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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2015 화음 프로젝트 페스티벌] 세 가지 질문
신예슬 / 2016-01-07 / HIT : 1519

세 가지 질문

 

신예슬


2015 화음 프로젝트 페스티벌 프로그램 중 세 개의 공연을 관람했다. 여섯 번째, 일곱 번째, 여덟 번째의 공연으로 한국에서 연주되는 화음 프로젝트 페스티벌 프로그램 중 마지막 공연들이었다. 공연의 성격, 현장, 형태, 외양은 물론 연주되는 곡, 분위기 등 많은 것들이 달랐다. 화음프로젝트의 주된 목적은 음악과 미술의 만남이다. 그 주제와 관련된 몇 가지 질문들이 떠올랐다. 공간의 적절성, 화음 프로젝트에서의 음악과 미술의 유사성, 미술의 필요성이다.

 

 

 

질문 1. 연주되기에 적절한 현장인가?

 

Day 6 광주시립미술관

요코하마, 도시에 서식하다-BankART1929의 Activity

*조선통신사 프로젝트 II

2015년 11월 6일 금요일 4시 30분

바이올린 | 이보연, 박현 비올라 | 에르완 리샤Erwan Richard

첼로 | 이헬렌 베이스 | 조용우 오보에 | 윤민규 생황 | 김효영

 

예술의 장르를 규정하는 기준 중 하나는 공간일 것이다. 미술은 갤러리에서, 음악은 홀에서. 더 나누자면 클래식은 콘서트홀에서, 밴드음악은 라이브홀에서, EDM은 늦은 밤 클럽에서. 어떤 작품이 보이기에 가장 적절한 공간이 있고 때로 그 작품의 정체성은 현장의 특성과 분위기로 정의되기도 한다. 화음 프로젝트 페스티벌에서 특별한 점은 두 가지이다. 음악이지만 미술을 비롯한 다른 예술들에서 영감을 받아 곡을 쓴다는 것, 그리고 미술의 공간인 갤러리에서 연주한다는 것.

 

갤러리는 시각예술을 감상하는 곳이지만 최근의 갤러리는 소리나 음악과 무관하지 않다. 사운드 아트를 비롯해 여러 청각과 관련된 작업들이 갤러리에서 전시된 지 오래되었다. 이런 것들이 연주회장에 온다면 음악이라 불리겠지만, 갤러리에서는 현대미술의 새 형태로 받아들여진다. 반면 화음은 음악을 음악으로서 갤러리에 가져온다. 그래서 음악과 미술의 ‘만남’이 이뤄진다. 그래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그 만남을 둘러싼 상황이다. 음악은 미술의 영역에 초대된 손님인가 아니면 거기에 걸린 작품들처럼 그 현장의 주인인가.

 

왕명에 의한 외교사절단을 음악으로 그려낸 임지선의 화음 프로젝트 Op.147 <흩어진 기억과의 만남-조선통신사>가 처음 연주되었던 예술의 전당은 곡과 잘 어울리는 장소였다. 첫 공연과 달리 11월 6일 광주시립미술관의 상황은 조금 달랐다. <흩어진 기억과의 만남-조선통신사>의 두 번째 무대는 일본 요코하마의 대안예술집단 BankART1929의 작업 전반을 전시하는 ‘LIVING CITY: 도시에 서식하다’ 전시의 오프닝 행사였다. BankART1929는 오래된 건물을 문화예술에 사용하여 도심부 재생의 기점으로 삼고자 하는 창조도시 프로젝트 중 하나로 만들어진 예술공간이자 집단이다. 미술, 건축, 퍼포먼스, 음악 등 다방면의 장르를 대상으로 하며 스튜디오, 강의, 카페와 펍, 콘텐츠 제작 등을 기반으로 생활문화 증진을 비롯해 주최 사업 및 코디네이터 사업 등 여러 프로젝트를 활발히 실시하고 있다.

 

BankART1929가 한 장르에 구애받지 않고 예술의 영역에만 국한되지 않고 생활의 영역으로 뻗어 나가는 만큼 그 전시공간도 그 집단의 특성을 닮아있었다. 무거운 문을 닫은 채 모두가 숨죽이고 소리에만 집중하는 콘서트홀과 달리, 또 그림 하나하나에 성스러울 정도의 조명을 쏘며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게 줄을 쳐놓은 갤러리와도 달리, 그 장소는 일상적인 공간이었다. 그런 편안한 느낌은 BankART1929의 스튜디오 분위기를 최대한 살리려는 목적 때문이었다. 온갖 종류의 작업물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천장에는 그들이 직접 만든 옷과 모자가 걸려있고, 노이즈를 동반한 퍼포먼스의 결과물이었던 볼펜으로 구멍을 낸 사전, DVD와 책, 도자기 찻잔과 건축 모형 등 여러 사물이 산재해있었다. 그중에서도 즉흥성이나 퍼포먼스 자체가 더 강조되는 작품들, 요코하마시의 생활문화에 기여하는 것들, 그리고 예술의 진입장벽을 낮춰 보다 쉽게 예술행동에 참여할 수 있게끔 하는 작품들이 많았다.

 

BankART1929의 전시에 임지선의 곡이 연주된 이유는 전시되는 것 중 하나였던 속-조선통신사 프로젝트 때문이었다. 속-조선통신사는 ‘에도시대의 조선통신사를 베이스로 하면서 일본과 한국의 대안공간의 새로운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프로젝트’이다. 젊고 패기넘치는 일본인들로 구성된 속-조선통신사의 작가들은 서울에서 출발해 에도시대의 조선통신사가 갔던 길을 이동하며 한국의 대안공간들을 탐방했다. 이동 중에는 종종 타악 앙상블과 함께 행진을 했고 부산에 도착해서는 이전의 조선통신사들이 그러했듯 해신제도 지냈다. 그러나 속-조선통신사는 왕명의 권위가 담긴 여행이 아니었다. 요코하마의 한 대안공간으로서 BankART1929는 이를테면 협업자를 찾는 여행을 했다. 에도시대의 조선통신사가 국가 단위의 큰 만남이었다면 BankART1929의 속-조선통신사는 대안공간들과 작가들끼리의 만남이었다. 같은 길을 걸었고 둘 다 풍성한 문화교류가 있었지만, 그 주체는 달랐다.

 

여기서 한편의 대서사시를 견고하게 프로의 손길로 그려낸 임지선의 곡이 연주된다. 시각적으로도 대조적이었다. 연주자들이 입은 정교한 정장풍의 옷과 천장에 걸린 아마추어의 옷과 고깔모자, 구멍 난 사전과 매끈한 악보. 임지선의 작품과 BankART1929의 작품은 조선통신사라는 같은 현상에 대한 다른 서술이었다. 이 두 작업의 만남에서 어긋난 지점은 그 프로젝트들이 속한 제도권이었다. 콘서트홀에서 임지선의 작품은 마치 공간의 주인 같았지만 BankART1929의 작업물들 사이에서는 젊은이들의 아지트에 초대된 손님에 가까웠다. 두 프로젝트는 작품의 기획 의도나 목적 등 세부적인 내용도 다르지만, 그래도 만약 두 작품의 만남을 위해 더욱 서로의 장점을 살릴 수 있도록 잘 조율된 현장에서 연주가 이뤄졌다면 다름보다는 다양함이 더 드러났을 것이다. BankART1929의 속-조선통신사의 프로젝트의 행진에서 연주되었던 곡들이 콘서트홀에서 연주되어도, BankART1929의 전시가 화려한 조명 아래 함부로 손댈 수 없도록 경계선이 그어져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두 작품이 만나기에 가장 적절한 현장이었는지, 그리고 가장 큰 주제 외에 다른 접점이 있었는지 확신하기는 어렵다. 임지선의 조선통신사와 BankART1929의 속-조선통신사의 만남은 음악과 미술의 만남일 뿐 아니라 다른 공간과 영역, 다른 제도권의 만남이기도 했다.

 

임지선의 작품은 다른 화음프로젝트의 작품들과 다르게 BankART1929의 속-조선통신사 프로젝트로가 아니라 개인적인 경험에서 영감을 받아 창작되었다. 서로의 프로젝트에 대한 사전 정보 없이 만들어진 작품들이기 때문에 약간의 균열은 불가피했던 일인 듯하다. 그러나 그 낯섦과 어긋남이 흥미진진한 출발점이 될 수도 있다. 이중으로 굳게 닫힌 콘서트홀의 문을 열고 대안공간으로 들어가는 한 작품과 대안공간에서 갤러리로 들어가는 한 작품이 만나는 중간지점이 바로 11월 6일 광주시립미술관이었을지도 모른다.

 

 

 

질문 2. 미술에 영감을 받아 만든 음악에서 미술과 음악은 어떻게 유사한가?

 

Day 7 스페이스C

Radical Gestures_Uncanny Feminism

2015년 11월 18일 수요일 4

바이올린 | 최윤제, 김지윤 비올라 | 에르완 리샤Erwan Richard

첼로 | 이상경 베이스 | 조용우 플루트 | 이예린 클라리넷 | 손한요

 

많은 사람이 이야기하듯 해석은 자유다. 어떤 작품에 대해 생각하고 자신만의 해석을 내놓는 것이 예술감상의 큰 즐거움 중 하나이지 않겠는가. 그리고 우리는 해석의 근거를 찾곤 한다. 객관적이고 치밀한 근거는 좋은 해석의 기반이 된다. 이 작품이 어떤지 알기 위해 작곡가의 말을 찾고 기록들을 살핀다.

 

화음의 경우를 보자. 화음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창작된 곡들을 듣고 어떤 해석을 내놓으려고 하는 나는 그 해석의 근거를 찾는다. 프로그램 노트에 적힌 작곡가의 글을 보고 공연 시작 전에 들을 수 있는 작곡가의 말을 들으며 그들이 영감을 받은 미술작품을 어떻게 해석했고 어떤 결과를 내놓았는지 이해해본다. 해석의 과정을 따져보면, 나는 미술작품을 작곡가들이 나름의 방식으로 해석하며 만들었던 음악작품을 해석한다. 창작의 원천이 된 미술작품이 어떤 것인지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작곡가들이 그 작품에서 뭘 보았는지도. 단순히 갤러리에서 연주한다는 것만으로, 공연장에 그림을 가져온다는 것만으로 음악과 미술의 만남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해석을 할 만한, 그 이상의 접점이 있을 것이다.

 

일곱 번째 화음 프로젝트 공연 ‘Radical Gestures_Uncanny Feminism’은 스페이스C의 댄싱마마 전과 연계된 공연이었다. 댄싱마마는 ‘신체 퍼포먼스를 비롯하여 여성 작가들의 비디오 영상, 사진 작업 등을 통해 동시대 현대미술에서 여성주의의 새로운 맥락을 고민해보고자 마련한 전시’였다. 댄싱마마 전에서는 총 열 두 개의 작품이 전시됐지만 그 중 음악에 영감을 준 작품들은 네 개. 콜레트 어반의 <부르려 하는 노래, 들려주려는 이야기, 밝히려는 의미>는 성세인의 동명의 음악작품의, 로레 프로보스트의 <원티>는 이재문의 'New Work'의, 커스텐 저스테센의 <벽장 안의 초상>은 김주형의 '잃어버린 공간'의, 홍이현숙의 <폐경의례>는 안상미의 'To The Cotton Flower'의 창작의 출발점이 되었다. 이 네 작품을 비롯한 댄싱마마의 작품들은 구체적이다. 형태와 상징이 명확하다. 콜레트 어반의 작품에서는 몸 크기에 맞지 않는 긴 팔과 소녀 옷을 입은 성인 여자와 입에 물린 재갈이, 로레 프로보스트의 작품에서는 갑자기 사라진 할아버지를 그리워하는 할머니의 이야기가, 커스텐 저스테센의 작품에서는 ‘어머니의 자궁처럼 깊고 내밀한 장소인 벽장’에 있는 작가 자신이, 홍이현숙의 작품에서는 ‘여성의 생물학적 생산성 상실이 아니라 여성으로서의 역할과 지위를 초월하는 것’으로서의 폐경까지.

 

반면 음악으로 옮겨가면서 이 주제들은 추상화된다. 각 곡이 연주되기 전 작곡가들은 작품에서 자신들이 어떤 걸을 느꼈고 어떤 음악을 만들고 싶었는지 충분히 설명해주었다. 그러나 음악은 말이 없다. 그들의 설명이 결코 모자라지 않았음에도 음악은 직접적이지 않았다. 상징적이었다. 만약 어떤 작품이 여성주의를 말하고 싶다고 했을 때, 이를테면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재갈을 문 여자의 영상을 보는 것과 적극적인 존재를 상징하는 한 프레이즈와 보다 덜 그런 존재를 상징하는 프레이즈를 들으며 작품의 주제를 파악하는 것은 분명 농도가 다르다. 벽장 속에 있는 여성의 사진을 보는 것과 리얼리티와 판타지, 안과 밖, 자아와 분신, 어머니와 아이를 잇는 제3의 공간을 음악적 단편으로 구성해 콜라주처럼 붙인 음악작품을 듣는 것도 마찬가지다. 음악의 특성상, 이 주제들은 미술에서 음악으로 옮겨오며 구체성을 잃는다. 미술에서 여성의 신체를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것과 다를 수밖에 없다.

 

물론 이 공연과 이 전시가 여성주의라는 주제의식을 반드시 똑같이 공유할 필요는 없다. 작곡가들의 해석이라는 존재는 일종의 완충재같은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화음프로젝트가 미술에서 영감을 받아 음악을 만드는 프로젝트이지, 미술을 음악으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네 개의 음악작품에서 여성주의를 완전히 무시하기도 어렵다. 작곡가들의 인상과 이미지 속에 여성은 확실히 존재했다. 그러나 구현된 음악을 듣고 감상자들이 그 주제들을 한 번에 곧바로 알아차리는 데는 다소 어려움이 있었던 것 같다. 이는 음악의 본질적인 문제다. 음악이 과연 텍스트 없이 완전히 음악만으로 여성주의를 노래할 수 있을까? 아니면 베토벤 9번 교향곡이 사실은 어떤 강간의 이야기였다고 말하는 수잔 맥클러리(Susan Mcclary)의 과격한 해석처럼, 사실 여성주의는 이미 수많은 음악에 내재해있는데 우리가 알아차리지 못할 뿐인가? 음악은 여성주의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가? 심지어 해석이 아니라 창작의 영역에서 말이다.

 

그래서 네 명의 음악가들은 자신들의 인상을 음악으로 풀어내거나, 여성주의의 주제에 맞춰 악기들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설정하거나, 새로운 텍스트(안상미의 작품에 쓰인 박노해의 시 <목화는 두 번 꽃이 핀다>)를 도입하거나, 작품 안의 특정 요소나 기법을 추출하여 작품의 근간으로 삼았다. 여성의 신체로 존재하는 미술작품들의 구체적인 영역에서 한 층 뛰어넘어 추상의 영역으로 간다. 작곡가들이 선택한 방법은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러나 도약은 분명히 있다. 여성주의의 색이 흐려졌고 이미지와 인상들이 상징적으로 구성된다. 신체는 사라지고 은유가 남는다.

 

미술작품이 눈앞에 존재하고 이 작품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작곡한다고 했을 때 만들어질 음악이 미술을 얼마나 닮게 할 것인지, 주제의식을 어디까지 공유해야 할지 등 미술과 음악의 거리를 설정하는 문제는 결코 쉽지 않을 듯하다. 게다가 뚜렷한 창작의 원천이 실물로 존재하기 때문인지 미술작품을 앞에 둔 음악가들의 태도는 다소 조심스러워 보이기도 했다. 섣불리 그 작품의 핵심을 관통하거나 닮음을 목적으로 하는 것도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오해의 소지도 많기 때문이다. 미술은 재미있는 선물 같기도 하겠지만, 장애물이 될 것 같기도 하다.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부터 창작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작품으로부터 시작하니까.

 

그렇다면 화음에서 음악과 미술은 서로 닮은 가족 같은 관계인가, 한 주제에 대한 상호보완적인 관계인가, 원인과 결과 같은 관계인가. 물론 관계의 성질에 주목하는 것은 두 작품의 관계성이 뚜렷하게 드러난 후이다. 관계의 성질은 개별 사례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사례들과 관계없이 확신할 수 있는 것 하나는, 화음프로젝트가 다른 영역의 두 작품을 연결하는 프로젝트인 만큼 작품들의 밀접한 만남이 이뤄지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다.

 

 

 

질문 3. 이미 완성된 음악에 미술이라는 개념은 얼마나 필요할까?

 

Day 8 올림푸스홀

음색, 색깔을 듣다

2015년 11월 26일 목요일

 

사뭇 직접적이다. ‘음색, 색깔을 듣다’. 이 공연의 목적은 ‘작곡가가 주제를 선정해 주제에 맞는 음악을 작곡, 다양한 음색의 오케스트레이션을 표현한 화음 프로젝트 창작 초연곡으로 꾸며진다. 시각장애인을 위해 기획된 본 음악회는 시각장애우를 초청하여 그들이 눈으로 볼 수 없는 미술작품을 음악을 통해 전달하고자 한다. 일반인도 안대를 착용하여 같은 느낌을 느낄 수 있도록 한다.’ 였다. 공연장에서 오직 청각에만 의지해 음악을 듣는다니, 막연히 꿈꿔오던 것 중 하나였다. 그런데 ‘미술작품을 음악을 통해 전달한다’는 것은 과연 구현이 가능한 것인지 궁금했다. 미술을 음악으로 번역이라도 하는 걸까, 아니면 보통의 화음프로젝트 작품들이 그러하듯 미술로부터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음악을 들려주는 걸까. 그런데 나는 귀로 미술을 듣지 못한다. 음악을 듣는다. 미술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어진 음악은 그냥 만들어진 음악과 다를까. 어떻게 하면 귀로 미술을 느낄 수 있을까.

 

반면 공연 당일 배부된 점자가 함께 인쇄된 프로그램 노트의 내용은 조금 달랐다. 제목은 ‘듣는 그림, 음색’으로 바뀌었고 점자로 인쇄된 이 공연만의 프로그램 노트에는 듣는 그림 음색이라는 제목이 적혀있다. 음고, 음량, 음가와 더불어 음악의 한 요소인 줄 알았던 음색이 사실은 들을 수 있는 색깔이거나 그림이라는 접근. 조금 수정된 공연의 목적 혹은 기획의도가 이어진다. ‘음악은 소리로 만든 구조입니다. 그 구조가 무엇을 설명하고 그 소리가 무엇을 상징하는지.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음악이 연주되는 순간 어떻게 공간이 변해가고 마음이 움직이는지 경험해보고자 합니다’. 미술작품을 음악을 통해 전달한다는 목적은 사라진 듯했다. 남은 테마는 우리가 음악에서 들을 수 있는 미술이라는, 음색.

 

목적대로, 음색이 정말 빛이 나는 두 작품이었다. 연주된 곡은 배동진의 화음프로젝트 Op.155 <Theme and (situational) Variation - I see you with my ears>와 임지선의 화음프로젝트 Op.156 <Theme and Variations on Giants of Solsona>였다. 배동진은 쇼팽의 프렐류드 Op.28의 E단조곡을 주제로 네 가지 음색적 연출을 시도했다. 임지선은 카탈루냐 지방의 민속 음악인 ‘솔소나의 거인들’을 시대별 클래식 음악 양식 변화에 맞추어 변주곡으로 작곡했다. 두 작품 모두 주제와 변주 형식이었다. 따라서 주제와 다르게 변화되는 것들이 눈에 띄었고, 제목만큼 돋보였던 것이 음색이었다. 음색을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 두 작곡가는 같은 재료를 다양한 조합으로 만들어냈다. 한정된 악기 수 안에서 다양한 조합으로 작은 앙상블들을 만들고 동일한 테마를 여러 방법으로 변주시켰다. 두 곡 모두 연주자들이 객석에서 무대로 이동하며 연주하거나 2층에서 연주하는 등 공간-음향적 차원까지 포함된 음색의 변화가 있었다.

 

특별히 음색이라는 변수가 더 돋보였던 작품은 배동진의 곡이었다. 이 곡은 마치 음색에 대한 실험과정인 것 같기도 했다. 짧은 쇼팽의 프렐류드를 부수고 그 파편들을 여러 방법으로 재구성하는데, 그 파편들이 부서져서 힘을 잃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작고 생명력이 있는 음형이 되어 독자적으로 커져 나가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같은 모티브가 계속 반복되며 차이를 만드는데, 마치 팔레트에서 원색들이 각각 다른 조합으로 섞여서 새로운 색을 만들어내는 듯했다.

 

임지선의 곡에서는 형식이 더 눈에 띄었다. <Theme and Variations on Giants of Solsona>는 동시대의 눈으로 아주 오래된 음악부터 지금까지 서양음악이 걸어온 길을 한 곡 안에서 축약해서 보여준다. 모노포니로부터 시작해서 폴리포니와 호모포니로, 때로는 헤테로포니로, 유니슨으로. 형식의 변화도 함께한다. 푸가로, 춤곡으로. 어법 역시 현대로 빠르게 달려온다. 중세부터 르네상스, 바로크, 고전, 낭만을 지나 현대까지. 음악사의 첫 페이지에 등장하는 음악들부터 현재까지를 한 곡으로 잇는다. 음악사 전체를 관망하는 대담한, 동시대가 아니면 할 수 없던 작업을 한다. 시대를 흐르는 음악. 음색보다 더 흥미로운 차원은 구성과 형식의 문제였다. 음색의 변화는 그 구성과 형식의 변화에 수반된다.

 

굉장히 매력적인 작품들이었다. 흥미로운 요소들도 차고 넘쳤다. 객석의 반응도 좋았다. 첫 기획의 출발점은 시각장애인들이 볼 수 없는 미술작품을 음악으로 표현해서 들려주자는 것이었지만, 트럼펫에 악보를 끼고 돌아다니는 연주자, 무대 뒤편에서 앞으로 걸어 나오는 연주자들 등, 2층에 있는 연주자 찾기 등, 사실 보는 재미까지 있었다. 음색이라는 테마도 훌륭히 구현되었던 것 같다. 그런데 그림은 어디에 있나? 색은 역시 음색이 음악의 구성요소인 것과 마찬가지로 그림의 구성요소이다. 색 자체는 그림이 아니다. 나는 배동진과 임지선의 매력적인 두 음악작품을 들었지, 그림을 들은 것 같지는 않다.

 

미술 혹은 그림이라는 개념은 이 공연에서 어떻게 기능하는가? 내 눈에는 음악이 음악만의 힘으로 모든 것을 해낸 것 같다. 어떤 음악의 출발점이 미술이었다 하더라도 공연장에서라면 이 음악들은 완전한 음악으로 받아들여진다. 미술이라는 말이 없어진다면 우리는 그 음악에서 미술을 알아차릴 수 없다. 미술에서 출발했더라도 결국 음악의 영역으로 포섭된다. 의심의 여지 없이, 실제로 존재하는 미술작품과 만난 음악이 갤러리에서 연주되는 경우 음악과 미술은 묘한 지점에서 만난다. 흥미로운 만남이다. 그러나 음색이라는 변수는 분명 흥미롭지만, 미술이나 그림 자체와 연결되기에는 어려워보인다. 음색을 만들어내는 것은 정말로 색(color)이 아니라, 음고와 음가, 음량 등 음의 다른 변수들이다.

 

미술을 어떻게 들을 것인가. 음악을 어떻게 그릴 것인가. 화음畫音이라는 단체의 이름에서 알 수 있듯, 화음은 늘 음악과 미술 사이에서 서로를 듣고 그려내는 방법에 대해 고민할 것이다. 이미 무려 157곡이 작곡되었다. 오랫동안 계속되어 온 화음프로젝트만으로 화음은 음악과 미술이 서로 오갈 수 있는 다리를 놓아준 것 같다. 만남 그 이후는 뭘까. 둘의 만남을 더 좋게 만들 수 있을 만남의 장소와 방법, 내용을 엄밀하게 꾸리는 것이지 않을까.

 

 

신예슬 arp273@naver.com

2014년 화음프로젝트 평론상, 2013년 제 15회 객석예술평론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