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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畵/音.zine vol.8] 음악하기(Musicking)와 현대의 음악교육
안정순 / 2023-11-20 / HIT : 376

음악하기(Musicking)와 현대의 음악교육

안정순(음악학자, 음악평론가)

 

 

“서구 고전음악도 평범한 인간의 음악일 뿐이며, 다른 어떤 종족음악과도 다를 바 없다.”

- 크리스토프 스몰(Christoph Small)

 

  ‘악보를 잘 보는 것과 음악성은 얼마나 관련이 있을까?’ ‘음악교육에서 악보 보는 법을 익히는 건 꼭 필요한가?’ 물론 여기에서 말하는 음악교육은 전문인을 위한 음악교육이라기보다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보통의) 학교 음악교육을 말한다.

 

 

현대 음악교육철학의 두 가지 흐름

 

  소위 민중을 위한 학교 음악교육은 18세기 계몽주의 사상의 영향으로 시작되었다. 루소의 영향을 받은 스위스 출신의 페스탈로치(J. H. Pestalozzi: 1746-1827)는 민중을 위한 교육인 근대식 학교 교육철학을 펼친 교육사상가이다. 민중을 위한 음악교육은 프랑스 혁명과 미국의 독립 이후 여러 발전 단계를 거쳤고 현재는 크게 두 갈래로 정리될 수 있다. 하나는 미국음악교육자협의회장(MENC)을 역임했던 리머(B. Reimer: 1932-2013)를 중심으로 미학적(aesthetic) 경험을 중요시하는 심미주의 혹은 경험주의 음악교육관과, 다른 하나는 엘리엇(D. Elliot)을 중심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의 흐름을 따르는 실천주의(praxis) 음악교육관이다. 리머의 심미주의 교육관은 19세기 음악미학자 한슬리크(Eduard Hanslick: 1825-1904)로부터 출발한 것으로 서구의 전통적인 형식주의 음악관에 뿌리를 두고 있다. 반대로 엘리엇의 실천주의 교육관은 20세기 후반의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서양의 전통적인 음악관과는 전면 대치되는 지점에서 출발한다. 이들은 각기 음악이 무엇인지, 혹은 음악을 어떻게 이해하는지에 대해서 근본적인 사고의 차이를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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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고리오 성가 악보와 세계의 민속음악

 

 

포스트모더니즘과 엘리엇의 음악교육관

 

  두 차례의 세계대전으로 그간 견고히 쌓아왔던 서양 중심의 보편성과 총체성에 의문이 제기되었다. 이로 인해 이성을 중시하고 객관적 진리와 과학적 질서를 넘어 획일적인 가치를 부정하고 진리의 상대성을 인정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정신이 만연해졌다. 다양성과 상대성의 가치를 인정하는 포스트모던의 시대적 흐름은 음악교육에도 거대한 영향을 미쳤다. 엘리엇은 1995년 저서 『음악은 중요하다』(Music Matters)에서 서구의 전통적 음악관을 전면적으로 비판했다. 음악을 음악작품에 제한하거나, 음악행위보다 관념론적 감상을 중시하는 태도는 전근대적이며 왜곡된 사고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그럼 엘리엇이 말하는 음악이란 무엇일까? 그는 기본적으로 음악을 ‘인간이 만들어낸 산출물’로 설명한다. 이는 모든 음악적 사고와 지식이 결국 음악적 행위, 즉 ‘음악 만들기’ 혹은 ‘음악하기’(musicing)로 귀결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엘리엇은 음악을 ‘실천적 행위’(musical praxis)로 본다. 더 나아가 이를 개인과 사회의 관계로 확장하면 개인은 하나의 행위자(agent)이자 매개자이며, 매개자인 개인은 음악하기를 통해 자신뿐 아니라 공동체의 활동에 적극 관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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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몰의 저서 ‘Musicking’과 크리스토퍼 스몰

 

 

음악, 명사에서 동사로

 

  엘리엇의 실천주의 음악교육관은 음악학자 스몰(Christoph Small, 1927-2011)의 영향을 받았다. 『뮤지킹 음악하기』(Musicking)에서 스몰은 우리가 음악을 음악작품에 한정하기 때문에 음악을 제한적이고 편협하게 본다고 지적한다. 그 결과 서양 고전음악을 다른 문화의 음악보다 우위에 두는 오해가 양산되었다는 것이다. 음악이 고정된 음악작품이 되면 음악을 만드는 과정으로서의 ‘작곡’과, 다음 절차인 ‘연주’가 분리되는 결과가 초래된다. 이에 스몰은 음악이 원래 명사가 아니라 ‘음악하기’(musicking)와 같은 동(명)사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설명한다. 예컨대 비록 ‘사랑’이 명사이지만 동적인 의미를 갖는 것과 같은 이치다.

 

  엘리엇의 ‘musicing’과 스몰의 ‘musicking’은 그 사전적 정의처럼 구분되는 표현이 아니다. 스몰과 엘리엇의 ‘음악하기’는 둘 다 ‘music’과 ‘making’을 합친 말로 동일하다. 차이점이 있다면 스몰이 역사 문화적 측면에서 음악의 쟁점을 다루고 있고, 엘리엇은 음악교육학과 심리학의 측면에서 개인과 공동체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엘리엇은 음악하기를 통해 사회, 역사, 문화적 맥락(context) 속에서 음악을 ‘체화’(embodiment)하고, 적극적으로 음악을 실연(enact)한다고 소개한다. 체화란 음악을 통해 음악적인 모든 지식, 경험, 정서가 몸에 새겨지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체화의 과정을 개인에서 공동체로 확장하면, 음악하기를 통해 자신이 속한 공동체와 소통하는 것이다. 엘리엇의 음악하기는 사회적이고 대인 관계적이고 공감적인 협력적 구성을 만드는 행위이다. 이러한 구성은 고정된 것이 아닌 유동적인 관계이다. 정리하면 음악교육가인 엘리엇은 음악하기를 공동체 안에서 이뤄지는 사회적 공유이자 사회적 실천으로 본다.

 

 

악보를 바라보는 두 시선

 

  다시 악보의 문제로 돌아가 보자. 서양 음악의 역사는 기보법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세교회의 그레고리오 성가는 당시 여러 버전의 성가를 집대성하여 기록한 악보의 형태로 남아있다. 서양음악사가 그레고리오 성가부터 시작되는 이유이다. 물론 여러 다른 성가와 세속음악이 존재하였지만 기보되지 않은 음악은 서양의 음악역사에 한 부분을 차지할 수 없었다. 뾰족뾰족한 교회의 첨탑과 수도원의 높은 공간 속 울리는 성가의 형태로 상상되는 중세의 소리풍경은 기보된 그레고리오 성가와 함께 전수되었다.

 

  리머의 심미주의 음악교육관은 포스트모던의 흐름과 21세기의 다문화적 흐름을 적극 수용하여 여러 다양한 문화를 경험하는 것으로 변모했다. 그럼에도 그가 말하는 미학적 경험은 음악 자체의 이해 없이는 불가능하다. 음악의 내적 구조인 형식을 이해하는 능력, 즉 악보를 읽는 것은 미학적 경험을 위한 필수과정이다.

 

  반면, 스몰(과 엘리엇)이 악보를 바라보는 관점은 이와 상반된다. 원래 서양음악은 기본적으로 악보로 매개된다. 여기서 악보는 음악을 보존하는 역할로 연주자들이 음악을 효율적으로 익힐 수 있도록 하는 매개이다. 여러 다른 문화권에서도 악보의 형태가 있을 수 있지만, 이는 구전을 위한 보조 수단의 역할을 할 뿐이다. 스몰은 서구의 경우 독특하게도 악보가 작곡 행위를 위한 매체의 기능을 한다고 지적한다. 그 결과 악보가 ‘음악작품’, 즉 ‘음악 자체’가 되어 하나의 명사이자 사물로 고정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그는 악보에 부여된 과다한 의미를 걷어 내는 것, 즉 악보를 음악하기라는 행위 중 일부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주장한다. 더 나아가 스몰은 서양음악은 지구상에 존재하는 음악 중 하나의 종족음악일 뿐이라고 설명한다. 혹여 ‘서양음악의 의미가 축소되는 상황이 발생하지 않을지’ 우려될 수 있지만, 스몰은 오히려 서구 클래식 음악을 하나의 종족음악으로 이해하는 순간 새로운 의미가 발생할 것이며, 동시에 다른 전통문화에 대한 참신한 의미가 더해질 수 있다고 말한다. [畵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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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민경훈 외, 『음악교육학 총론』. 서울: 학지사, 2017.

최유준, 『크리스토퍼 스몰 음악하기』 서울: 커뮤니케이션 북스, 2016.

Christoph Small, Musicking Hanover: University Press of New England, 1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