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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부재와 고독의 예술
이경분 / 2009-04-24 / HIT : 1002

부재와 고독의 예술
클림트의 <비온 후>와 김성기의 <비올라를 위한 독백>, 화음 프로젝트 Op.77 


이경분(음악학 박사) 

 

 


클림트의 1898년 작 <비온 후>는 금빛으로 번쩍이는 클림트의 다른 그림들에 비해 전혀 드라마틱하지 않다. 오히려 평범해 보이기까지 한다. 나무와 풀, 꽃이 있고 닭들이 있는 풍경. 하지만 평범해 보이는 유화 풍경화임에도 이 그림 앞에서 발길이 멈춰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파스텔화 같이 부드러운 그림이지만, 관객의 시선을 잡아당기는 이 은근한 힘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그림을 자세히 바라보니, 실제 닭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린 것이 아니라 흰색과 검은 색 닭의 상징만을 어떤 의도에 따라 배열해 놓은 손길이 느껴진다. 또한 흔한 원근법을 사용한 듯하지만, 뒤쪽의 닭은 마치 흰 점에 불과한 듯 작아서, 원근법도 과장이 심하고 왜곡된 것이다. 더욱이 신기한 것은 화폭은 거의 녹색으로 꽉 차 있음에도 뭔가 부재한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그리고 뭔가 없다는 느낌은 곧 채워지기를 바라는 욕망으로 변한다. 그래서인지 <비온 후>는 여느 풍경화 같지 않게 화폭의 바깥에 있는 보이지 않는 존재를 생각하게 만드는 묘한 작품이다. 

클림트의 작품 중에 평범하게 보이지만 전혀 평범하지 않는 <비온 후>를 3/4박자의 음악으로 해석한 것이 김성기의 <비올라를 위한 독백>이다. 왈츠의 리듬은 전체 작품의 리듬적 틀을 유지하고 운동성을 부여한다. 일반적으로 왈츠를 생각하면 명랑한 분위기일 것 같지만, 여기서는 그렇지 않다. 비 온 후의 정원처럼 상큼하고 맑은 느낌의 순간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왠지 우울한 그림자가 느껴진다. 그림 <비온 후>의 녹색이 묘한 부재의 느낌으로 인해 천진난만하게 밝을 수 없는 것처럼, <비올라를 위한 독백>에서도 왈츠의 리듬이 그저 명랑할 수 없음이 음악이 흐를수록 분명해진다. 위로 도약하면 아래로 끌어당기는 선율적 구조가 자주 반복됨으로써, 분주하게 움직이지만 멀리 가지 못하고 제자리에 맴도는 듯한 느낌 때문일까? 
어쨌든 화폭에서 유일하게 움직임을 품고 있는 생명체인 닭이 콕콕 모이를 쪼는 것, 닭의 좁은 반경 그리고 닭 특유의 절도 있는 목의 움직임을 상상할 수 있을 정도로 음악은 클림트의 그림을 청각적으로 번역해놓았다.
이런 식으로 곡의 첫 부분은 3/4박자의 리듬을 일관되게 지속하며 운동성을 만들어간다. 하지만 외로운 비올라의 선율은 곡의 중간 부분에서 그 동안 일관되게 흘러온 흐름을 잠시 끊어버린다. 페르마타로 한 숨 돌리고 난 후 시작되는 두 번째 부분은 첫 부분과 비슷하게 반복하긴 하지만, 첫 부분에서와 달리 왈츠의 리듬이 자주 흔들린다. 페르마타가 잦고, 쉼표가 길어지며 템포도 느려지면서(Adagio) 앞서 이루어 놓은 운동성이 해체되고, 음악은 탄식과 한숨 쉬는 소리로 변한다. 빨라졌다 느려지기도 하고 세어졌다 약해지는 다이내믹과 템포의 잦은 변화는 불안하고 떨리는 존재를 암시한다. 바깥을 바라보던 시선이 자신도 모르게 어느 새 내부로 향하는 것을 어쩌지 못한다. 다시 시선을 바깥으로 되돌려 놓으려는 노력은 계속되지만, 점점 빨라졌다가(accel.) 다시 느려지고(rall.), 또 제자리로 왔다가(a tempo) 느려지는(rit.) 끝부분에 가서 결국 고독한 존재의 내면을 드러내고 만다. 스스로에게 묻고 스스로 답하는 이 존재의 자기 고백은 작품 끝에서 3번 (Eb-C-Bb-G)이나 반복된다. 소통할 자 없는 외로운 존재의 자기 다짐일까?
클림트의 <비온 후>처럼 김성기의 <비올라를 위한 독백>도 전혀 드라마틱하지 않다. 하나의 정점을 향해가지도 않는다. 절정이 없는 대신 오히려 움직임과 운동성이 궤도를 벗어나 나직하게 노래하는 순간. 즉 외로운 고백이 작품의 중심에 있다. 그러고 보면 <비올라를 위한 독백>은 독특한 방식으로 고독의 시선을 느끼게 하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