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도와 가능성’
한겨울, 현대음악 연주회가 세상과 맺는 관계
이민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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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들어 가장 추운 날이었다. 서울은 12월 초순으로는 27년 만의 최저기온을 기록했다. 을씨년스러운 오후였다. 선릉 뒤편 적막한 건물 지하 홀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현대음악 연주회를 보기 위해서다. 화음 쳄버오케스트라가 창작곡을 위촉하기 시작하고 꼭 114번째 신곡이 발표되는 날이었다. 스크린을 통해 동화작가 숀 탠(Shaun Tan)의 그림책 <도착(The Arrival)>이 등장했다. 홀 안을 가득 채운 어쿠스틱 음향은 2차원의 이미지를 공기 속으로 녹여냈다. ‘그림책 음악회’라 이름 붙여진 오케스트라의 첫 ‘멀티미디어’ 위촉곡, 임지선 작곡가의 ‘삶의 영원한 노래(Perpetual Song of life)’가 관객을 만나는 순간이었다. 2012년, 현대음악 연주회가 세상과 맺을 수 있는 가장 매력적인 관계는 무엇일까? 이날 음악회는 ‘시도와 가능성’이라는 키워드를 통해 현대음악창작과 사회를 연결하고 있었다.
시도
이전까지 화음 쳄버오케스트라는 ‘미술작품’에서 감명을 받은 음악작품을 위촉했다. 작곡가는 그림을 보고 영감을 받아 곡을 쓰고, 보통 그 미술작품이 전시된 갤러리에서 작품을 초연했다. 이 과정에서 ‘미술작품’은 작곡가, 연주자, 관객 사이를 연결하는 일종의 해석 틀이 되었다. 관객들은 작품노트에 첨부된 미술작품의 ‘이미지’와 직접 갤러리에 걸린 ‘그림’을 통해 작곡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짐작하곤 했다. 한글로 쓰인 작품노트가 1차적으로 ‘언어’를 통해 작곡가와의 소통을 꾀했다면, 이미지는 2차적인 안내를 제공했다. 작곡가는 그림과 곡의 구조를 연관시키고, 그림과 연관된 감정을 끌어내고, 때로는 그림과 작품 간의 대응관계를 만들었다. 그리고 이런 작곡가들의 아이디어는 ‘미술작품’을 통해 관객과 연주자들에게 고스란히 공유되었다.
화음 쳄버오케스트라는 여기에서 한발 더 나아간다. 2012년 12월 9일 열린 공연에서는 멀티미디어 형식의 작품이 처음으로 선을 보였다. 곡이 연주되는 동안 스크린 속에서는 그림책이 한 장씩 넘어갔다. 이제 이미지는 음악이 공연되는 ‘시간’ 위에 놓이게 된 것이다.
하지만 새로운 시도는 이전까지의 창작곡 위촉보다 훨씬 더 까다로운 측면을 가진다. 작곡가들은 ‘음향’을 뛰어넘어 ‘멀티미디어 환경’ 안에서의 작곡을 계획해야 한다. 즉 음악적 시간을 작곡함은 물론이며, 이미지와 공간을 동시에 주관하는 연출자가 되어야 한다. 또한, 영상음악과의 비교도 피할 수 없다. 하지만 일반적인 영상음악이 보통 영상을 우위에 두고 진행된다는 점에 비해, 이들의 작업은 좀 더 시청각이 대등한 관계를 갖는 공동작업이 되거나 음악이 우위에 놓인 실험적인 작업이 될 가능성이 높다.
관객이 연주회장에서 경험하는 것도 이전까지의 음악회와는 사뭇 다르다. 관객들은 곡이 연주되는 동안, ‘시간에 따른’ 이미지들, 즉 강제적인 시각적 상들을 주입 당한다. 원하지 않아도 그림 속 소년이 덮은 이불의 격자무늬를 보아야 한다. 동시에 관객들은 이 음향들을 자연스럽게 패턴으로 인식하며, 이를 시각화하고 애써 이미지와의 공통점을 찾게 된다.
이와 같은 일련의 과정에서, 작품이 연주되는 장소는 보다 전면에 등장한다. 이전의 갤러리는 미술작품과 음악을 한 자리에 두는 ‘장소’에 가까웠다. 하지만 이제 관객들은 ‘눈’을 크게 뜨고 공연을 본다. 이제 갤러리의 조명과 색조, 관객석에서 보이는 그림들의 위치나 움직이는 이미지들의 시간적 배치는 음향과 유기적으로 맞물린다.
가능성
그렇다면 새로운 멀티미디어적 시도는 늘 난해하기만 한 것일까? 다양한 고민들을 뒤로 하고, 이날 새롭게 시도된 프로젝트 ‘그림책 음악회’는 ‘가능성’이란 화두를 껴안는다. 가장 주목할 만한 발견은 현대음악으로 구현하는 대중적인 ‘표제음악’ 음악회의 가능성, 그리고 미술계와의 협업의 가능성이다.
임지선 작곡가의 ‘삶의 영원한 노래(Perpetual Song of life)’는 숀 텐의 그림책과 함께 제시되었다. 한 장의 그림책 이미지가 넘겨질 때마다 음악적 섹션의 교체가 일어났다. 그림책의 이미지들이 음향의 ‘표제’ 역할을 한 것이다. 이를 통해 관객들은 장시간 연주에 집중할 수 있었고, ‘불협화음’의 연속 안에서 소외되지 않았다. 마치 조성음악 속 ‘형식’이 청취자들에게 받아들여지는 음향을 분류하고, 음향의 차이와 반복을 인식하게 하는 것처럼, 그림책 내부의 ‘이미지’들은 불협화음들을 재단하고 정렬했다. 그러는 가운데, ‘현악기가 연주하는 하모닉스 덩어리’와 ‘불규칙하게 강세가 있는 강한 셈여림의 합주’들은 분명하게 다른 음향으로 인식되었다. 각각의 음향들에 하나의 표제들이 따라붙은 것이다.
또한, 몇몇 음향들은 사회적으로 약속된 음향적 상징들을 충분하게 살린 채 등장했다. 작곡가는 그림책 속의 ‘공장의 생산라인’ 장면에서 타악기의 금속성 소리와 현악기의 특수주법을, 그리고 ‘집을 떠나는 장면’에서 걸음걸이 속도의 연타음을 등장시켰다. 불협화음과 협화음의 물리적 차이는 가족의 따뜻함을 표현하는 데 사용되었으며, ‘톱니바퀴처럼 돌아가는 세상에서 현기증’이라는 장면에서는 돌고 도는 음조직을 이용해 음향의 패턴과 시각적 패턴을 일치시켰다. 이미지와 음향 그리고 텍스트 간의 분명한 연관성을 만들어주는 음향상징들은, 그림책이라는 표제와 함께 관객이 음향을 스스로 해석할 수 있게 만들었다. 결과적으로 그림책 음악회라는 융복합 형식은 그 안에 ‘대중성’을 품게 되는 것이다.
또 한 가지 고무적인 점은, 이날 음악회를 통해 ‘미술계’와 ‘음악계’의 공동작업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예측해 볼 수 있었다는 점이다. 본격적인 멀티미디어 작품 혹은 융복합 작품은 두 장르 이상 예술가들의 협업을 필수로 한다. 이는 작곡과정에서 뿐만 아니라 작품의 감상과 유통, 관객의 성격에 이르는 다양한 층위에서의 변화를 수반한다. 동시에 작곡가들은 자신의 음악에 동반되는 ‘음악외적인 요소’에 대해 본격적인 고민을 시작해야 한다. 이와 같은 시도는 낯설지만 도전해볼만하다.
나가기
2012년 한국의 현대음악계는 겨울이다. 그 안은 늘 춥다. 그러나 겨울이 언제까지나 계속되지는 않을 것이다. 화음 쳄버오케스트라는 한 겨울에 더운 김이 나는 음악회를 연다. ‘미술’이라는 영역을 들고 와 갤러리로 무대를 확장하고, 작곡가와 청중 그리고 연주자 사이를 연결하는 해석 도구를 제공한다. 더 나아가 이미지를 동반한 ‘표제음악’ 연주회의 가능성, 그리고 궁극적으로 이를 통한 창작곡의 저변 확대를 기대한다. 이들이 시도하는 갖가지 발걸음들은 경직된 현대음악계를 조금씩 녹인다. 어딘가에서 검은 벽과 마주하고 있을 젊은 작곡가들이 이 화음 프로젝트에 동참할 꿈을 꾸길 바란다. 이들의 행보가 계속되는 어느 날, 이 흐름은 뉴 웨이브(New Wave)로 명명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李旼姬.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전문사 음악학과 수료. milk1t@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