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용자와 생산자의 이분법을 넘어
김인겸(음악평론가)
2023 레퍼토리 프로젝트 - Story III: Message
2023년 9월 26일(회) 오후 7시 30분
예술의전당 IBK챔버홀
프롤로그 – 음악의 내용
음악이 명시적인 메시지를 담을 수 있는가? 가사가 있는 성악음악에서는 비교적 그렇다고 말할 수 있다. 반면 가사를 가지지 않는 기악음악은-성악음악이라도 가사 없이 허밍 등으로 선율을 표현하는 경우- 양상이 다소 복잡하다. 만약 작곡가가 일종의 프로그램을 정하고 음악으로 그것을 구현했다면 메시지를 담았다고 할 수 있다. 예컨대 비발디(Antonio Vivaldi, 1678-1741)의 <사계>는 계절의 풍경과 정서를 묘사하는 소네트를 첨부함으로써 작곡가의 프로그램을 선명하게 한 표제음악이다. 물론 어떤 사람이 비발디의 프로그램과 무관하게 자신의 주관으로 <사계>를 다르게 해석하고 감상할 수 있다. 기악음악의 또 다른 범주는 절대음악이라고 일컬어지는데, 프로그램뮤직과 달리 작곡가의 메시지가 제목이나 글로 명시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1770-1827)의 <교향곡 제4번>은 그의 <교향곡 제3번 ‘에로이카’>나 <교향곡 제6번 ‘전원’> 등과는 달리 표제나 프로그램이 없다.
표제음악도 청자가 자신의 주관을 개입해서 자유롭게 해석하고 즐길 수 있다. 개인의 자유와 개별성의 가치가 과거에 비해 비교할 수조차 없이 커진 시대가 도래한 현재에 이러한 경향은 확대되고 있다. 그러나 말러(Gustav Mahler, 1860-1911)의 <교향곡 제5번>의 4악장만이 자아내는 특유의 분위기, 거기에 흐르는 정서, 음악이 빚어내는 색채 등이 존재한다면, 일반화해 표현하여 어떤 특정한 내용을 가지고 있다면, 그리고 그 내용에 어슴푸레하게나마 일반적인 공감대가 형성될 수 있다는 데 동의한다면, 절대음악도 음악에 따라서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는 결론에 조심스럽게 도달할 수 있다. 이 결론을 토대로 그 전제를 역으로 추적해보자. 그렇다면 작곡가는 표제음악이든 절대음악이든 자신의 생각을 음악에 의도적으로 담을 수 있지 않을까? 반대로 작곡가는 어떤 경우에 음악이 메시지화하는 것을 배격하기 위해 절대음악을 택할 수 있지 않을까? 이 생각을 극단적으로 밀어붙이면 어떤 작곡가가 표제를 제시해 놓고 정작 음악에는 표제와 내용적으로 관련이 없거나 완전히 다른 메시지를 일부러 숨길 수도 있다는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본다.
짧게 살펴보았지만 기악음악이 담고 있는 메시지라는 것은 간단치 않은 논의를 촉발한다. 반대로 화음챔버오케스트라(이하 ‘화음’이라고 칭한다)의 레퍼토리 프로젝트 스토리 Ⅲ의 경우에는 아예 ‘메시지를 가지는 음악’이라고 못을 박고 실제로 메시지가 비교적 선명한 작품들도 프로그램을 구성했다. 이는 강요까지는 아니더라도 비교적 화음의 방향성과 화음이 그동안 연주한 레퍼토리 프로젝트를 접하고 이에 대해 일정 수준 동의하는 청자를 대상으로 했다고 추정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 음악회가 화음을 모르는 사람, 화음의 방향성과 생각을 달리하는 사람을 배제하기 위해 기획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작년부터 진행된 화음의 레퍼토리 프로젝트를 지켜본 필자는 비평가로서 레퍼토리 프로젝트가 어떤 특별한 본령에 도달한 의미 있는 성취를 했다고 평가한다. 그것은 파편화된 개인이 일시적으로 모여 음악을 감상하고 사라지는 보통의 음악회를 넘어, 화음의 예술적 방향성과 음악의 지향성, 화음이 추구하는 가치, 이로부터 도출될 수밖에 없는 화음의 음악해석과 연주 스타일에 나름의 동의를 표하는 개인들이 모여 일종의 예술 공동체가 형성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공동체가 군중의 단계를 완전히 넘었는지 증명할 방법도 없고, 레퍼토리 프로젝트도 현재진행형이기는 하기에 최종 평가는 유보할 수밖에 없지만, 지금까지의 변화와 성취는 의미가 있다.
메시지를 가지는 음악들을 형상화하는 과정
이날 연주된 작품들이 담은 메시지는 다양했다. 첫 곡인 조인선의 <16개의 물결이 바다가 되어>는 화음의 체제 변경과 이에 따른 새로운 출발을 담은 작품이다. 두 번째 곡인 데이빗 러드윅의 <잃어버린 계절>은 환경 문제를 다루면서 상실한 추억, 회복하기 힘든 경험을 이야기한다. 강준일(1944-2015)의 <불의 전사>는 국가의 폭력에 맞서는 개인의 분투를 불의 이미지로 형상화한 작품이다. 마지막 작품은 쇼스타코비치(Dmitri Shostakovich, 1906-1975)의 친구이자 음악학자의 죽음을 접하고 그를 추모하는 대화 혹은 독백 같은 음악이다.
네 곡 모두 메시지가 비교적 분명하고 무겁다. 그래서인지 음악회 내내 중후하고 진지한 분위기로 가득했으며, 그러한 분위기는 지휘자 박상연과 화음의 연주자가 만드는 음악에서도 비롯되었다. 이 지점에서 필자는 화음의 예술감독 박상연과 화음의 연주에 대한 분석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다른 평론가가 음악회 비평문을 어떤 프로세스를 거쳐 쓰는지 구체적으로 모두 알 수는 없지만, 대개 연주회에 필수적으로 참석하고 프로그램노트를 비롯한 관련 문헌을 읽고 연주회 음원을 구해 듣는 일, 이렇게 세 가지는 순서나 비중은 달라도 반드시 하리라 생각한다. 필자가 담당하고 있는 화음의 레퍼토리 프로젝트 평론에 한정시키더라도 이 세 가지 과정을 거쳐 그동안 비평문을 작성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비평을 맡은 이상 좋으나 싫으나 음원을 집중해서 들어야 하는데, 이 작업이 늘 즐겁지만은 않다. 그런데 이 글을 쓰는 과정에서는 음원 듣는 작업의 비중이 대단히 높았다.
현악기의 음색은 그 특유의 어쿠스틱 사운드 때문에 현장에서 현악기 고유의 울림-심지어 활털이 현을 긁을 때 나는 소리까지-을 직접 들을 때 느껴지는 그 무엇인가를 놓치지 않아야 한다. 현악기로 구성된 스트링오케스트라는 각 파트 고유의 배음과 악기마다 조금씩 다른 음색이 하나로 어울릴 때 울리는 음향의 매력이 강하다. 그렇다 보니 화려하고 질 좋은 음향에 지나치게 홀리면(?) 음악 감상은 즐거워도 비평이라는 본연의 임무를 자칫 게을리할 우려가 있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음원을 듣는 작업은 그래서 즐거움이 반감되는 행위일 때가 많다. 역시 이번에도 무심하게 이어폰을 끼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하루 종일 이번 연주회를 다섯 번 이상 반복해서 들었고, 이후에도 나도 모르게 음원을 듣다가 연주 자체에 빠져들었다. 귀 기울여 듣다 보니 더 많은 게 들렸다. 화음의 사운드가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개성이 무척 강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원래 그랬는데 나 혼자 뒤늦게 알아차린 것인지 그동안 화음의 음악이 변한 것인지 알 수는 없으나, 혼자만의 시간이 즐거웠다.
음원에서는 현장에서 들을 수 있는 현악기 고유의 울림은 꽤나 사라지는 편이다. 대신 각 파트의 사운드와 특히 독주자의 음향이 혼합되고 화합되는 것이 눈으로 보는 듯이 선명하게 그려진다. 실의 올과 결이 촘촘하게 엮이듯이 악기 하나 하나의 음들이 직조되는데, 그 과정에서 들리는 비브라토의 떨림이 소름이 끼치도록 섬세해서 호수의 잔물결이 반사하는 햇빛이 너무 강해 호수라는 사실마저 망각하는 상황 같았다. 그 음향들을 구축하는 손길 또한 현장에서가 아닌 음원으로 들을 때 명확하게 인식되었다. 예술감독 박상연은 악보를 시간예술인 음악으로 구현하기 위해 음들을 멈춰 세워 구조화하는 방식-물론 실제로 멈출 수는 없다- 대신 자연스러운 흐름에 맡기는 방식을 택한 것 같다. 다만 이 과정에서 그는 치밀한 계획을 동원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것은 템포와 셈여림이다. 박상연은 정교한 템포 설정과 셈여림 조절로 실내오케스트라의 장점을 극대화시켰다. 이게 가능하려면 연주자의 연주력과 앙상블 능력이 필수적이다. 화음의 연주자들은 한 명 한 명이 내로라하는 독주자면서 화음의 앙상블에 집중한다. 이렇듯 고도의 앙상블로 빚어진 정교한 사운드가 자칫 지나치게 무거워질 수 있는 메시지 가득한 음악회에 집중하게 해준 원동력이었다고 생각한다.
메시지를 생각하다
음악은 멈춘다. 음악이 남긴 울림도 사라진다. 그러면 끝인가? 아니다 음악은 어떤 형태로든 흔적을 남긴다. 감정의 동요일 수도 있고 강렬한 음향의 기억일 수도 있다. 이번 연주회의 메시지는 역시 묵직했다. 메시지의 무게는 다양한 감각으로 바뀌어 내면에 쌓인다.
조인선의 <16개의 물결이 바다가 되어>는 굽이치는 빛들이 하나의 태양으로 모아지는 이미지로 지금 떠올린다. 하모닉스와 때때로 들리는 익숙한 선율이 산개된 채 끝나지 않고 하나의 둥근 원으로 압축되는 느낌이다. 어느 조직이든 운영체계를 바꾸는 것은 만만치 않은 일이다. 리더그룹 체제에서 16명의 현악기 연주자 구조로 재편한 화음의 고민과 고뇌를 조인선은 무겁지 않게 그려내었다. 개인이든 조직이든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며 변해야 하는데, 변화에는 에너지가 필요하다. 조인선이 작품에서 그 에너지를 노골적으로 보여줬다면 그 무게에 짓눌렸을 텐데 에너지가 남긴 흔적만을 음악으로 포착한 것 같다. 그래서 흔적에 머물지 않고 본질로 다가가는 성찰로 음악은 인도한다.
데이빗 러드윅과 또래인 필자에게 뚜렷한 사계절은 이제 기억으로만 존재한다. 나른하고 짧지 않은 봄, 늦봄과 초여름의 경계를 혼자 고민한 시간들, 지루하지만 시작과 끝이 확실한 장마와 작열하는 태양이 압도한 여름, 8월 중순이 지나면서 아침저녁으로 살갗에 닿는 선선한 바람, 기분좋게 익어가는 가을의 색과 쨍하게 추운 겨울의 강추위와 함박눈의 기억들은 다시 경험하기 힘들 것이라는 우울한 보도들을 지겹게 듣는다. 바이올린 두 대는 미묘하게 엇갈리며 교란된 생태계와 기후를 표현한다. 가냘픈 바이올린 선율은 인간의 죄의식을 자극하는 것처럼 들린다.
사람이 자신의 몸에 불을 붙이는 분신은 단순히 목숨을 각오한 자가 할 수 있는 행위를 초월한다. 이 불사름은 강력한 고발이자 자기희생이다. 강준일의 <불의 전사>의 모델인 서승 교수는 보안사에 불법 체포된 후 고문을 받다가 분신을 시도하여 중화상을 입었다. 그는 ‘비전향장기수’로 19년간 복역한 후 석방되었다. 필자는 서승 교수가 사상전향을 거부하고 19년이라는 오랜 복역을 택한 그의 양심과 신념에서 막연하나마 불의 전사라는 이미지를 떠올린다. 비올라와 더블베이스 등 저음악기 위주의 원곡을 들을 때와 달리 이번에는 현악오케스트라 버전으로 편곡된 버전을 연주했는데, 상대적으로 저음악기가 덜 부각되었다. 대신 바이올린이 불의 이미지를 형상화했다는 인상을 받아, 서승 교수 내면을 부각했다고 생각하는 원곡과는 다르다고 여긴다.
쇼스타코비치의 <실내교향곡 2번>, 특히 2악장은 독백이나 방백 같았다. 또렷한 선율이 아닌, 읊조리듯 웅얼거리는 바이올린 독주는 앞선 러드윅과는 대조적이었다. 가족이나 지인 같은 친밀하게 지내던 사람의 죽음이 개인에게 주는 스트레스는 매우 높다고 한다. 모든 죽음은 애도가 필요한 법이지만, 더욱 특별한 애도를 필요로 하는 죽음도 있기 마련이다. 내밀한 속내를 알 수는 없으나 쇼스타코비치에게 솔레르친스키의 죽음 또한 그랬나 보다. 4악장에서 쇼스타코비치는 친구의 돌이킬 수 없는 죽음을 받아들이고 새로운 전망으로 나아가는 듯하다. 호른의 음향은 그러한 선언과도 같이 들렸다.
에필로그 –수용자와 생산자의 공동체를 꿈꾸다
화음의 기획과 연주는 간단치 않다. 모든 음악회가 나름의 공력을 들여서 꾸며지겠지만, 화음의 연주회는 유독 질량이 크다. 그래서인지 연주회를 감상하고 집으로 오면 필자는 늘 기진맥진한다. 이는 평론을 담당하지 않은 연주회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그런데도 자꾸만 생각이 난다. 공연장에서는 벅찬 감동에 휩싸이다가도 집으로 오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 휘발되어 사라지는 여타 연주회와는 분명 다르다. 차이를 부르는 요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필자는 이를 메시지에서 찾고 싶다. 화음의 묵직한 메시지는 비단 이번 연주회를 포함한 레퍼토리 프로젝트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이는 전곡 연주회 같은 기획 시리즈의 음악회와도 결이 또 다르다. 그것에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화음의 연주회는 강한 메시지성(性)을 갖기 때문이다.
화음의 메시지성은 작곡가 및 연주자로 묶이는 생산자와 감상자 및 평론가로 묶이는 수용자-평론가가 수용자인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있다-로 대별되는 양측을 연결하는 다리이자 접착제 역할을 한다. 적어도 공연장에서 화음의 연주회를 감상하는 시간 동안 생산자와 수용자는 느슨할지언정 하나의 공동체를 이룬다. 이는 많은 음악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음악적 군중과는 다르다.
화음이 갖는 공동체성이 자칫 배타성으로 흐를 위험도 배제할 수 없으나, 과도하게 상업적이고 동어반복에 찌들어 스타에만 의존하는 경향이 종종 보이는 한국 음악계에 새로운 창조적 힘을 보태기를 기대한다. [畵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