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음쳄버오케스트라의 새로운 미션
글|송주호(음악칼럼니스트)
매력, 소유욕을 자극하는 작용
남녀가 서로에 매력을 느끼게 되는 데에는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서로 다르다는 것이 가장 주요한 요인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매력이란 일종의 소유욕을 불러일으키는 작용이기에, 내가 갖고 있지 않은 것을 갖고 있는 사람에게 호기심을 갖고 가까이 다가가게 마련이니 말이다. 물론 정말로 소유(?)하게 되기까지에는 험난한 과정이 앞에 놓여있다.
남녀관계 뿐만 아니라 일상에서 마주하게 되는 대상들에게도 마찬가지 과정이 반복된다. 쇼핑을 할 때, 식당에서 메뉴를 고를 때, 업무상 거래처를 선택할 때 등. 언제나 자신의 부족함을 채워주는 대상에 대해 매력을 경험한다. 이러한 상황들은 대상들이 다양한 특징 혹은 개성을 갖고 있다는 사실과 함께, 그 중에서 자신에게 가장 이득이 되는 것(들)을 선택하게 되는 시장원리가 내포되어있다.
문화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다. 교통이 빨라지고 미디어가 발전하면서 다양한 문화를 접하게 된 사람들은 자신이 속한 문화와 다른 문화에 강한 매력을 느끼는 것은 당연했다. 심지어 그 나라에 가서 직접 살 정도로 그 매력에 푹 빠진 사람들도 있었다. 작곡가 콜린 맥피나 화가 폴 고갱 등이 바로 그 예이다.
시장원리 측면에서 보자면, 보다 자주 노출되고 대량으로 공급되는 문화가 더욱 많이 선택되었다. 당연한 결과였다. 오랫동안 실크로드를 통해 유럽에 공급되었던 중국 문화나 일찍부터 개항하여 교류가 잦았던 일본 문화, 그리고 동양과 서양을 잇는 바닷길에서 빠질 수 없는 동남아시아 문화는 비교적 잘 구분되어 소비되었다.
이에 비하면 한국 문화는 미지의 영역이었다. 약 100년 전 프랑스의 한 만평 등에 그려진 한국의 모습은 기모노를 입은 여인이었다. 심지어 한국문화는 중국으로부터 전해 받은 것이라는 식민적 사고를 갖고 있는 사람도 있다. 저 멀리 아요디아(인도)에서 온 가락국 김수로왕의 부인 허황옥이 기함을 할 노릇이다.
물론 한국과 중국은 많은 교류가 있었고, 일본의 궁중 문화는 한반도에 존재했던 여러 나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이들의 문화에는 현지에서 토착되면서 차이를 보이게 되고, 이러한 차이는 음악에서도 분명히 나타난다. 이러한 점을 간파한 음악가들은 한국음악에 큰 매력을 느꼈다. 이미 익숙하게 된 중국음악과 구별되고 일본음악의 원류가 되는 한국음악은 극동아시아 문화의 미싱 체인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뒤늦게 발견된 한국음악의 이러한 매력은 여러 작곡가들에게 이목을 끌었다.
소유에서 융합으로
지난 2015년 9월 18일 예술의전당 IBK챔버홀에서 있었던 화음쳄버오케스트라의 ‘조선통신사’ 음악회는 이 매력을 느꼈던 여러 작곡가들의 작품들로 채워졌다. 독일의 클라우스 후버와 미국의 루 해리슨, 앨런 호바네스가 그 주인공으로, 본 연주회에서는 이 세 명의 작곡가들이 한국음악을 바라본 서로 다른 관점을 명확히 보여주었다. 후버의 첼로 독주와 북을 위한 <무딘 필봉 II>는 판소리 혹은 산조를 연상케 했다. 특히 북의 리듬은 추임새를 넣은 고수의 제스처를 보여주었고, 첼로는 판소리나 산조의 또 다른 해석이었다. 외국사람이 한국어 대화를 들으면 ‘다’만 들린다고 하는데, 한국음악에 대한 유사한 필터링의 결과로 볼 수도 있다. 두 연주자는 한국인일 뿐만 아니라 특히 북 연주자는 국악을 공부한 연주자이기에 이 곡에 담겨있는 한국음악의 특징을 작곡가의 의도 이상으로 효과적으로 부각시킬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반면 루 해리슨은 한국음악을 그대로 보여주고 싶어 했다. 이 음악회에서 연주되었던 <5종 대위법으로 편곡된 타령>이나 <무궁화 새당악> 등은 서양적인 방법으로 덧댔을 뿐이다. 함께 연주되었던 <전주곡>은 한국음악의 음정과 제스처를 재현한 것으로, <새로운 송가>와 <메시앙을 추모하며>에서 그대로 사용되기도 했다. 이 연주회에서는 작곡가의 의도에 따라 국악기로 연주되었는데, 서양인 관객이었다면 매우 이국적이고 흥미롭게 보였겠지만, 한국인들에게는 오히려 익숙하게 들리게 되어, 음악 안에 담겨져 있는 서양적인 관점에서 한국음악의 수용을 경험하는 데에는 다소 방해가 되었다. 서양음악 콘서트에서 국악을 들었다는 정도를 넘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점은 아쉽다.
호바네스는 여러 동양음악의 공통적 요소에 접근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미 일본음악과 아르메니아 음악을 잘 알고 있었으며 자신의 작품에도 적극 활용했던 그는, 한국음악과 이들의 공통적인 요소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래서 그의 작품에 숨어있는 한국음악적 요소는 분석을 통해 보다 명확히 끄집어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화음쳄버오케스트라는 그의 작품 <진동 회화>에서 연주를 통해 한국음악적 요소를 청각적으로 들리게 하는 마력을 선보였다. 그의 많은 작품에 깔려있는 일본과 아르메니아의 이국적 요소는 어느 정도 걷어지고 담백한 요소들이 남았는데, 그럼으로써 한국음악의 요소를 두드러지게 했다. 한국인이 연주했기 때문에 나타난 결과일 수도 있다.
이러한 작품들은 문화의 융합을 유도한다. 상대방을 소유하는 철 지난 제국주의적 접근방식이 아닌, 서로 흡수하여 하나가 되는 결과물을 얻는다. 이러한 융합은 모두가 같아지는 일률적 몰개성이 아닌, 새로운 개성의 탄생과 문화의 다양상 확대로 이어져야 한다. 앞에서의 작품들이 이를 충분히 보여주고 있지만, 후반부 임지선의 신작 <흩어진 기억과의 만남>은 이를 더욱 확언해주었다. 옛 조선통신사의 행차를 서양음악의 기법으로 표현한 이 음악에는 그 자체로 다양한 아이덴티티가 융합되었다.
새로운 미션
화음쳄버오케스트라는 이미 한국 작곡가들을 통해 문화의 융합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지금까지는 한국인의 서양문화 수용의 측면에서 접근했다면, 이번 연주는 서양인의 한국문화 수용을 보여주었다는 데에 큰 의미가 있다. 한국음악, 더 나아가 한국문화에 매력을 느끼고 작업하는 작가들이 아직 많은 편은 아니지만, 이러한 분야를 고루 발굴하는 것이 화음쳄버오케스트라의 새로운 미션이 아닐까 싶다. 한국문화를 전파하는 우리시대의 신조선통신사의 역할을 기대하며, 이를 위한 아낌없는 지원이 뒷받침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