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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Monologue I: 날의 벽] 예술이라는 타임머신
송주호 / 2023-11-20 / HIT : 301

예술이라는 타임머신

송주호(음악칼럼니스트)

 

Monologue I: 날의 벽

에르완 리샤(비올라), 클라리넷(조성호), 이헬렌(첼로), 배기태(더블베이스)

2023년 10월 4일(화), 11일(화) 오후 7시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우로보로스

 

  예술이란 무엇일까? 이 질문에 답을 하기는 왠지 어려우면서도 조심스럽다. 미적 감상을 일으키는 대상이라고 에둘러 말하기는 하지만, ‘미적’의 의미를 정의하는 문제가 새롭게 나타난다. 이를 정의하면 또다시 다른 단어의 정의가 무엇인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가 되어 마치 우로보로스(ουροβóρος)와 같이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우리에게 일상을 통해서 일상적이지 않은 감각을 일깨운다면, 그 정의가 무엇이든 우리는 그것을 ‘예술적’이라고 부른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따라서 예술은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다르며, 주제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평화로운 시대를 보내고 있다면 예술은 화려한 모습으로 드러날 것이고, 어려운 시기를 보냈다면 고통을 회고하며 치유하는 모습으로 그려질 것이다. 어린 시절 문화대혁명을 겪은 세대의 음악에서 중국적인 표현이 민족적 정체성을 나타내면서도 고통스러운 과거의 메타포가 된 것은 예술의 규정할 수 없는 특질의 단편이다.

 

  오랜 역사 속에서 어려운 시기를 자주 겪은 한반도의 예술도 그러하다. 특히 20세기 이후의 한반도 예술이 식민, 전쟁, 이념, 빈부, 부패, 성차별 등의 메타포를 담고 있고, 또 그렇게 읽으려고 한다. 이는 과거의 반영이자 잔향이겠지만, 현재도 벗어나지 못한 관념이다. 그것은 현재도 우리의 삶이 이러한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삶 속에서 피어나는 예술의 탄생 비화일지도 모르겠다. 즉, 이러한 과거의 기억은 예술의 속성이다. 학교와 책에서 배우는 역사, 예술은 그것을 현실감 있게 받아들이게 한다. 그래서 우리는 과거의 유물을 전시하고, 옛 예술가들의 작품을 감상한다.

 

  애니깽

 

  멕시코 이주 노동자를 소재로 한 정연두의 작업 ‘백년 여행기’는 이러한 예술의 속성을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멕시코 선인장 ‘애니깽’(henequen: 에네켄) 농장으로 간, 우리가 잊은 한국인 디아스포라, 그리고 그 후손들. 나라가 기울고 심지어 주권을 빼앗긴 희망 없는 땅에서 벗어나 새로운 희망을 찾아 떠난 우리의 선친들. 그들은 이제 이 세상에서 사라졌지만, 한민족의 DNA를 물려받은 후손들이 나름대로의 정체성을 수립하며 살아간다.

 

  어떤 정체성인가? 그들이 한국이 궁금해서 한국의 문화를 찾아보고 체험한다 한들, 그들이 한국인이라고 생각하게 될까? 한국으로 영구이주한 중앙아시아 고려인이 ‘고향’이 그리워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로 돌아갔다는 소식, 그들에게 한민족의 피가 흐른다고 해도 그들은 한국인이 되질 못 했다. 어쩌면 그들에게 한민족임을 강조하는 것부터 ‘단일민족’이라는 뿌리 깊은 오해(!)가 낳은 우리의 물신주의적(勿信主義的) 폭력일지도 모르겠다. 혼혈이 많은 멕시코, 그곳에서 태어난 한국인 디아스포라 2세 혹은 3세들은 아버지 혹은 할아버지가 한국인이라는 사실 이외에 더 이상의 의미는 없을지도 모른다.

 

  정연두의 ‘백년 여행기’ 전시는 이러한 복합적 정체성을 적나라하게 반영한다. 특히 가장 큰 공간에서 하나의 큰 영상과 세 개의 작은 영상이 재생되는 4채널 비디오 작품은 오늘의 멕시코와 한인 후손들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한국의 판소리, 멕시코의 전통 밴드, 그리고 일본의 샤미센 음악 연주를 보여준다. (일본은 한국인들을 모집하여 멕시코로 보낸 중계 회사의 국적이다.)

 

  이 작품은 장르로 보면 다큐멘터리 영화이지만, 놀라운 것은 시청 공간을 공연장으로 바꾸는 마력을 보여주었다는 점이다. 한국, 멕시코, 일본의 연주자들이 연주하지 않을 때면 영상이 멈추지 않고 다음 연주를 기다리는 모습을 보여주며, 영상의 재생 시간 내내 동시적으로 진행되었다. 이는 영상과 관객에게도 동시성을 부여하여 현장성을 확보했다. 그래서 시청이 아니라 공연을 보는 실감적 효과를 얻었다. 48분이라는 재생 시간이 전혀 길게 느껴지지 않은 것은 이 전시의 긍정적 결말이다.

 

  그 옆방에는 ‘날의 벽’이 전시되었다. 설탕으로 만든 다양한 종류의 마체테(machete)를 다른 크기의 상자에 넣어 한 벽에 가득히 쌓았고, 양쪽의 다른 두 벽은 흡음제로 덮였다. 이 설탕으로 만든 칼은 아주 느린 속도로 녹고 있으며, 점차 형태를 잃어간다. 마체테가 가져다줄 달콤한 미래가 사라져가는 모습이다. 조금씩 조금씩 한국에 대한 갈망이 사라지고 정체성조차 잃어가는 모습이다. 그리고 압도하는 규모는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일말의 희망도 꿈꾸지 못하는 그들의 마음을 그 공간에 불러놓는다. 심지어 흡음제는 사라져가는 그들의 이야기조차 듣지 못하도록 막아선다. 그들에게 제시되었던 희망찬 모집 공고와 달리, 그들의 삶은 피폐해져갔다. 그리고 뿔뿔이 흩어지고 외로움만이 남았다.

 

  네트워크를 확장할 복합성이 외로움을 낳은 것은 아이러니이다. 사람은 근본적으로 동질성보다는 차이점을 먼저 살펴보기 때문이다. “나는 삼중으로 고향이 없는 사람이어서 오스트리아에서는 보헤미아 사람이요, 독일에서는 오스트리아 사람이며, 세계에서는 유대인이다. 어디를 가도 이방인이요, 어디에서도 환영을 받지 못한다.”라는 구스타프 말러(Gustav Mahler)의 말처럼, “러시아인도 아니며 독일인도, 유대인도, 그 어느 것도 아니었다. 어느 곳에도 진정한 내 집이 없다.”라는 알프레드 슈니트케(Alfred Schnittke)의 말처럼, 복합성은 모두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모두에게 속하지 않은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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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진의 <설탕으로 만든 칼>을 연주하고 있는 클라리네티스트 조성호

 

 

악보가 된 벽

 

  ‘날의 벽’ 앞에서 이 작품으로부터 모티브를 얻은 네 곡의 무반주 독주곡을 연주했던 화음챔버오케스트라의 ‘모놀로그’ 연주회는 그래서 더욱 처절하게 다가온다. 홀로 무대에 올라온 공간을 소리로 채우지만 다시 홀로 떠나야 하는 무대, 멕시코에서 일했던 그들이 느꼈을 외로움이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낯선 곳에서 결혼하고 자식을 낳으며 사회를 구성했지만, 타향에서의 사무친 외로움은 겪어본 사람만이 공감할 수 있는 마음이 아닐까 싶다. 네 명의 작곡가들은 정연두의 ‘날의 벽’에서 그들의 마음의 소리를 듣고 각자의 음악으로 우리에게 그 소리가 아닌 그 마음을 전달한다.

 

  첫 곡은 이재구의 비올라 독주곡 <생동하는 분자들의 힘>으로, 멕시코 이민자들이 당시 혁명과 투쟁에 참여했던 역사를 소재로 하고 있다. 혁명과 투쟁, 이 곡은 멕시코의 이민자들이 맞닥뜨린 예상치 못한 삶의 방식을 조명한다. 그들은 혁명을 위해 일하였던가? 그는 싸우기 위해 그 땅을 밟았던가? 천만에! 그들은 그저 먹고살기 위해, 행여나 더 나은 삶을 꿈꾸며 태평양을 건넜다. 하지만 그들에게 주어진 운명은 매우 거칠었다. 이 작품이 들려주는 거칠고 극적인, 그리고 격변하는 소리들처럼. 그들은 그렇게 살았고, 그렇게 스러져갔다.

 

  장석진의 클라리넷 독주곡 <설탕으로 만든 칼>은 그들이 겪었던 삶과 역사에 위로의 메시지를 전한다. 이 곡이 들려주는 바람 소리, 이중음 등 여러 현대적 음향은 그들의 현실을 낭만적으로 그리기를 버리고, 그들의 해결되지 않는 삶의 순간들을 관객들에게 전달한다. 그래도 희망의 노래들이 잔잔히 들려오는데, 어쩌면 현실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찾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아니, 그럴 수밖에 없다. 칼로 사탕수수와 에네켄을 베던 그들에게, 칼을 만든 설탕은 고통의 날들에 대한 보상이다. 여기에 클라리넷 음색으로 그들의 수고를 감싸 안는다, 그리고 오늘의 연장으로 하루를 수고하며 지친 귀갓길에 오르는 우리들의 수고를 감싸 안는다. 본래 베이스클라리넷을 위해 작곡된 곡인 만큼, 심연에서 울리는 그 음향 속에서 편히 쉬고 싶다.

 

  김성기의 첼로 독주곡 <애니깽 노예들을 기억하며>는 그들이 토속적인 선율로 한국에 근본을 두고 있음을 말한다. 그리고 그들이 경험하는 낯선 세계와 낯선 일, 그리고 낯선 고통을 말하고, 점차 절규로 바뀐다.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그들의 말, 아무도 돌아봐 주지 않는 그들의 삶, 그들은 홀로 억세게 견뎌내야 했다. 달콤한 설탕으로 만들었다고 해도, 그것은 칼인 것이다. 음악이 사라지듯 그들은 사라졌다. 그들의 고통이 저승에서라도 설탕으로 만든 칼이 녹듯이 녹아내리길.

 

  마지막 곡은 임지선의 더블베이스를 위한 <디아스포라>가 연주되었다. 이 곡은 멕시코뿐만 아니라 비슷한 시기에 이루어진 한민족의 디아스포라로 확대했다. 가깝게는 연해주로, 멀게는 중앙아시아, 미국, 중남미로 흩어진 동포들, 누군가는 살기가 힘들어서, 누군가는 강제로, 누군가는 부모를 따라 고향을 등졌다. 그리고 계속 어디론가 이동했다. 작곡가는 정연두의 작품을 보고 중앙아시아의 디아스포라를 떠올렸다. 멕시코에서도 그랬듯이, 그들도 다양한 현장으로 스며들었는데, 그중 하나는 소련의 군인이었다. 이 곡은 그들의 노래를 인용하고 현대적인 언어로 풀어갔다. 그래서 옛 노래가 오늘의 노래가 되게 한다. 디아스포라의 음악이 우리 시대의 음악으로 변모한 이 음악을 들으면서 갑자기 한 생각이 머리를 스쳐 간다. 우리는 모두 디아스포라가 아니었던가? 전통문화에서 서양문화로의 이주, 더 이상 우리 것이 우리 것이 아니게 된, 우리 것이 더 낯설게 되어버린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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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주 후 대담 중인 정연두 작가와 임지선 ​작곡가, 박상연 예술감독 

 

 

 

 보이지 않은 것이 보이며, 들리지 않은 것이 들리는

 

  미술 작품과 음악 작품이 함께 하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시각의 공간성과 청각의 시간성의 상보적 공존, 즉 물이 흐르면 물소리가 나고, 나무가 흔들리면 나뭇잎 부딪히는 소리가 나는 것과 같은 이치려니. 그렇다면 ‘날의 벽’을 보면 어떤 소리가 들릴까? 마체테로 사탕수수와 에네켄을 자르는 소리가 들려야 할까? 하지만 그 공간에서는 그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대신 그 마체테로 작업했던 이들의 숨소리, 고통스러운 신음, 외로움의 사무친 노래, 그리고 살아가려는 의지가 들렸다.

 

  시각과 청각의 간극은 눈이 자신의 귀를 절대로 볼 수 없는 만큼 저만치 떨어져 있다. 눈과 귀의 대립은, 이어진 대담에서 있었던 박상연 예술감독의 말씀처럼, 그 부조화와 충돌에서 새로운 감각이 발현된다. 음악을 들으면서 ‘날의 벽’이 악보로 읽힌 것은 그 한 단편이다. 그렇게 사람의 감각은 확장되고, 보이지 않은 것이 보이며, 들리지 않은 것이 들린다. 그렇게 과거의 경험을 현장으로 옮기고, 경험하지 못한 과거가 현재의 경험으로 체화된다.​ [畵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