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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슬픔이 기쁨에게, 기쁨이 슬픔에게
성혜영 / 2011-04-06 / HIT : 1163

2011 호암아트홀 앙상블 페스티벌 <봄의 제전>-화음쳄버오케스트라& 첼리스트 양성원



슬픔이 기쁨에게, 기쁨이 슬픔에게



 

흉흉한 날이었다. 봄소식 대신에 날아온 일본 도호쿠 지방의 쓰나미와 방사능 소식에
가뜩이나 심란하던 차였는데,
그날따라 찬바람까지 심술을 부렸다.
첼리스트 양성원이 협연하는 화음쳄버오케스트라 연주회가 있던 날, 진짜 봄은 아직 멀리 있는 듯했다.
 
 

 

몸도 마음도 시렸기 때문이었을까.
슈베르트의 <아르페지오네 소나타 A단조>는 ‘봄의 제전’이라는 타이틀 아래 듣기에는 너무 비장하고 슬펐다.
누군가는 이 곡을 ‘슬픔의 소리통’이라고 했다지. 곡을 쓸 당시 슈베르트는 극도의 심신 쇠약 상태에 있었다는데,
“잠이 들면 다시는 눈뜨지 않았으면” 했다는 그의 슬픔이 어느 정도였을지는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런데 슈베르트는 “슬픔으로 만들어진 작품만이 사람들을 즐겁게 할 수 있다”고도 했단다.
 
 

 

슬픔이 사람들을 즐겁게 한다고? 과연 그럴까?
타인의 불행에 견주어 내가 행복하다고, 아니면 덜 불행하다고 안도하게 해준다는 뜻일까? 아닐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아마도 슈베르트는 그에게 슬픔을 선물하고 싶었을 게다.
 

 

나는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주겠다...(중략)
 
 
무관심한 너의 사랑을 위해/ 흘릴 줄 모르는 너의 눈물을 위해/ 나는 이제 너에게도 기다림을 주겠다/
이 세상에 내리던 함박눈을 멈추겠다/ 보리밭에 내리던 봄눈들을 데리고/
추워 떠는 사람들의 슬픔에게 다녀와서/ 눈 그친 눈길을 너와 함께 걷겠다./
슬픔의 힘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기다림의 슬픔까지 걸어가겠다. (정호승, ‘슬픔이 기쁨에게’)
 
 

 

슬픔의 바닥까지 가본 사람들은 안다. 그 슬픔이 얼마나 힘이 센지.
그 슬픔의 힘은 세상을 얼마나 더 투명하게 보여주는지,
사람들의 이야기를 또 얼마나 간절하게 들여주는지 말이다.
그 슬픔의 힘으로 사람과 사람이 소통을 하게 되는 세상은 정말 행복할 것이다.
그것이 슈베르트가 꿈꾼 즐거운 세상이었을까. 모든 아름다움에는 비극의 냄새가 난다지.
슈베르트는 극한의 고통 속에서 슬픔의 힘으로 이 아름다운 곡을 썼고,
아름다운 음악은 다시 슬픔의 힘을 일깨워준다.
 
 

 

슬픔이라고 다 같은 슬픔이 아니다. 비장한가 하면 영롱하고, 쾌활하다가 우수에 젖고,
격정적인가 하면 유순하고, 어두운 듯 반짝반짝 빛난다.
양성원의 풍부하고 유려한 선율 위에서 마치 프리즘에 비춘 듯 천변만화하는 슬픔들이 가슴을 파고들었다.
슬픔의 늪은 깊었다.
 
 

 

싱싱함이 빛났던 젊은 작곡가 강혜리의 <현을 위한 “순환-0”, 화음프로젝트 작품 72>와,
삶의 기쁨이 전편에 춤추는 듯했던 멘델스존의 <현악오케스트라를 위한 쳄버심포니 E플랫 장조>가 없었더라면
그 슬픔의 늪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다. 기쁨이 슬픔에게 손을 내밀었다.
거대한 불행 앞에서 차라리 무릎을 꿇어 버리는 것보다 소소한 불행과 대항하여 싸우는 일이 더 어렵다던가.
 나는 그 손을 잡고 다시 바쁜 일상으로 돌아왔다.
 
 
 

 

돌아보니 이주일이나 지났다. 거대한 불행이 지나간 자리에 다시 소소한 불행들이 줄을 섰다.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창밖은 봄이었다. 반갑다, 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