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logue I: 날의 벽] ≪백년 여행기≫와 음악회
이경분 / 2023-11-20 / HIT : 372
≪백년 여행기≫와 음악회
이경분(음악학자)
Monologue I: 날의 벽
에르완 리샤(비올라), 클라리넷(조성호), 이헬렌(첼로), 배기태(더블베이스)
2023년 10월 4일(화), 11일(화) 오후 7시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떠나는 사람들
요즘 매일 뉴스에서 본다. 가자지구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이스라엘의 공습을 피해 떠나야 하는 상황을. 몇 년전만해도 기아와 내전으로 시리아에서, 아프리카에서 물밀듯 유럽쪽으로 난민들이 밀려오는 것이 세계적 이슈가 되었지만, 지금은 잘 보도되지 않는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자기 고향과 나라를 떠나서 언어도 물도 낯선 곳으로 떠나야하는 절박한 이유는 생명보존을 위함이리라. 전쟁이 아니더라도 나치제국의 유대인 박해처럼 이념이나 정치적 원인도 사람들의 망명을 부추겼다. 그래도 이런 이유보다 떠남의 가장 ‘대중적인’ 이유는 배고픔일 것이다. 가뭄으로 인한 흉년이나 홍수와 같은 자연재해로 생존의 위협을 받으면, 누구나 살길을 찾아서 오랜 삶의 터전을 뒤로 하고 먼 길을 떠나게 된다.
20세기 초 한반도의 배고픈 조선인들은 제물포에서 생전 듣지도 보지도 못한 곳, 하와이, 멕시코로 떠났다. 이후 천여명의 조선인들이 악명높은 멕시코 유카탄반도의 에네켄 농장에서 긴 노동시간에도 저임금을 받으며 노예 생활을 했던 슬픈 이야기가 전해진다. 하지만, 21세기 현재 잘살게 된 한국은 이제 배고픈 외국인들을 받는 위치로 변했다. MMCA현대차 시리즈의 2023년 작품으로 선정되어 국립현대미술관에 전시된 정연두 작가의 ≪백년 여행기≫는 한국 디아스포라의 바뀐 상황을 돌아보게 한다.
≪백년 여행기≫ 전시실 앞 넓은 공간에는 바나나, 초록 이파리, 빨간 과일 등을 연상하게 하는 오브제 속 스피커에서 속삭이는 소리가 나온다. 뱃고동 소리 같기도 하고 오르간 소리 같기도 한 전자음을 배경으로 들려오는 속삭임은 귀를 기울여도 알아듣기 힘들다. 내가 모르는 한국 이주 외국인들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본 전시회에 들어가기 전, 마주하는 이 <상상곡>은 한인의 역사적 디아스포라를 돌아보는 것에 멈추지 않고, 현재 한국으로 유입되는 디아스포라도 잊지 않는 작가의 균형 잡힌 시각이 드러나는 공간이다.
심포니적 차원
정연두 작가의 작품은 기발한 아이디어에서 탄생한 것들이 많다. 피사체의 꿈을 실현하는 사진을 찍은 <내 사랑 지니>나 앞집 윗집 소품만 다를 뿐, 세트장에서 사는 듯한 아파트 32가구의 가족사진 <에버 그린 타워>, ‘시각장애인’ 마사지사가 찍은 사진들을 피아니스트 오조네 마고토(小曽根真)의 음악 ‘와일드 구스 체이스Wilde Goose chase’의 리듬에 따라 춤추게 만든 영상 <와일드 구스 체이스>, 1990년대 디오라마 장인이 만들었던 조선총독부와 광화문 일대의 모형 세트를 ‘재활용’하여 박태원의 소설 『구보씨의 일일』(1934)을 초현실적이면서도 역사적으로 재현한 <구보씨의 일일>, 대만의 가오슝, 오키나와의 기노완, 광주, 홍콩이라는 학살과 억압의 장소가 ‘청춘 따윈 없다’는 메시지를 통해 4성부처럼 연결되면서 화음을 이루는 <소음 사중주> 등, 독특하고 흥미로운 작품들을 일일이 나열하기 힘들 정도다.
특히 2023년도 작품 ≪백년 여행기≫는 정연두 작가가 어떻게 예술과 역사와 사회를 엮어내는지 이전과는 다른 차원으로 드러낸다. 이전의 작품들이 ‘실내악 차원’이었다면, ≪백년 여행기≫는 ‘심포니 차원’인 듯 우뚝 솟아나 있다. 내게는 ≪백년 여행기≫가 서곡과 4악장으로 구성된 심포니로 느껴졌다. <상상곡>이 서곡, 여러 가지 모티브를 모아놓은 <프롤로그>가 1악장, 한인 이주민 세대의 슬로우모션 2채널 영상 <세대초상>이 느린 2악장, 세 가지 음악스타일로 압도하는 클라이맥스 3악장 <백년 여행기>, 설탕으로 만든 <날의 벽>은 사색적인 피날레 4악장.
≪백년 여행기≫ 속 <백년 여행기>
정연두 작가의 작품이 가진 특징을 한마디로 요약하라면 나는 단연코 뛰어난 ‘음악성’이라고 말할 것이다. 음악을 잘 활용하는 것을 넘어서서 음악성이 정연두 작품의 미학으로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영상이 음악의 리듬에 맞추어 흐르게 하는 시도는 <와일드 구즈 체이스>에서도 흥미롭지만, ≪백년 여행기≫에서는 더욱 세련되고 자연스럽다. 전시회의 클라이막스에 해당하는 3악장 <백년 여행기>로 들어오면, 멕시코를 연상하는 선인장의 조형물과 함께 3채널 영상이 LED 대형스크린을 중심으로 배열되어 있다. 이 대형스크린은 관객이 누워서 관람할 수 있도록 굽어보는 듯, 30도 기운 상태로 비스듬하게 설치되어 있다.
대형스크린 아래 작은 3채널 영상은 마치 오페라 무대의 등장인물처럼 판소리꾼, 분라쿠악사, 마리아치 밴드가 자기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 한인 이주민의 서사 <백년 여행기>는 일종의 ‘영상’ 오페라처럼 전개된다. 주인공은 아기를 꼭 낳고자 한 한인 이주민 2세 마리아. 한인 아버지와 마야족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활달한 마리아가 어른이 되어 결혼 7번째 만에 드디어 아기를 얻는 파란만장한 인생 스토리이다. 결국 마리아는 또 7번째 이혼하지만, 마지막 꽃을 피우기 위해 살아가는 후회 없는 인생이라고 자부한다. 하지만 이 평범하고 간단한 내용을 전달하는 방식은 아주 예술적이고 독창적이다. 나는 내러티브와 세 스타일의 음악이 어떤 식으로 연결되었는지 궁금하여 한 번 더 전시회장을 찾아갔다. 첫 번째 갔을 때는 편안하게 드러누워서 관람하다가 중간에 잠이 들었기 때문이다.
먼저 간단하게 보이는 것은 멕시코의 전통적인 마리아치 밴드의 역할이다. 밴드가 연주하며 부르는 노래는 멕시코 유카탄 출신 음악가 리카르도 팔메린(Ricardo Pamelin)의 곡 <페레그리나>(Peregrina) 선율에 황보영주 독립운동가의 서정적인 시 <나의 길>을 붙인 것이다.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노래하는 이 곡은 오페라의 ‘아리아’ 같은 역할을 한다. 선율과 화성이 귀에 익숙한 서양 대중음악이라 쉽게 이해된다.
반면, 판소리와 기다유 분라쿠는 간단하지 않다. 처음에 기다유 분라쿠 음악이 120여년 전 멕시코로 이주한 천여명의 배고픈 한인 이주 역사를 일본어 내러티브로 시작하면, 판소리음악이 마리아의 인생 스토리를 한국어로 드라마틱하게 이어가다가, 나중에는 역할을 바꾸기도 하고 서로 교대하기도 한다. 자세히 들어보니 일본 기다유 분라쿠 음악의 비중이 판소리 음악에 못지않다. 한인의 멕시코 이주 역사는 일본인과 떼어놓을 수 없기 때문일까? 만주나 연해주 이민과 달리 태평양 쪽 한인 이민은 일본 이주민과 결혼하는 등 얽히는 경우가 많았다.
미대륙 한인 이민이 일본 이주민과 얽혀있듯이 <백년 여행기>도 귀에 익숙한 판소리와 낯선 기다유 분라쿠가 다양하게 얽혀서 불가분의 흥미로운 스타일을 만들어낸다. 판소리와 기다유 음악은 공연을 준비하듯 새로 만든 작품인데, 2023년 10월 18일 따로 라이브 공연될 수 있을 정도로 완성도가 높다. 연출을 작가가 직접 맡아서 했다니 음악가들과의 작업만 해도 어마어마한 시간과 에너지가 필요했을 것이다. <백년 여행기>는 독창성도 독창성이지만, 작업량에서도 쉽게 모방하기 힘든 작품이다.
<날의 벽> 앞의 사색
오페라를 본 듯한 충만함으로 도달한 마지막 피날레는 서늘하고 차분한 <날의 벽>이다. 액자에 들어있는 조형물은 달달한 설탕으로 만든 칼과 농기구(마체테)인데 멀리서 보면 상형문자처럼 신비함과 조화로움을 느끼게 한다. 그래서인지 12미터 높이를 15단으로 차곡차곡 채운 설탕 농기구의 벽 앞에서 저절로 생각에 잠기게 된다.
매일 수 천개의 에네켄을 잘라야 했던 노동자의 고된 도구가 현실과는 다른 달콤한 설탕으로 형상화되었다. 달콤함은 원래 에네켄을 잘라 얻는 최종 이득, 즉 목표가 아니었던가? 그러나 <날의 벽>은 달콤함을 도구로, 원래 고단함의 도구였던 농기구는 목표로 바꾸었다. 무거운 고난의 역사가 달고나처럼 가벼워지고 재미있는 일이 되었다. 작가는 자신의 일을 욕망과 스트레스와 경쟁이 아니라, 달고나를 만들 듯, 재미의 차원에서 한 듯하다.
‘달고나’를 떠올리니 드라마 <오징어 게임>이 생각난다. <오징어 게임>에서는 달고나에 새겨진 모양을 부러뜨리지 않고 바늘로 분리해내야 하는 일이 재미가 아니라, 치열한 생존게임의 극한 스트레스이다. 다른 사람이 망하고 죽어야 내가 이기고 살 수 있는 자본주의 세계에서 달고나는 치명적인 유혹이다. 그리고 나의 사색은 이어갔다.
<오징어 게임>이 달고나를 생존게임의 한 예로 이용했다면, <날의 벽>은 달콤한 도구를 통해 한인 이민사의 고달픔을 과거에서 벗어나 21세기의 관점으로 승화한다. 현재 배고픈 외국인을 받아들이는 이민국이 된 한국의 바뀐 위상. 외국인노동자에게 백년 전 한인이 당한 착취와 스트레스와 고달픔이 반복되지 않기를. 노동이 자아실현의 재미있는 행위가 되는 예술가의 이상적 노동관으로까지 사색은 옮아갔다.
이재구의 <생동하는 분자들의 외침>을 연주하고 있는 비올리스트 에르완 리샤
화음 연주회: 음악적 사색
관람자를 사색으로 이끄는 전시회 피날레 <날의 벽> 앞에서 2023년 10월 4일 저녁, 네 곡의 기악음악이 연주되었다. 이재구의 <생동하는 분자들의 외침>, 장석진의 <설탕으로 만든 칼>, 김성기의 <애니깽 노예들을 기억하며>, 임지선의 <디아스포라>가 초연되었다. 모두 솔로 악기를 위한 작품인데, 비올라는 에르완 리샤, 클라리넷 조성호, 첼로 이헬렌, 콘트라 베이스는 배기태가 연주했다. 모두 쟁쟁한 연주자들이다.
연주회는 <날의 벽>을 사색하는 또다른 방법이었다. 원래 가사의 끈으로 묶지 않은 기악음악은 언어적 차원을 넘어서는 추상의 세계이다. 작곡가가 제목에서 또는 작곡 노트에서 디아스포라와 백여년 전의 한인 이민에 대해 느낀 것을 표현했다고 해도, 작곡가의 의도와 무관한 곳으로 달아날 큰 문이 항상 열려있다. 또한 작곡가의 사색은 다시 연주자의 사색을 통해 청중에게 전달되므로, 추상성의 작은 문이 하나 더 열려있는 셈이다. 임지선의 콘트라베이스 음악 <디아스포라>처럼 제1차 대전 때 러시아군으로 참전하여 포로가 된 한인 병사의 노래 <만났도다>의 선율을 차용하면, 청중의 상상은 작품의 의도와 만난 확률이 ‘조금’ 높아진다.
하지만, ≪백년 여행기≫라는 테두리는 추상적인 네 작품이 연관성의 끈을 가질 수 있는 맥락이 된다. 백년의 여행 끝에 도달한 <날의 벽> 공간이 주는 분위기와 어울리게 네 작품은 모두 사색적인 제스처를 가진다. 이재구의 <생동하는 분자들의 외침>은 서정적인 선율로 시작하다가 2부에서는 살아서 용틀임하듯 격렬한 음향으로 이국에서 뿌리를 내리고 사회적 존재로서 살아가는 역동적인 한인 이민자를 상상하게 한다. 하지만, 마지막 부분에서는 다시 회고적 선율로 돌아와서 고향을 그리워하듯 맴돌다가 가벼워지면서 끝난다. 회고적 분위기는 <생동하는 분자들의 외침>보다 장석진의 클라리넷을 위한 <설탕으로 만든 칼>에서 더욱 뚜렷하다. 서정적이고 느린 선율로 시작한 이 곡은 2부에서 고통을 표현하듯 파편화된 음들과 신음하듯 쉼이 잦아지다가 마지막에는 느리고 슬픈 처음의 선율로 되돌아가면서 여운을 남긴다.
반면 김성기의 첼로를 위한 <애니깽 노예들을 기억하며>는 다른 작품들에 비해 뭔가 이야기를 하려는 내러티브의 제스처가 훨씬 강하다. 제목에서 힌트를 얻으면, 애니깽 노예들의 이야기일 것이다. 이야기는 고조되어 2/3지점에 절정에 다다르고, 이후 휘파람 소리같은 사운드는 상념에 잠기듯 아치형의 하강 곡선을 그린다. 마지막에 다다른 음악은 완전히 꺼지기 전 불꽃처럼 순간 피어오르다가 침묵 속으로 침잠한다.
김성기 작품의 제목이 멕시코 한인 이민을 주제로 했음을 암시한다면, 앞에서 언급한 임지선의 <디아스포라>는 연해주 러시아 한인 병사의 노래 <만났도다>의 선율(g-b-a-b-g-a-b-e-g)을 인용함으로써 멕시코 이민사를 넘어 19세기 만주와 연해주의 한인 디아스포라로 관심을 확대한다. <만났도다>는 안중근의사가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만나 저격한 사건을 배경으로 한 노래이다. 음악은 항일 독립운동을 지원한 한인 이주민을 상기시키며, 여기저기로 흩어진 한인 디아스포라의 장소는 달라도 톱을 갈 듯 격렬한 ‘고통’과 하모니카를 부르듯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어디든 같을 것이라고 암시하는 듯하다.
<날의 벽> 앞에서 연주된 네 악기의 음악은 각각 다양한 음색과 다양한 밀도로 사색하였다.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공통점은 추상성 밑에 자리 잡고 있는 회고적 제스처와 그리움의 톤이다. 즉, 회고와 그리움의 색을 가진 추상화이다. 멕시코 한인 이민사를 생생하게 전달하기 위해 ≪백년 여행기≫가 ‘음악적’이 되고자 했던 반면, <날의 벽> 앞의 추상적 음악은 흥미롭게도 ‘회화적’이다. 음악은 ‘시각적’인 <날의 벽>에 ‘청각적 사색’의 풍부함을 주었고, 동시에 ≪백년 여행기≫가 만들어 놓은 ‘맥락’ 위에서 회고와 그리움의 색을 담을 수 있었다. [畵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