만으로도 작곡가는 헐렁한 수도승의 복장 속에 감추어진 클림트의 들끓는 내면에 주목했음이 분명하다. 바이올린과 오보에가 밝고 투명하게 금빛 찬란한 생의 찬가를 부르고 있다면, 첼로와 더블 베이스는 무겁고 진중하게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둠의 의미를 집요하게 탐색하는 듯하다. 아, 생의 덧없음이여! 잡힐 듯 말듯 이내 사라지는 신비로운 하프 선율에 취해 잠시 천상의 열락을 맛보다보면 어느 틈에 죽음의 그림자가 성큼 다가와 있다. 그러나 피할 수 없다면 즐기라던가. 운명과의 한 판 씨름을 위해 그 깊은 어둠 속으로 저벅저벅 걸어 들어가야 하는 것이 예술가의 몫이다. 그것은 시끌벅적한 악다구니가 아니라 과묵한 전사의 비장하고 결연한 호소여야 할 터, 첼로와 더블 베이스의 울림이 그 심연을 표현하지 못하고 만 공간적 제약이 못내 아쉬움으로 남는다.
개인도 사회도, 인정하기도 드러내기도 싫은 자신의 치부를 대면하는 일처럼 두려운 일이 있을까. 프로이드 식으로 말하자면 “파묻히고, 망각되었으며, 억압되고, 부인된 과거에 대한 일종의 고고학적 발굴”은 고통을 동반한다. 그러나 지붕을 걷어내면 어디나 신들의 드라마가 있다던가. 인간은 누구나 달래주지 않아 혼자 울고 있는 그림자를 내면 깊숙이 감춘 채 살아가는 존재다. 박완서는 “너만 그런 게 아니라, 남들도 다 그렇다는 위로처럼 확실하고 참담한 위로는 없다”고 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학과 예술의 임무는 바로 그 위로라고 나는 생각한다.
과연 ‘참담한 위로’도 위로일까? ‘절대로 이길 수 없는’ 삶이라는 괴물과의 씨름이 비록 패배로 끝난다 하더라도 그 절망의 한 귀퉁이에서도 반짝이는 어떤 따듯함. 그것이 바로 예술가가 지켜내야 할 마지막 보루이자 위로이고 아름다움이다. 그 아름다움을 위해 음악가는 음과 음 사이에서 침묵하고, 시인은 단어와 단어 사이에서 머뭇거리고, 화가는 색과 색, 선과 선 사이에서 고민하는 것일 게다. 덧없어 더욱 아름다운 것이 인생이고 예술이라던가. 어쩌면 우리는 한 순간의 열락을 찾아 긴 생을 헤매고, 또 그 한 순간의 행복을 품고 비루한 생을 견디는 것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