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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2021 화음프로젝트 페스티벌: 박수근을 만나다] 붕벽(崩壁)에서 포옹까지
송주호 / 2021-06-10 / HIT : 730

붕벽(崩壁)에서 포옹까지

: 송주호

 

경계 허물기

사회의 위기 앞에 선 예술가는 자신의 주변을 더욱 살피기 마련이다. 그들의 남다르게 예민한 감각은 이에 더욱 강렬하게 반응하기 때문이다. 특히 처음으로 세계대전이라는 거대한 이름이 붙은 1차 세계대전이 종식된 후에는 그들의 이상행동이 눈에 띄게 나타났다. 과거와 오늘의 예술을 전쟁으로 부당성이 증명된 구시대의 사회 질서의 상징이자 인습으로 규정하고, 과거에 대한 무조건적 거부를 합리화하고 시도한 것이다. 이러한 현상을 포괄적으로 지칭하는 아방가르드라는 용어이 등장한 것은 바로 이때였다.

당시 아방가르드의 모습 중 하나였던 다다이즘은 오늘날에도 자주 회자되며 영향을 끼치고 있다. 예술 사조를 한마디로 정의하는 것은 오히려 본질과 멀어지는 참담한 결과를 가져오기도 하지만, 연관성이 없는 개념 혹은 대상을 함께 배치하는 시도로 조심스레 말해본다. 궁극적으로는 새로운 질서를 찾아보는 시도이기도 하다. 90~1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당시의 작업은 충격을 주지만, 여전히 그 의미를 정의하기는 어렵다. 사실 시도 자체가 예술이었고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었기에, 질문 자체가 곧 의도이자 답이기도 했다. 오늘날에도 기억되는 것은 바로 이 끊임없는 질문 때문이었을 것이다.

오랜 시간이 지난 요즘도 다다이즘이 이렇게 질문으로 남겨진 것은, 대상들이 속한 서로 다른 영역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서로 다른 영역에 속한 채로 남겨져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인간이 가진 아전인수(我田引水)의 본성은 담벼락 세우기에 더 능숙한 재주를 발휘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의도적으로 공통점을 찾기 어려운 두 대상을 연결한 것은 시작부터 답을 찾을 의도가 있었는지조차 의심스러워진다. 심지어, 감상자의 상상력을 유도한다고는 하지만, 작가적 수준의 능력이 필요한 탓에 전문가의 영역으로 오히려 경계가 짙게 지어지는 부작용을 초래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개개인보다 집단적으로 이 문제에 접근하는 경향이 보인다. 최근 경계 허물기는 상투적인 유행어가 되었고, ‘융합 예술이라는 정책적 용어들이 사용되면서, 많은 예술가들이 영역 파괴를 필수적인 덕목으로서 논하고 시도하며 추구하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은 콘텐츠보다 방법이 우선시되면서 클리셰와 키치가 복제되고 양산되는 부작용이 있지만, 이 과정에서 아방가르드 예술이 외면했던 사람에 대한 고민, 즉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인지와 수용에 대한 고민은 분명 의미 있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 서로 다른 영역의 콘텐츠가 만났을 때, 사람들은 어떻게 인지하고 수용하는가에 대한 문제이다.

이러한 문제에서, 대상 자체의 연관성이 부족하다면 본질적인 영역의 연결을 통해서 능동적인 인지와 긍정적인 수용이 이루어질 수 있음이 확실해 보인다. 예를 들면, 문자가 그림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눈으로 본다는 시각 도메인을 공유하기 때문이며, 시각과 청각의 이질성을 갖고 있는 영상과 음악이 자연스럽게 결합하는 것은 시간 도메인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멀티미디어가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고 인간의 문화로 빠르게 일반화될 수 있었다. 이렇게 공통의 지각으로 1차적인 수용이 이루어지고, 또한 각자의 영역으로 분화되어 2차적인 수용으로 연결된다. 따라서 다층적 메타포도 어렵지 않게 전달할 수 있으며, 작가들은 더욱 복합적인 이미지에 복잡한 메시지를 넣을 수 있었다.

 

그림과 음악

이런 점에서 그림과 음악은 본질적으로 다다이즘과 유사한 수용을 보이게 된다. 시간이 흐르지 않고 시각으로 지각하는 그림과, 시간의 영역에 있으며 청각으로 지각하는 음악은, 예술이라는 한 집안에 있음에도 수용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다. 역사적으로 음악 사조가 미술 사조와, 심지어 문학 사조와도 서로 보조를 맞추지 못했던 것도 그다지 공통점이 없기 때문이다. , 음악은 타 예술의 사조를 대입하기 위해서는 새롭게 정의해야 했고, 여기서 많은 시간과 동의가 필요했다.

화음챔버오케스트라는 약 30년간 이러한 문제를 정면으로 맞서왔다. 콘서트홀이 아닌 갤러리에서 연주함으로써, 여러 개의 이미지를 연속함으로써, 그림과 음악이 공존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자 노력했다. 그러다 최근에는 시간 도메인을 갖는 영화와 영상을 사용하여 새로운 돌파구를 만들었는데, 이러한 시도는 매우 긍정적인 반응을 얻었으며, 특히 202132일에 예술의전당 IBK챔버홀에서 열린 화음프로젝트 아카데미: 실험 Documentary Nostalgia’에서 공감각적 인지를 극대화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영상과 음악이 시간 도메인을 공유하고 있으면서도, 무대 위의 연주자들이 영상의 인물들과 동일한 의상을 착용함으로써 영상과 무대를 구분하지 않고 하나의 시각적 콘텐츠로 확장되어 지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림과 음악을 공감각적으로 혹은 융합적으로 지각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한가? 202164일 예술의전당 리사이틀홀에서 열린 ‘2021 화음프로젝트 페스티벌 I: 화음챔버오케스트라, 박수근을 만나다스토리텔링이라는 한가지 가능성을 제시했다. 그림을 묘사하는 것이 아닌(사실 이러한 시도는 대부분 실패하며, 종종 상투적 표현의 범벅이 되기도 한다.), 그림 속에서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를 풀어냈다. 이것은 감상자가 가진 문학적 감수성을 매개로 예술적 상상력을 어렵지 않게 발휘할 수 있도록 하여, 그 속에서 그림을 시간 도메인으로 확장한 것이다.

 

연주 돌아보기

이재구의 플루트와 바이올린, 첼로를 위한 <당신의 눈빛이 나를 뛰놀게 한다>(화음프로젝트 Op. 195: 2018)는 김진열의 눈맞춤’(2015)에서 부자간의 대화를 들려주었다. 이 작품은 두 가지 계층이 있다. 하나는 바이올린에 아기, 첼로에 아버지라는 역할의 배정, 그리고 플루트가 제3자의 시각으로 이끌어가는 정서적 표현이다. 이러한 설정은 미술 작품의 주제와 이 작품의 재질인 나무가 주는 정서적 이미지를 모두 수용하고 있으며, 협화음을 사용함으로써 서민적이고 친밀함을 지향했다. 여기에 현대적이고 특징적인 이질적 제스쳐를 사용함으로써 스토리텔링에서 벗어나 정서적으로 치우치지 않도록 방어한다. 이러한 균형은 미술 작품과 음악 작품의 연결성을 유지하면서 공감할 수 있는 공통의 소재를 제공하여, 감상자가 자연스럽게 예술적 상상을 즐길 수 있도록 유도했다. 특히 음향적 접근은 최근 주목받고 있는 ‘ambient music’을 연상시킨다. 이 음악은 집중도를 높이면서도 흡인력이 적어, 청각 이외의 다른 감각에 집중력을 분산함으로써 공간 감각을 불러일으키기에, 영상 작업의 필수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재구의 이 작품은 그림과 음악의 공존에 유용한 힌트를 제공했다.

조선희의 현악삼중주곡 <고목과 여인>(화음프로젝트 Op. 194: 2018)은 박수근의 고목과 여인’(1962)을 가득 차지하고 있는 커다란 고목과 캔버스 밖으로 바삐 나가려는 듯한 두 여인에서 모습에서 이야기를 만들었다. 이 작품은 박수근의 그림에 등장하는 고목과 여인 두 명을 음악으로 끌어온 듯하다. , 저음을 내는 첼로는 고목에 연결되며, 끊임없이 얽히며 대화하는 바이올린과 비올라는 두 여인에 대입된다. (간혹 두 여인의 대화를 묵묵히 듣고 있던 고목도 작곡가의 상상력이 더해져 대화에 동참하기도 한다.) 이 작품은 현대적인 선율과 화음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면서도, 극적인 불연속성 없이 안정적으로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하지만 박수근의 그림이 갖는 정서와는 연결성에 의문이 있다. 20세기 중엽 시골의 모습과 고목이 엿듣고 있었을 두 여인의 대화는 그렇게 진지하지 않았을 것이지만, 이 음악이 가진 내면적 진지함은 그림과는 독립적이다. 이러한 이질성은 숙련된 감상자에게 또다른 예술적 상상의 단초를 제공하겠지만, 시각에 일차적인 지배를 받는 대부분 감상자에게는 불편함을 가중했을 가능성이 크다. 작품의 완성도의 문제를 언급하는 것이 아니다. 공감도가 높지 않은 예술가의 독창적인 은유가 녹아있는 작품에는 보다 자세한 설명이 필요하다.

배동진의 현악삼중주곡 <구릉, 주름이 되어>(화음프로젝트 Op. 181: 2017)는 황재형의 산을 베고 산을 덮고’(1997-2005)에서 험한 겨울산 등정에 감상자들을 동참시켰다. 눈이 쌓여 하얗게 센 산과 수 겹의 봉우리들이 첩첩이 겹쳐있는 험한 산세에서, 작곡가는 이 산을 오르내린다면 어떨까 하는 상상으로 이야기를 풀어갔다. 산속에서 들리는 바람 소리와 산길을 걷는 듯 반복하는 단편들, 그리고 마치 힘에 부쳐 걷다 쉬다를 반복하는 진행의 단절 등, 객석에서 이 연주를 듣고 있는 관객 각자는 환상의 세계에서 작곡가와 함께 산속을 거닐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눈에 띄는 대단원이 있지는 않지만, 대단히 섬세한 표현과 감각적인 표현 장치들은 라우타바라의 <새와 관현악을 위한 협주곡>처럼 압도하는 설득력이 있다. 나아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알프스 교향곡>이 주는 감흥이 데자뷔처럼 떠올랐다.

김성기는 박수근의 골목안’(1950)에서 아이들의 노래를 들었다. 구체적으로 이야가하면, 작곡가는 1950~60년대에 유소년 시절을 보낸 작곡가의 어린 시절을 현악삼중주곡 <골목길>(화음프로젝트 Op. 180: 2017)에서 이야기했다. 20세기에서 프랑스 음악이 가장 주목받았던 때에 파리에서 공부한 작곡가는 여러 작품에서 세련되면서도 진지하며, 고급스러우면서도 직관적인 조음술(調音術)을 보여주었다. 이 작품에서도 예외가 아니며, 잘 만들어진 음향을 들려주었다. 여기에 음향 속에서 들려오는 세 현악기의 소박함과 민요적인 리듬으로 박수근의 그림과 훌륭히 조화를 이루었다. ‘골목안이 정적인 작품이기에 공감각적인 감상에는 어려움이 있을 것으로 예상했지만, (등에 업혀 있는 아기를 포함한) 그림 속의 여섯 인물은 작곡가의 이야기를 담은 선율과 화음에서 생명을 기운을 받아 살아 움직이는 듯했다.

 

또 하나의 경계 허물기

여기에 전후반의 첫 곡으로, 양원배 작곡의 빈대떡 신사와 김기태 작곡의 꿈에 본 내 고향두 곡의 대중가요를 모티브로 한 편곡이 연주되었다. 박수근이 그림이 서민적이며 일상적이라는 것에서 착안한 기획으로, 화음챔버오케스트라는 이미 20141012일 석파정에서 대중음악을 모티브로 한 작품 시리즈로서 이러한 또 하나의 경계 허물기 시도를 했었다. 이러한 대중음악의 편곡은 생각보다 큰 고민이 따라온다. 원곡에 대해 감상자가 받을 기대와 인상을 염두에 둘 것인가, 아니면 절대적인 악상으로 취급하여 자유롭게 변주할 것인가?

전반부 첫 곡으로 연주된 안상민 편곡의 빈대떡 신사는 후자에 해당한다. , 플루트로 연주하는 앞부분에서는 템포를 조정하여 다른 정서를 이입하고, 뒷부분에서는 클라리넷에 클레즈머 스타일을 가미하여 뜻하지 않은 조우를 경험했다. 이러한 가운데 원곡을 지나치게 은유화하지 않음으로써, 감상자가 원곡과 편곡을 상상 속에서 비교해볼 수 있는 감상의 즐거움을 누리게 했다.

배동진 편곡의 꿈에 본 내 고향은 후반부 첫 곡으로 연주되었다. 이 곡은 전자에 해당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원곡에서 기대하는 정서를 거스르지 않으면서, 클래식 악기의 무게감을 더하여 도도하게 들려주었다. 이 편곡에서는 선구자가 클라리넷의 무반주 독주로 먼저 연주되었는데, 이것은 꿈에 본 내 고향을 대중음악이 아닌 예술가곡으로 인식하게 함으로써, 자신의 이러한 접근을 설득했다. 하지만 선구자선율이 시작과 함께 큰 인상을 주어, 주제 선율이 등장했음에도 의도한 정서가 곡 전체를 지배하지 못했다.

 

화음의 본질

화음챔버오케스트라는 그 이름에 경계 허물기의 본질을 품고 있다. 이는 그림과 음악을 넘어 시각과 청각으로 확대되고, 또한 다른 장르와도 섞이는 장()을 만든다. 이번 음악회는 이러한 장을 구현한 실례로서, 규모와 상관없이 대단히 신선한 감흥을 불러일으켰다. 허무는 시도를 위한 허물기가 아닌, 허물고 나서 서로가 만나 포옹하는 순간까지 진행했기 때문이다. 화음챔버오케스트라는 약 30년 동안 쌓인 저력과 경험, 레퍼토리, 화음큐레이션 등을 기반으로 의미 있는 기획을 통해 계속해서 더 큰 힘을 발휘할 것이며, 이번 연주의 성과는 지속하여 확대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