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음챔버오케스트라 제41회 정기연주회 비평>
석양의 빛: 사라지는 것을 살리기
화음챔버오케스트라는 고유의 화음프로젝트를 비롯해 남다른 비전과 정체성으로 지난 26년간 많은 성과를 보이며 큰 성장을 이루었다. 국내의 수많은 실내악 팀들이 야심찬 포부를 가지고 당차게 출발하지만 몇 개의 주목할 만한 연주를 끝으로 사라지는 팀들이 대부분이다. 또한 비교적 오랜 역사를 가졌지만 새로운 도전과 변화없이 간신히 명맥만 유지하고 있는 팀들도 적지 않다. 그러나 자신만의 노래와 그 노래를 불러야 하는 이유가 있다면 쉽게 사라질 수 없다. 2018년 11월 17일 예술의 전당 IBK챔버홀에서 열린 화음챔버오케스트라 제41회 정기연주회는 화음의 4반세기 시간이 상징적으로 담긴 연주회였다.
빛나는 청춘과 타는 그리움, 멘델스존과 박영희
안일한 기대에 허를 찌르는 선곡이었다. 멘델스존 바이올린 협주곡 하면 대부분 의심의 여지없이 떠올리는 <바이올린 협주곡 E단조>가 아니었다. <바이올린 협주곡 D단조>는 신동 멘델스존이 12살에 작곡한 작품으로, 20세기 중반까지 완전히 묻혀 있다가 많은 우여곡절 끝에 1952년에 출판됐다. 세상에 빛을 본지 얼마 안 되는 신선한 협주곡이다. 작품은 눈부신 천재성과 청신한 기운이 넘쳤다. 협연은 화음챔버오케스트라 단원인 바이올리니스트 이지영이 맡았는데 오케스트라와 협연자 간의 친밀한 호흡이 돋보였다. 음들이 햇살 가득한 온실 속에서 잘 가꾸어진 꽃들처럼 피어났다. 거친 비바람과 구름 없이 오직 생기와 빛으로만 채워진 한낮의 노래였다. 어느 한 부분 모난 곳 없이 모범적이며 성실한 연주는 한편으로는 작품을 바라보는 제한된 시선을 반영했다. 깊은 통찰력과 개성이 드러날 때 비로소 상식적인 기대를 유쾌하게 뒤집을 수 있는 음악적 경험을 선사할 것이다.
박영희의 <석양의 빛>은 끝없는 속울음이었다. 그는 고요와 고독 속에서만 보고 들을 수 있는 세밀한 음악적 풍경을 펼쳐보였다. 생텍쥐베리의 소설 <어린 왕자>에는 이런 장면이 나온다. 어린 왕자는 몇 발자국만 옮기면 언제든지 해 지는 풍경을 볼 수 있는 아주 작은 별에서 살고 있었다.
“언젠가는 해 지는 걸 마흔 네 번이나 봤어.” 조금 후에 어린 왕자는 다시 말했다. “그거 알아? 아주 슬퍼지면 해 지는 것이 보고 싶거든......”
“해가 지는 걸 마흔 네 번 본 날, 그럼 너는 그만큼 슬펐단 말이야?”
그러나 어린 왕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거대한 둥글고 붉은 해가 지평선 또는 수평선으로 넘어갈 때”를 묘사한 <석양의 빛>은 저무는 해와 함께 뜨거운 눈물을 삼키는 이들을 위한 어른의 위로였다. 그는 설득도 강요도 하지 않고 그가 응시하는 빛을 음악으로 비춰준다. 현악 5중주를 위한 작품을 현악 합주를 위해 개작해 무수한 음들의 떨림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전율을 만들었다. 붉은 해가 지평선과 수평선에 맞닿은 순간부터 사라지는 순간까지의 묘사는 강렬했으며, 빛과 어둠이 끊임없이 중첩되고 교차하면서 통합되는 풍경은 감동적이었다.
이날 음악회장을 감싼 <석양의 빛>은 신비하면서도 구체적이었고, 상상이 아닌 체험의 세계로 이끌었다. 해가 경계선 너머로 사라진 후에도 출렁이는 파동과 애틋한 여운은 좀처럼 멈추지 않았다. 연주가 끝난 후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에야 객석에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잠들 수 없는 밤, 하차투리안과 쇼스타코비치
전쟁 중에도 사랑은 춤춘다. 전쟁과 관련된 아람 하차투리안의 대표적인 발레곡에서 발췌한 작품은 널리 알려진 선율로 감상의 즐거움을 더했다. 쇼스타코비치·프로코피예프와 함께 구소련의 대표적인 음악가로 활동했던 하차투리안의 음악에는 그의 고향인 아르메니아 민속 춤곡의 맥박이 강하게 뛰고 있다. 하차투리안은 구소련에서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라는 문화정책 속에서 음악으로 밝고 행복한 분위기를 연출하는데 누구보다도 적극적이었다, 이것은 또한 그가 지향하는 민중을 위한 음악관과 세계관과도 맞아떨어졌다.
동시대에 살면서 전혀 다른 노선을 걸어간 쇼스타코비치는 하차투리안에 대해서 “그의 개성은 음악 기법을 넘어선 것이다. 그것은 우리 삶의 리얼리티에 대한 낙관주의적인, 삶을 긍정하는 작곡가의 인생관에서 비롯된 것이다.”라고 말했다. 전쟁을 소재로 한 <스파르타쿠스> 중 ‘아다지오’는 스파르타쿠스와 그의 아내 프리기아가 깊은 밤에 함께 추는 사랑의 파 드 뒤(2인무)이며, 전쟁 중에 작곡되어 큰 인기를 얻은 <가야네> 중 ‘칼의 춤’은 용맹한 전사의 춤에서 유래된 것이다. 2부 러시아 작곡가들의 작품에서는 관악기와 타악기가 더해져 극적 효과를 극대화했다. 하차투리안 작품의 편곡은 작곡가 안성민이 맡았다. 화음챔버오케스트라는 풍부하고 현란하면서도 원시적인 생명력을 가진 이 작품들을 신명나게 연주했다. ‘아다지오’는 벅차게 일렁이는 색채들로, ‘칼의 춤’은 정열적으로 들썩이는 리듬으로 객석을 사로잡았다.
마지막 연주곡은 쇼스타코비치 <실내교향곡 10번 A♭장조, Op.118>이었다. 작곡가 신혁진이 쇼스타코비치의 <현악4중주 제10번>을 챔버오케스트라를 위한 작품으로 편곡했다. 모호하고 단편적인 선율로 시작하는 1악장 연주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흥미로운 광경이 목격됐다. 객석의 많은 이들이 프로그램 책자의 작품 해설을 들춰보기 시작한 것이다. 막연한 감상에서 벗어나 감상을 최대한 의미 있는 경험으로 만들고자 하는 청중들의 적극적인 욕구를 읽을 수 있었다. 날카롭고 격렬한 스케르초인 2악장은 역동적인 에너지로 즉각적 인식과 몰입을 가능하게 했다. 특히 타악기의 연속적인 폭격은 대규모 교향곡을 연상시키는 음향 효과를 만들었다.
아다지오 3악장은 반복적인 베이스 위에서 변주가 이루어지는 파사칼리아 형식의 애가로, 고통이 반복되는 상황에서 느껴지는 비극적 정서를 관악기 선율로 효과적으로 표현했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이 악장은 그로테스크한 춤곡풍의 마지막 악장과 곧바로 이어지면서 저항의 몸부림을 보여주었다. 전 악장에 걸쳐 체념과 의지가 끈질기게 엎치락뒤치락 했다. 화음챔버오케스트라는 이 작품을 지배하는 좀처럼 해소되지 않는 긴장과 불안을 오히려 연주의 동력으로 삼아 밀도 있게 전개해갔다.
“순순히 어두운 밤을 받아들이지 마오.”
불꽃처럼 살다 간 영국의 시인 딜런 토마스는 이렇게 노래했다.
“순순히 어두운 밤을 받아들이지 마오.
날이 저물수록 격하게 타올라야 하기 때문이니,
분노하고, 또 분노하시오. 빛이 죽어가는 것에 대해.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어둠의 순리를 깨닫는다 하지만
그 같은 언어로는 빛을 담아낼 수 없기에
저항 없이 순순히 어둠 속으로 들어가지 마오.
지는 해에 사로잡혀 노래했던 격정적인 이들은
지는 해에 슬퍼했음을 뒤늦게 깨닫게 되니,
순순히 어두운 밤을 받아들이지 마오.
(딜런 토마스, “순순히 어두운 밤을 받아들이지 마오.” 중)
화음챔버오케스트라의 역사가 응축돼 있었던 이날 연주는 화음의 새로운 지평을 보여주었다. 박영희의 <석양의 빛>은 화음 프로젝트 Op.198이다. 198이라는 숫자는 화음챔버오케스트라가 작곡가들에게 위촉한 작품의 개수이자 화음이 새로운 창작곡을 연주한 횟수이다. 이날 <석양의 빛>은 작품의 완성도와 함께 연주의 완성도 측면에서도 깊은 인상을 남겼다. 작품에 대한 이해와 공감을 기반으로 한 헌신된 연주였다. 이들은 음악만으로 그림을 충실하게 그려나가며 듣는 이의 시야를 무한히 확장시켰다. 2012년부터 전곡시리즈로 진행하고 있는 쇼스타코비치의 실내교향곡 또한 이전과는 다른 완숙한 연주로 화음챔버오케스트라가 새로운 경지에 다가갔음을 보여주었다.
클래식 음악계가 척박한 땅이라는 것은 새로울 것이 없다. 그러나 경쟁에서의 도태와 지원의 부족만이 많은 단체들이 소리 없이 사라지는 이유가 될 수는 없다. 각 단체의 목적 상실과 그에 따른 의욕 저하가 큰 원인일 것이다. 변화는 불가피하고 도전은 필연적이다. 빛의 떨림과 여운을 생생한 전율로 살려낸 박영희의 <석양의 빛>과 정신을 무력화하는 상황에서도 끝내 날카롭게 살아남은 쇼스타코비치의 작품은 암흑 같은 절망에 굴복하지 않는 살아있는 정신의 힘을 보여준다. 이들이 밝혀가는 빛의 여정은 곧 어둠과 싸워낸 흔적이다. 화음챔버오케스트라는 우리 음악계에서 4반세기 이상의 시간을 살아남았다. 사라지지 않고 새로워지는 위해서, 오직 자신만의 노래를 계속 살려야 한다.
서주원 (bwv10@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