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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2015 화음 프로젝트 페스티벌]현대미술과 현대음악. 미를 넘어서는 예술적 진실과 소통
이경분 / 2016-02-15 / HIT : 1505

현대미술과 현대음악. 미를 넘어서는 예술적 진실과 소통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음악인가


 

이경분(음악학)

 

현대미술 vs 현대음악: 자유 vs 강요

 

21세기가 된 지금 현대음악은 여전히 낯설다. 문학에서는 카프카(F. Kafka) <변신>이나 <심판>과 같은 수준 높은 현대작품도 대중적이고 폭넓은 독자층의 사랑을 받고 있다. 현대미술도 비슷하다. 회화에서는 추상적인 그림이라도 큰 거부반응을 일으키지 않는다. 피카소(P. Picasso)의 추상적 회화 뿐 아니라 초현실주의 화가로 알려진 살바도르 달리(S. Dali)의 그림도 장식물로 이용된다. 가정의 서재나 응접실, 카페에 걸려있는 것도 자주 목격할 수 있다. 반면, 쇤베르크(A. Schoenberg)나 베베른(A. Webern)의 음악을 카페의 배경 음향으로 사용되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회화는 시간적 예술이 아니므로 시간이 흘러도 특별히 훼손하지 않는 한 오랫동안 작품이 그대로 존재한다. 음악처럼 순간적으로 과도한 집중을 요구하지 않는다. 한 그림을 10분 동안 감상할 수 있고, 천천히 음미하면서 종일 바라 볼 수도 있다. 영국의 영화감독 피터 그린어웨이(P. Greenaway)는 영화를 찍는 동안에 렘브란트의 <파수꾼>을 매주 두 번 30분씩 여러 달을 자신의 템포로 관찰했다고 한다.물론 음악도 매일 같은 곡을 여러 차례 반복해서 들을 수 있지만, 그 의미는 다르다. 그림은 1분을 감상해도 전체가 동시에 존재하므로, 1분의 의미가 총체적이다. 무엇을 보든지, 어떤 순서로 보든 상관없다. 반면 음악은 10분짜리 곡을 20분으로 늘여서 들을 수 없다. 주어진 시간 내에서는 주어진 부분만을 들을 수 있다.


미술은 각자의 관점과 각자의 심리적 템포에 맞게 관람하는 자유가 있다. 반면, 음악은 치명적이게도 그렇지 않다. 오늘날 아무리 재생복제기술이 발달하여 언제 어디서나 음악을 들을 수 있고, 얼마든지 반복하여 들을 수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정해진 음향의 짜임새는 청자의 작위적인 확대나 시간적 연장을 허용하지 않는다. 음악의 본질은 시간성이기 때문이다. 이 시간성을 극복하고자, 각자가 원하는 순서에 따라 연주하고 수용하는 것을 시도한 우연성 음악도 이 시간성을 뛰어넘지 못했다. 현대음악이 힘든 수용으로 인해 기진맥진의 상태에 있는 것은 음악의 본질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아름다움을 넘어서는 예술적 진실과 소통

 

다른 한편, 현대예술에서는 그림이나 음악이나 전통적인 개념의 '아름다움'이라는 개념으로 접근하면, 뒤통수를 맞는 느낌이 들 것이다. 현대음악이나 현대 미술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그런 아름다움에는 관심이 없다. 저것이 뭐지? 라고 호기심반, 의구심반으로 그림을 바라보고, 음악을 듣는 경우가 허다하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현대사회에서 존재하기 힘든 조화나 하모니를 존재하는 양 그려내기 힘든 거부감이 현대예술계 주위를 맴돌고 있다.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설치된 미술관, 감탄을 자아내는 공원 등이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다. 문제의 핵심은 인간관계의 부조화와 단절이다. 아무리 조화롭고 우아하고, 아름다운 건축물이 있고, 감탄을 자아내는 멋진 장소가 눈에 보여도, 사정은 달라지지 않는다. 눈에 보이지 않는 인간관계의 부조화는 현재 사회와 인간을 움직이는 힘의 구조 속에 들어있다. 다른 사람을 밟고 서야 내가 성공하고 멋진 인간으로 여겨지는 구조와 문화적 맥락이다. 경쟁의 바다에서 오로지 낙오되거나 탈락되지 않기 위해서 다른 인간과의 연대하기 힘든 상황이니 하모니나 따뜻한 시선은 오히려 거짓이나 가식으로 여겨질 수 있다.


2015년 화음프로젝트의 음악가들이 선택한 그림 중에도 단절과 고독, 모순으로 가득 찬 것들을 볼 수 있다. 유정현의 <Urban Plant-오르는 식물>, 크리스토퍼 다비드 화이트(Christopher David White)<질식(Asphyxia)> 또는 콜레트 어반(Colette Urban) <a song to sing, a tale to tell, a point to make> 등의 미술작품은 현대인/현대사회의 고통과 모순과 아이러니를 드러내고 있다. 이 작품들을 현대음악어법으로 창작한 유도원의 <경계의 모순 위에서>, 한대섭의 <검은 숨> 등도 단절되고 고독한 인간을 절규한다. 그런데 문제는 다시 소통이다. 메시지가 허공에 쏘아 올린 풍선처럼 떠돌아다니다가 사라져버린다면 작가는 오래가지 못해 지쳐버리기 때문이다.

 
 

 

누구를 위한 음악, 무엇을 위한 음악?

 

현대 창작음악의 가장 중요한 문제는 소통이다. 소통을 위해 두 가지 기본적 물음은 무엇을 위한 음악이며, ‘누구를 위한 음악인가이다. 아우슈비츠와 같은 극한 상황에서 죽기 직전까지 <아틀란트의 황제(Der Kaiser von Atlantis)> 등 많은 작품을 창작했던 빅토 울만(Viktor Ullmann)의 경우, 음악은 표현이 불가능한 처참한 고통과 치욕을 넘어서 삶에의 의미와 희망을 주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이었지만, 작곡을 계속한 울만은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왜 작곡하는가의 물음을 제기할 필요조차 없었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는 음악에 몰두하는 행위자체가 생존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한국의 상황은 그렇지 않다. 음악자체에 몰두하는 것보다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음악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자기 합리화를 하지 않는다면 음악행위에의 회의감에 압도당하고 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