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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제39회 정기연주회] 닐센 · 시벨리우스 · 드보르작 · 김성기 · 쇼스타코비치의 시대
이민희 / 2015-08-03 / HIT : 1426
닐센 · 시벨리우스 · 드보르작 · 김성기 · 쇼스타코비치의 시대

 

2015년 7월 9일 화음 챔버오케스트라 제39회 정기연주회 공연 평론

 

이 민 희

 

 

 

고전 음악과 ‘동시대’의 거리는 어느 정도일까? 고전 음악은 우리 사회와 어떤 방식으로 접속하고 있을까? 모든 고전 음악 연주자는 자신이 연주하는 음악과 청중과의 거리에 촉각을 곤두세운다. 과거에 작곡된 곡들은 동시대의 청중과는 감정적으로 괴리된 경우가 많고, 동시대 작곡가의 곡은 불친절하다. 화음 챔버 오케스트라가 행하는 ‘쇼스타코비치 챔버 심포니 전곡 연주 시리즈’는 어떤가? 이들은 ‘음악과 사회’라는 부제를 달고 음악과 사회의 접속을 독특한 층위에서 논한다. 대한민국 청중들에게 정치 격변기를 겪었던 쇼스타코비치의 음악과 삶은, 즉각적으로 ‘음악의 사회성’을 환기시키는 강렬한 메타포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음악이 청중을 설득하는 행위다. 음악과 사회, 음악과 청중의 줄다리기는 늘 ‘음악 그 자체’의 힘에서 시작한다. 음악의 사회적 기능, 정치적 목적, 혹은 그 내부의 다양한 함의는 그 음악이 청중의 귀에서 작동한 이후에만 유효하다.

 

 

1. 세기말 반음계와 21세기

 
 

‘음악 특유의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이가 있다면, 이날 연주됐던 닐센(C. Nielsen)의 <젊은 예술가의 관 앞에서>(At the Bier of a Young Artist, Suite for String Orchestra), 시벨리우스(J. Sibelius)의 <현악 오케스트라를 위한 즉흥곡>(Impromptu for String Orchestra Op.5, No.5&6), 드보르작(A. Dvorak)의 <현악 오케스트라를 위한 슬라브 무곡>(Slavonic Dances No.16 for String Orchestra Op. 72/8 arr. By Michinori Bunya)을 들려주고 싶다. 이들 작곡가들은 후기 낭만주의의 원숙한 음악 어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이를 도구 삼아 감정적 효과의 최대치를 능수능란하게 구사할 수 있었다. 이날 이들의 음악 안에는 수평으로 쭉 뻗은 선율들이 미세하게 그 간격을 줄이고 늘이며 ‘음악적 아름다움’을 강한 어조로 웅변했다.

 

특히 드보르작의 <현악 오케스트라를 위한 슬라브 무곡>에서는 감정의 응축 그리고 그 감정의 밀고 당김이 노골적으로 표현되었다. 원곡을 현악 버전으로 바꾸어서인지 감정적 흐름이 음악 표면에서 거칠게 움직이는 느낌이었다. 바이올린 파트는 더 많은 비브라토를 하고, 더 느려지고, 더 격양되어 있었다. 물기를 머금은 봄 철 나무줄기를 쭉 찢었을 때 드러나는 섬유 층처럼, 바이올린 파트에서는 여러 연주자가 함께 만드는 소리의 ‘결’이 느껴졌다. 악보에는 단 한 개의 선율만 기보되어 있었겠지만, 소리로는 마치 색이 겹치듯 개별 연주자의 제스처가 미묘하게 뭉쳐 있었다.

 

‘모든’ 연주자들은 자신만만한 팔놀림으로, 작곡가가 그린 프레이징을 완전히 이해한다는 듯 어깨를 움직였다. ‘모든’ 연주자들은 화음이나 선율의 흐름 속 정확히 어느 지점에 청중의 감정이 동요되는지 너무도 잘 아는 것처럼 보였다. 작곡가 개인이 다수의 연주자에게, 그리고 다수의 연주자는 홀을 가득 채운 더 많은 수의 청중에게 세기말 반음계의 매력을 전달했다.

 

 

2. 김성기와 김환기

 
 

 

보통 미술작품과 연관된 음악 작품은 그 미술작품의 기하학적 표면이나 외형을 재현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김성기가 김환기의 그림에 영감을 받아 만든 곡 <화음 프로젝트 Op.120 김환기의 작품 속에>는 사뭇 달랐다. 작곡가 김성기는 그림 ‘표면’에 드러나 있지 않은 그 그림의 ‘내면’으로 파고들어갔다.

 

김성기의 <화음 프로젝트 Op.120 김환기의 작품 속에>는 화가의 ‘그림 창작 과정’을 다룬 독특한 관점의 곡이다. 7악장으로 이루어진 음악 안에는 한 명의 화가가 그림 그리기에 착수하고, 자신의 작업에 대해 사랑과 대립의 감정을 느끼며, 자신이 그리는 그림을 관찰하기도 하고, 결국은 강렬한 힘에 이끌려 창작물을 토해내는 과정을 보여준다. 심지어 곡 안에는 화가가 그려낸 그림이 어떤 성격인지 짐작할 수 있는 단서가 군데군데 등장한다. 김성기의 음악 안에서 묘사되는 ‘김환기의 그림’은 ‘강하고 단호하며’, ‘한국적인 느낌을 주는 무엇’으로 표현된다. 그래서 누구나 이 음악을 들으면 김환기의 밋밋한 그림을 더 골똘히 들여다보게 된다. 거북이 등껍질처럼 생긴 저 그림 내면에 끓어오르는 뭔가가 숨겨져 있는 것일까? 저 기하학적 점 무늬 이면에 ‘한국적인 것’이 잠재할까? 무제나 마찬가지인 <27 - I - 70 #142>(1970)라는 불친절한 제목에는 어떤 뜻이 더 있는 것일까?

 

점으로 빼곡하게 채워진 이 그림은 화가가 1970년 즈음 작업했던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연작 중 하나다. 화가는 고국을 떠나 뉴욕에서 이 그림을 그렸다. 그는 고국에 대한 그리움, 삶, 죽음을 고민했고 그림에 한 점, 한 점을 찍으며 생명력, 고국 산천, 영원성, 우주, 그리움 등 수많은 것을 성찰했다. “...서울을 생각하며 오만가지 생각하며 찍어 가는 점. 어쩌면 내 맘속을 잘 말해 주는 것일까 그렇다. 내 점의 세계...” (1970.1.8. 김환기) 결국 김환기 점묘화의 본질은 ‘화가가 점을 찍는 것’, 즉 이 그림을 그리는 ‘행위’에 집중되어 있다. 김성기가 작곡한 <화음 프로젝트 Op.120 김환기의 작품 속에>가 화가가 그림을 그리는 여정을 다룬 것도 그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김환기 화가는 젊은 시절에 ‘한국적인 요소’를 화폭에 담았지만 나이가 들며 ‘한국적인 요소’는 눈에 띄게 줄어든다. 그의 1970년 작품 <27 - I - 70 #142>에서도 ‘한국적인 것’은 흔적으로만 어렴풋 느껴진다. 그림을 자세히 살펴보면 각각의 점들이 번져있다. 마치 수묵화 기법을 투사한 것 같은 모양이다. 한편 김성기의 음악에는 국악적인 느낌을 자아내는 음계나 선법이 사용됐으며 리듬적인 측면에서도 국악의 장단이 느껴진다. 그러나 김성기의 ‘한국적인 요소’들도 음악의 표면에 있지 않다. 김성기는 그 작곡어법의 근저에 ‘한국적인 것’을 용해시켰고, ‘한국적인 것’은 그의 음악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 나온다.

 

흥미로운 것은 김성기가 구사하는 대위법적 짜임새다. 화가 김환기는 자신의 작품을 ‘추상화’로 전환할 무렵 고민에 빠져 있었다. “...선인가? 점인가? 선보다는 점이 개성적인 것 같다...”(1968. 1. 2 김환기) 화가는 추상을 구성하는 ‘선’과 ‘점’을 놓고 고민했고, 결국 ‘점’을 주요어법으로 선택해 후기 작업을 이어갔다. 그런데 작곡가 김성기는 ‘점’으로 구성된 작품을 표현하기위해 ‘선’적인 짜임새를 전면에 드러냈다. 김성기의 방식은 선들을 얽고 이것을 흐르게 만들어 촘촘하게 엉킨 ‘면’을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음악이 흐르고 진행하면서, 불현듯 이 ‘면’ 안에서 생동하는 점들이 돋아난다. 음악에서는 점이 선으로, 선이 다시 점으로 전이된다.

 

 

3. 쇼스타코비치

 
 

2부에서 연주된 쇼스타코비치(Shostakovich)의 <실내교향곡 D장조>(Chamber Symphony in D Major Op. 83, Quartet No.4 배동진 편곡)는 이날 연주된 곡들 중 단연 돋보였다. 이 곡은 자극적이고 강렬했으며 화려했다. 특히 첫 악장의 시작부분은 현악 4중주가 ‘실내 오케스트라’로 편곡되었을 때 표현 가능한 가장 인상적인 도입부처럼 보였다. 곡은 긴 페달음 위에 두 가닥의 서로 다른 선율을 등장시키며 시작됐다. 음악이 진행될수록 두 가닥의 선율은 점점 고음으로 치닫고 그 움직임도 격렬해졌다. 고정된 페달음과 계속해서 뻗어나가는 두 개의 선율 사이에 긴장감이 계속되면서 음악은 점점 크게, 점점 넓게 확장됐다. 실내 오케스트라라는 편성은 이 확장을 극대화했다.

 

손톱처럼 작은 공간에서 시작한 음들이 어느새 한 아름이 되었고 곧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벌어졌다. 현악 4중주 연주에서는 잠자코 상상해야 하는 그 넓은 공간감이, 실내 오케스트라의 풍성한 연주로 눈앞에 생생하게 재현됐다. 2악장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서는 원곡의 음역을 뛰어넘어 고음에서 울리는 현악기의 하모닉스가 등장했다. 하모닉스는 단순히 음색적 발전이나 음역의 확대를 뛰어넘어 쇼스타코비치 선율의 매끈함과 수려함을 극도의 아름다움으로 승화시켰다.

 

또한 이날 연주된 배동진의 편곡에서는 실타래처럼 끝없이 흘러나오는 바이올린의 긴 선율들이 각기 한 소절씩 분리되어 오보에, 플룻, 클라리넷 등에 배정된 부분이 많았다. 음색이 바뀌는 것은 물론 그 선율의 느낌과 성격이 급격히 변했다. 강렬한 비브라토로 날카롭게 울리던 바이올린 대신 평화롭고 다소 초연한 느낌을 주는 목관악기로 인상이 바뀌는가 하면, 어떤 부분에서는 여러 가지 음색으로 선율이 재현됨으로써 ‘클라이맥스’로 나아가는 진행을 더 강렬히 표현하기도 했다. 원곡에서 사뭇 가느다랗게 흔들리며 홀로 움직이던 바이올린 선율들은, 편곡을 통해 확실한 제스처를 갖는 과감한 움직임으로 강조됐다. 음색이 추가되고 음 폭의 고저가 더해졌으며 감정의 골이 노골적으로 깊어졌다.

 

3악장과 4악장의 처리도 흥미로웠다. 원곡에서 3악장에서 4악장으로의 진행은 다소 복잡하고 어렵게 느껴진다. 그러나 편곡된 버전은 굉장히 대중적으로 다가왔다. 곡의 흐름이 다채롭게 채색되었고 선율이나 음향의 변화가 강화되어 곡의 흐름을 인지하기 쉬워졌기 때문이다. 지적이고 내면적인 인상을 주던 원곡이, 화려하고 지루하지 않은 새로운 분위기로 변모한 느낌이었다.

 

 

* * *

 
 

초반에 연주된 닐센의 <어느 젊은 예술가의 관 앞에서>와 시벨리우스의 <현악 오케스트라를 위한 즉흥곡>은 ‘추모곡’ 성격이 강했고, 마지막 곡이었던 <실내교향곡 D장조>에는 쇼스타코비치 특유의 애수가 깃들어 있었다. 그런가하면 김성기의 <화음 프로젝트 Op.120 김환기의 작품 속에>는 화가와 그림에 대한 복합적인 심상이 묻어 있는 곡이었다. 그러나 이날 연주된 모든 음악들은 그 사회적 · 작곡적 함의를 논하기 이전에, 모두 화려했고 자극적이었다. 모든 곡에는 청중의 귀에 즉각적으로 강렬한 ‘쾌감’을 안겨주는 화성과 선율이 가득했다.

 

따라서 어떤 측면으로는 이날 연주야말로 ‘음악과 사회’ 그리고 ‘강준일 작곡가’와 ‘배익환 바이올리니스트’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는 여지를 남긴 시간이었다. 음악회가 음악으로 청중을 설득했고, 이 음악들을 동시대의 현실에 접속시켰기 때문이다. 연주 내내 닐센, 시벨리우스, 드보르작, 김성기,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은 청중을 뒤흔드는 ‘유효하고 강력한’ 매개였다. 이 음악이 청중에게 강력하게 호소했기에, 청중들은 이 음악의 ‘힘’에 대해, 이 음악이 ‘추모하는 것’에 대해 분명히 각인했을 터였다. 2015년 7월 초 대한민국의 작은 홀에서, 닐센 · 시벨리우스 · 드보르작 · 김성기 ·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이 시대를 초월해 능숙하게 청중을 요리하고 있었다. 잠시였지만 분명 그 시간만큼은 닐센 · 시벨리우스 · 드보르작 · 김성기 · 쇼스타코비치의 시대였다.

 

 

 

 

 

 

 

 

이민희 李旼姬 음악학 전공 박사과정.

2011년 제1회 화음프로젝트 평론상, 2012년 제5회 인천문화재단 플랫폼 음악비평상 수상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