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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2020 화음 프로젝트 아카데미 실험 : Documentary Nostalgia] 영상과 음악, 낯선 감각으로 시간을 변주하…
장승연 / 2021-03-29 / HIT : 650

영상과 음악, 낯선 감각으로 시간을 변주하기

 

정연두 작가의 <다큐멘터리 노스탤지어(Documentary Nostalgia)>2007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처음 소개되었을 때, 이 작업은 ‘85분의 한 컷이라는 수식어로도 불렸다. 4개의 풍경이 차례로 만들어졌다가 바뀌어 가는 과정을 카메라 한 대로 1시간 2418초 동안 편집 없이 기록한 원테이크 방식에 주목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지난 202132일 예술의전당 IBK챔버홀에서 초연된 화음프로젝트는 이 작업에 음악 실황이라는 또다른 원테이크를 덧입힌 실험적 공연이다. 미술관(화이트큐브)도 극장(블랙박스)도 아닌 연주홀 무대 위 스크린에서 <다큐멘터리 노스탤지어>상영되고, 이 영상 작업을 기반으로 창작된 음악이 오케스트라의 협연과 작곡가의 즉흥 연주로 함께 상연된 것이다. 필름 음악회”(적절한 표현을 찾지 못하여 브로슈어의 용어를 인용한다)가 동시에 보여주고 들려주는 한 컷은 관객의 약 85분간의 시간을 분명 낯설게 변주할 것이다.

 

 

 

미술관에서, 극장에서, 그리고 무대로

필름 음악회에 대한 감상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정연두 작가의 <다큐멘터리 노스탤지어>를 좀더 들여다보자. 이 영상의 내용은 서사적인 흐름으로 진행된다. 화려한 벽지로 도배된 작은 방을 포착하던 영상은 이내 정겨운 동네 정경, 목가적인 시골 풍경, 울창하고 신비로운 숲, 마지막으로 운해로 둘러싸인 산 정상으로 차례로 바뀐다. 이는 실제가 아닌 미술관 실내에 만들어진 세트로, 이 풍경들이 만들어졌다가 바뀌는 과정을 한자리에서 기록하는 한 대의 카메라 렌즈는 단 한 번도 눈을 깜빡이지 않는다. 그 깜빡임, 한 번의 편집이면 한순간에 풍경의 전환이 가능할 텐데도, 영상은 풍경을 만들었다가 해체하는 사람들의 수고스러운 노동과 우연히 생겨나는 실수까지도 전부 담으며 거기에 기록된 물리적인 시간을 오롯이 관객에게 전달한다. 따라서 러닝타임이 흐르면서 많은 이들의 협업과 노동의 땀, 느림의 속도, 그 사이에서 펼쳐지는 우연성으로 빚어진 이 원테이크 기록의 밀도가 깊이 느껴질수록 어떤 질문이 떠오른다. 이 영상이 정말로 보여주고 싶은 것은 매우 그럴듯하게 재현되는 풍경과 그 트릭 같은 기술이 아닌, ‘무언가가 구축되는 것에 대한 의문과 질문일 수도 있음을 말이다. 그 무언가란 우리가 흔히 노스탤지어라고 부르는 기억에 대한 것일 수도 있고, 동시에 어떤 장면을 이미지로 구축하는 미디어 매체의 형식적 본질에 대한 것일 수도 있으며, 크게는 실재와 재현의 관계에 대한 것일 수도 있다.

 

벌써 반세기도 더 지난 옛이야기가 되었지만, TV가 등장하고 가정용 홈비디오가 시각예술의 매체로 사용되기 시작한 이래, 영상(여기선 projected image, moving image 둘다 포함한다)시간성에 대한 현대미술의 다양한 실험을 주도해왔다. 단순한 행위를 반복하는 퍼포먼스를 기록하여 그 시간을 그대로 물리적으로 제시하고, 단 몇 초간의 영화장면을 슬로모션으로 길게 늘여서 시간 사이의 간극을 느끼게 하거나, 다채널과 설치의 방식으로 영상의 시각적 경험을 오감적 체험으로 확장한 미술사 속 강렬한 장면들을 떠올려보자. 그러한 시도들이 정점을 지나 영상이 어느덧 현대미술의 주요 매체로 안착한 2000년대 이후, <다큐멘터리 노스탤지어>‘2007년 한국이라는 시공간적 맥락에서 미디어아트가 보여줄 수 있는 흥미로운 실험으로 자리했다.

 

그렇다면, 지금 <다큐멘터리 노스탤지어>가 음악과 만나는 새로운 협업에서 어떤 새로운 맥락과 의미를 살펴볼 수 있을까? 우선 내가 기억하는 관람방식을 잊어야 한다는 전제가 생긴다. 2007 당시 <다큐멘터리 노스탤지어>의 전시 방식은 상영보다는 설치에 가까웠는데, 관객이 영상의 첫 장면에 등장하는 방에서 영상 작업을 본 후 다음 전시공간으로 이동하면 마치 영상 속 여러 풍경 안에 들어가듯 세트를 똑같이 설치해 놓은 것이다. 이때 무대와 객석의 구분은 전혀 없으며, 관객은 능동적이고 자율적인 방식으로 이 작업을 감상할 수 있다.(물론 이후 이 작업은 국내외 미술기관에서 상영 방식으로 관객을 만나왔다) 반대로 무대를 기반으로 하는 연주홀은 현대미술이 이끈 탈중심적인 감상 방식과는 전혀 다른 방식을 요구한다. 지정된 좌석에서 잠시 동안의 자리비움도 허용되지 않는 연주홀에서의 관람은, 자유롭게 이동하며 작품의 시작과 끝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미술관에서의 관람과는 전혀 다르게 전통적이고 수동적이다. 관객과 아티스트(작품)의 위치와 거리도 철저히 분리된다. 물론 지금 이러한 조건을 부정적인 시각으로 나열하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이 프로젝트가 처음부터 상정한 관람의 조건이 정연두 작가의 영상과 장석진 작곡가의 음악이 평행하게 흐르는 물리적인 시간의 원테이크를 오롯이 경험하게 한다는 것이다.

 

 

다른템포로 흐르는 러닝타임

익숙하지 않은 예술적 경험은 종종 어렵다혹은 난해하다는 단어로 갈무리되기도 한다. 하지만 반대로 관객의 익숙함을 만족시켰다면, 그것은 이 프로젝트의 목적인 실험이라고 부를 수 없을 것이다. 이 프로젝트에서 마주한 음의 흐름이나 음향의 형태를 글로 묘사하기가 쉽지 않은 이유는 그것이 어떤 추상적인 상태에 가깝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는 동시에 그동안 음악에 대한 나의 인식과 경험이 얼마나 구상적이었는지 반문하게 한다. 음악과 영상이 만나는 대부분의 순간에서 내가 인식한 음악의 역할은 영상의 시각적 장면의 감정이나 분위기를 고조시키거나, 반대로 그 장면의 방향을 한순간에 전환시키는 것과 같이 어떤 방식으로든 서사의 진행에 동참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애초에 음악도 미술도 굳이 서사적이어야 할 필요가 없는 예술 장르 아닐까.

 

장석진 작곡가의 음악 연출은 사실상 이 영상으로부터 어떤 영감을 받았는지에 대해서 유추하기 힘들게 진행된다. 오케스트라의 연주는 영상 장면에 평온하게 대응하기보다는 예측 불가능한 다른 템포로 개입하고, 작곡가의 즉흥 연주는 사운드를 듣는 것을 넘어 어떤 순간에는 마치 공간적인 감각처럼 현장을 휘감듯 느껴진다. 공연이 시작된 뒤 얼마간 내 나름대로 어떤 음악적 규칙을 찾으려던 시도가 철저히 실패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그 난처함에서 흥미롭게도 음악이 비어있는 순간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생각해보면, 음악회에서 여백을 감각하는 경험이 가능했던가 싶다. 그렇다면 음악은 주어진 시간을 채우는 것과 달리 어떻게 시간을 비울 수 있을까. 반대로 관객은 음악의 여백을 어떤 방식으로 경험할 수 있을까.

 

음악의 여백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어떤 상태를 느낄 수 있었던 것은 함께 상영되는 영상 작업의 시각적 경험이 동반되었기에 가능했던 것 같다. 동시에 음악의 낯선 템포는 11초를 성실하게 재생되고 있는 <다큐멘터리 노스탤지어>에 이질적인 엇박자를 심기도 한다. 예를 들어, 완성된 세트(풍경) 속에서 어떤 연기나 행동을 취해야 할 인물들은 정작 움직임을 멈추며 일시정지(pause) 버튼을 누른 상태가 되고, 반대로 화면에 포착되지 말아야 할 주황색 작업복을 입은 스태프들의 분주한 움직임(play)이 활기를 만들며 대조를 이루는 순간 이 영상의 흐름이 순간적으로 어긋나게 느껴지는 것이다. 또한 풍경이 완성된 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잠시 동안에도 시간은 흐르는 반면 영상 속 장면은 마치 사진처럼 종종 멈춘 듯 보이는데, 그 순간의 이질감은 러닝타임 내내 흐르는 영상의 시간에 잠시의 여백을 만드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러한 낯설음 없이 음악이 영상의 장면을 성실하게 보조하며 매우 익숙한 방식으로 흘러갔다면 <다큐멘터리 노스탤지어>는 일반적인 감상의 차원, 즉 장면과 장면의 흐름에만 갇히거나 극단적으로는 일종의 노스탤지어의 클리셰 이미지로 질주해버렸을지도 모른다.

 

이 낯선 감각적 경험에서, 영상과 음악이 그리는 평행선이 미묘하게 겹쳐지는 지점은 의외로 연주자들이 영상 속 스태프와 같은 주황색 작업복을 입은 부분이다. 이 실험의 퍼포먼서로 동참함으로서, 그들의 연주는 물론 아무것도 연주하지 않는 멈춤 역시 하나의 행위가 될 수 있다. 더군다나 이러한 연주자들의 수행성은 영상 속에서 분주하게 세트를 변경시키는 스태프들의 몸짓과 대구를 이룬다. 만일 스크린에서 상영되는 영상의 화질이 원래 작업 상태 그대로 빨려들 것 같이 생생하고 또렷했다면 퍼포먼서의 수행성이 더욱 흥미롭게 부각될 수 있었을 텐데 영상의 흐릿한 화질이 그 맥락을 흩트려버린 점은 아쉽다. 나아가 무대라는 공간적 틀과는 다른 방식으로도 이 필름 연주회를 진행할 수 있는 방식을 고민해볼 필요도 있다. 원테이크의 형식으로 관객의 시간을 어떻게 점유하는가의 문제는 오히려 장소의 유연함 속에서 새롭게 제시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필름 음악회에서, 음악의 비선형적인 시간성은 영상의 선형적인 시간성에 낯선 박자를 새긴다. 85분간의 긴 한 컷 위에 어떤 리듬, 쉼표, 띄어쓰기, 잠시 멈춤, 빈칸 같은 기호가 표시된 새로운 악보가 그려지는 것이다. 이처럼 음악이 영상의 시간에 낯선 방식으로 개입하고 이를 변주할 때, 영상 작업을 본다는 경험 또한 작동하는 어떤 독특한 시간성을 느껴보는 새로운 경험으로 확장될 수 있다.

 

장승연 / 미술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