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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제 32회 정기연주회 평론
왕치선 / 2009-02-10 / HIT : 1015

제 32회 화음 정기 공연 (2009년 2월 10일 : 20시 예술의 전당)

I. Prologue
1월 17일: 공연후기는 늘 시간에 쫒기면서 쓰게 된다. 그래서 한번쯤은 시간에 쫓겨서 쓴 사건의 기록이거나, 공연의 감상이 아닌, 시간이 지난 후 내게 남은 공연의 기억을 쓰고 싶다는 바람을 가지곤 했다. 그리고 화음의 배려로 바라던 기회가 주어졌다. 
2월 9일: 리허설을 참관하러 연습장소로 향했다. 단체에서 준비해준 악보를 보며 리허설을 지켜볼 수 있었지만 부분 부분의 표현방법을 연습하는지라 각 작품에 대한 전체지도를 가지기는 어려웠다. 
2월 10일 :나는 이미 화음의 공연을 수차례 본 적이 있다. 그리고 단체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어느 정도 있다. 이 점이 도움을 될지 아니면 편견으로 작용할지 모르지만 적어도 오늘공연은 곡과 연주.. 그 자체만으로 이해해 보고자 프로그램 노트를 보지 않기로 했다. 

II. 공연의 기억
5월 10일: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 내게 남은 그날의 기억을 끄집어내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빛”이었다. 얼키설키 얽혀진 무대 위 조형물의 안쪽에서 밖으로 비쳐지는 빛, 그가 지닌 침침한 색.. 그로부터 투영되는 우울함, 그리고 마치 그들 속에서 나오는 듯한 소리들.... 임지선의 작품은 군데군데 뭉쳐있는 음들의 집합들과 성근 조직들이 조형물의 그것과 많이 닮아 있었다. 바이올린들은 차갑고 명료한 아우라를 만들어냈고 첼로는 이에 부피를 더해주었다. 리듬들은 일정높이를 유지하는 소리의 군상들과 얼키설키 엮여가면서 현악 오케스트라 전체가 하나의 공간을 확보해 가고 있는 듯했다. 소리를 만들어내는 재료들은 단순했지만 이들을 가지고 다양한 조합을 통해 만들어내는 다양한 음색은 인상적이었다.

하이든 교향곡은 1악장에서는 각 악기간 균형이 잘 맞은편이었고 2악장에서는 각 성부별로 주고받는 canon 방식이 명료하게 전달이 되었다. 3악장에서는 서정적인 선율과 약음기를 통해 만들어진 소리들이 내게 많은 얘기를 하는 듯했는데 가끔 목관악기의 집중력이 흐트러져 곡의 매끄러운 흐름을 방해하는 점은 아쉬웠다. 그러나 임지선의 작품과는 성격에서 큰 차이가 있어서 같은 프로그램에 편성하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연주된 월튼의 현악 소나타는 선율이 매우 아름다웠지만 곡 자체의 구성이 산만한 면이 있었다. 연주에서도 오랜 연습을 통해 농익은 조화를 보여주지 못했고 부분 부분의 선율과 음향이 아름다웠지만 적절한 변화가 적어서 곡이 진행할수록 지루하게 느꼈었다.

III. 존재의 의미와 방식
“왜 연주를 하는가”와 “연주를 통해 추구하는 것이 무엇인가”는 음악회를 볼 때마다 내가 던지고 싶은 질문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한 철학자의 말이 아니더라도 그들은 연주함으로써 존재의 가치를 확인하는 것은 사실이나 나의 이러한 의문은 연주를 해야만 한다는 의무에 대한 회의와 매너리즘을 극복하는 것 또한 그들의 과제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질문에 화음은 단순히 기존에 존재하는 작품을 연주하는데서 나아가 공연의 전 과정을 주체적으로 형성하고, 스스로 공연을 창작하고 있다고 답한다. 이들은 이러한 창작 과정을 연주를 통하여 끊임없이 실행하고, 스스로 진화하고, 성장하려 하는 것이다.

내가 가진 화음이라는 연주단체에 대한 인상은 “차분하다”는 것 이었다. 이는 이들 중 어는 누구도 강력한 리더의 역할을 전담하지 않는 현재의 구조와도 연관 있어 보인다. 이들의 형성과정에 대해서 ”화음은 음악인 1인과 그와 마음을 함께 한 음악인 몇이 함께 참가하면서 오랜 시간에 걸쳐 그 면모를 갖추었고 리더 그룹 시스템과 조직 안정에 10여년의 시간이 걸린, 함께 만들고 새로운 방법을 모색하여 진화해 왔다.“ 한다. 
이러한 그들의 형성과정과 존재방식은 작품 선정에 있어서도 그대로 반영되어 motive를 선택하고, 이를 조각가에게 위촉한 후, 다시 이를 작곡가에게 의뢰하여 작품 간, 장르 간 결합과 소통을 끌어내고 있다. 

IV. 감상과 인식
화음은 기악 작품만을 연주하도록 구성되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기악 작품을 듣는다고 할 때는 음악을 어떤 기능이나 목적 없이도 청취하게 한다는 것과 가사나 표제 같은 언어적 요소가 배제된 작품들의 가치도 인정한다는 의미가 포함되어있다. 이러한 두 가지 측면은 음악을 위한 음악, 즉 음악의 절대성과 연관된다. 
이러한 음악의 절대성을 강조하는 음악 미학적 논리는 예술작품의 효과, 즐거움, 효용성, 감동은 부차적인 것이며, 예술은 그자체로서 존재한다고 한다. 또 아름다움이라는 예술의 특성은 사회적 기능에서 독립된 어떤 질적인 것이라는 주장을 내세우며 아름다움은 즐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인식하기 위한 것이라 한다. 
이러한 논리에 의하면 화음은 그들의 출발부터 예술의 순수한 가치와 절대성을 추구하여야 하는 필연적 과제를 부여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의 연주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도 이를 감안하여야 할 것이다.

V: Epilogue
5월 18일: 서랍 속에 넣어 두었던 프로그램 노트를 꺼내 보았다. 하이든의 교향곡 44번 e 단조는 하이든이 자신의 장례식에 써 달라고 했을 정도로 아름다운 아다지오를 가지고 있고 “슬픔”이라는 부제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 다소 어울리지 않는 곡들을 프로그램 한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다음으로 연주된 임지선의 작품“Impossible possibility"는 “무한한 아픔 뒤에 나타나는 아름다움: 현재의 어려움이 훗날의 아름다움으로 나타날 것이라는 주제로 철판에 무수히 상처를 내고 그 사이로 빛을 투과시켜 상처 속에서 아름다움을 표현한” 조각품에 영감을 받아 작곡되었고 불가능해 보이는 현재를 이겨내고 견딘다면 결국 아름다운 자신의 모습을 발할 수 있을 것이라는 얘기를 담고 있다” 했다.
그들이 말하려하는 바는 아픔이었고 이를 견뎌 아름다음으로 승화하는 의미를 표현, 상징 하는 작품이었다. 그래서 아름다우면서도 슬프고, 처연하면서도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던 것일까? 그날 화음의 음악회는 아름다움은 즐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인식하는 것이라던 “예술을 위한 예술”의 가치를 그들의 방법대로 실현해낸 공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