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음프로젝트 Op. 100: 완성, 그리고 또 하나의 시작
글|송주호
요즈음에 음악을 즐기는 사람들을 만나면 다양한 모습을 보게 된다. 바로크 이전 고음악의 단아함과 그 자유분방함을 즐기는 사람과 고전의 형식미에서 완성미를 느끼는 사람,
그리고 낭만의 짙은 감수성에 감동을 받는 사람, 그리고 새로움을 찾는 현대의 개척정신에 갈채를 보내는 사람 등. 그래서 각자의 취향에 맞는 음악회를 찾아다니면서 헤어나기 어려운 편식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화음챔버오케스트라는 언제나 고루 갖춘 잡곡밥과 같은 프로그램으로 모든 사람에게 기대와 만족을 주는 연주회를 마련하고 있다. 게다가 ‘화음프로젝트’를 통해 한국 작곡가들에게 꾸준히 작품을 위촉하는 작업으로 그 가치를 더한다. 화음프로젝트 100번째를 맞는 이 뜻 깊은 연주회에서도 이러한 기대에 부응했다. 바로크 음악의 정점인 바흐와 낭만의 감수성으로 현대의 아픔을 노래한 쇼스타코비치, 그리고 한국의 작곡가 임지선의 신작까지. 탄탄한 프로그램은 언제나 완성도 높은 연주회의 밑바탕이 된다.
연주회가 시작되기 전, 좌석에 앉아서 무대를 응시했다. 조금 의아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바흐의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3번>을 연주하기 위한 무대 세팅임에도 하프시코드가 없고 마림바가 놓여 있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마림바는 다음 곡을 위한 세팅이라는 것을 곧 알게 되었지만, 하프시코드가 없는 바흐를 듣는다는 것은 사실 매우 어색한 일이다. 하지만 그것은 하프시코드를 상상했기 때문에 만들어진 우려일 뿐이었다. 이 곡은 현악만으로도 충분한 하모니를 이루고 있는데다, 현대악기가 풍부한 음량을 만들면서 오히려 하프시코드의 이질적인 음색이 만들어내는 치장이 걷혀진, 바흐가 생각했던 순수한 화음들을 듣게 된 것이다. 시대적인 배경을 떠나 음악이 갖고 있는 율동과 다이나믹이 더해져 새로운 빛깔의 생명력을 느꼈다. 하지만 2악장은 어찌할 것인가? 단 한 마디에 그려진 두 개의 코드. 일반적으로 하프시코드의 즉흥연주로 채워지는 이 악장을 현악만으로 연주한다면 매우 당혹스러울 것 같다. 혹시 간혹 경우를 보게 되는 바이올린 즉흥연주가 연주될까? 짧은 순간이지만 많은 생각들이 스쳐지나갔다. 이러한 추측과 기대는 이 곡에서만 즐길 수 있는 묘미이다. 결과는 바흐의 <음악의 헌정>. 전혀 예측할 수 없었던 결과였다. 이 곡이 삽입된 이유에 대해서는 프로그램 노트에서 찾지 못했지만, 통치자에게 바치는 곡이라는 공통점이 이 곡을 선정한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또 하나의 ‘즉흥연주’에 나를 포함하여 객석에 앉아있는 관객들에게는 충격적인 경험이었음이 틀림없다.
이어지는 작품은 임지선의 새로운 더블베이스 협주곡 <뜻밖의 기쁨>이었다. 꼭 1년 전인 2010년 9월 화음챔버의 연주회에서 연주되었던 임지선의 <그림자의 그림자>(2008)에 대한 프로그램 노트를 썼던 나로서는, 임지선의 새로운 작품을 듣게 되었다는 것이 매우 반가웠다. 서로 다른 것들의 화합과 공존, 그리고 만남과 조화를 그렸던, 그리고 자신의 내면에 자리한 어두움을 노래했던 작곡가. 하지만 이제 그녀의 키워드는 ‘기쁨’이 되었다. ‘뜻밖의 기쁨’이라는 제목은 여러 가지를 함축하고 있는 것 같다. 우선 작곡가의 해설대로 무대의 구석에서 존재감이 없었던 더블베이스를 무대 가운데 둠으로써 얻게 된 ‘뜻밖의’ 기쁨이겠고, 또 하나는 100번째 화음프로젝트를 맞은 것에 대한 기쁨일 수도 있다. 내가 파악하지 못한 또 다른 의미도 있을 수 있겠지만, 이 곡에서도 나는 독주악기와 오케스트라로부터 대립과 공존, 그리고 독주 더블베이스와 오케스트라의 더블베이스로부터의 만남과 화합의 코드를 들을 수 있었다. 미치노리 분야를 위해 이미 더블베이스ㄹ르 위해 여러 곡을 작곡했던 임지선의 음표는 그에게 매우 익숙해 보였다. 60세라는 것이 믿겨지지 않는 분야의 열정적인 모습도 이렇게 작곡가와 연주자의 충분한 이해에서 가능했을 것이다. 관악기들이 그들의 독특한 음색을 자신 있게 발휘하지 못했다는 것은 한 가지 아쉬움으로 남는다.
화음챔버오케스트라는 앞으로 이어갈 쇼스타코비치의 실내교향곡 시리즈의 시작으로 ‘작품 110a’를 선정했다. 바르샤이가 <현악사중주 8번>을 현악앙상블로 편곡한 이 곡은 쇼스타코비치의 실내교향곡 중 가장 자주 연주되는 곡이다. 매우 극적이면서 풍부한 감수성을 가지고 있으며, 다양한 악상으로 변화무쌍한 특징이 이 곡의 매력일 것이다. 하지만 뛰어난 실력을 지닌 네 명을 위한 곡을 여러 명이 동시에 연주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빠른 패시지 부분에서 조금씩 어긋나는 것이 눈에 띄기도 했다. 그러나 이 문제가 감상에 방해를 줄 정도는 아니었다.
이 곡에서 중요한 것은 쇼스타코비치는 이 곡을 작곡할 때 자살 충동을 느낄 정도로 큰 슬픔에 잠겨있었고, 이 곡은 그 상태를 반영한다는 것이다. 그 슬픔을 화음챔버의 연주에서 느낄 수 있을까? 사실 쇼스타코비치와 같이 삶 자체가 공포인 현실을 겪지 못한 세대가 그것을 끌어내고자 한다는 것 자체가 모순일 것이다. 우리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언어로 그의 삶을 기리는 것이다. 화음챔버는 그들의 목소리로 이를 담아냈다. 특히 느린 악장에서 느낀 전율은 두고두고 기억될 것이 틀림없다. 이 곡은 빠른 악장의 격동으로 유명해졌고, 나 또한 그 선율들을 기억하고 있었지만, 화음챔버의 연주에서는 전에 알지 못했던 느린 악장이 갖고 있는 처절함과 정화의 신비를 맛보았다. 관객의 끊임없는 박수는 바로 이 순간에 대한 답가였음이 분명하다.
이제 ‘작품 100’을 치른 화음챔버는 또 하나의 새로운 첫 발을 내딛었다. 그것은 쇼스타코비치로부터였고, 또한 바흐로부터였으며, 그리고 또 하나의 신작으로부터였다. 고전을 지키면서 새로운 것에 관심을 놓지 않기에, 화음챔버오케스트라는 언제나 기대의 중심에 있으며, 그리고 그 자체로 역사가 되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