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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畵/音.zine vol.3] 베르크의 '서정모음곡' 속 비밀이야기
안정순 / 2022-09-01 / HIT : 714

베르크의 현악4중주 《서정모음곡》(Lyric Suite: 1926) 속 비밀이야기

 안정순 (음악학박사)

 

 

쇼팽(Frédéric François Chopin: 1810-1849)과 조르주 상드(George Sand: 1804-1876)의 염문설이나 베를리오즈(Louis Hector Berlioz: 1803-1869)의 해리엇 스미드슨(Harriot Smithson: 1811-1854)을 향한 집요한 짝사랑은 작곡가가 남긴 음악작품만큼이나 우리의 구미를 당긴다. 그런데 정작 이러한 음악의 외적 상황과 음악의 내적 의미와의 관계를 구체적으로 이렇다 얘기하기는 쉽지 않다. 예컨대 조르주 상드와의 스캔들이 쇼팽의 피아노 음악과 어떤 관계가 있나? 스미드슨을 향한 집착에 가까운 사랑이 베를리오스의 《환상 교향곡》에 어떻게 반영되었나? 오히려 이러한 음악외적 정보는 자칫 음악 작품에 대한 이해를 표면적 수준에 그치게 할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베르크의 《서정모음곡》은 순수한 기악음악과 음악외적 관계에 대해 다른 차원의 서사를 가능하게 하는 작품이다. 

 

베르크의 음악이 베베른(Anton Webern: 1883-1945)보다 오히려 더 지적이고 구조적 스키마를 갖는다고 반박했던 독일 사회철학자 아도르노(Theodor W. Adorno: 1903-1969)는 베르크의 《서정모음곡》을 두고 ‘잠재적 오페라’라고 하였다. 아도르노가 이 곡에 담긴 베르크의 자필 주해를 직접 확인하였는지 알 수는 없으며 아마 음악작품 속 악장의 구성과 빠르기말로도 충분히 극적 작품임을 감지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 작품에 얽힌 사연은 베르크의 부인 헬레네 베르크(Helene Berg: 1885-1976)가 세상을 떠난 1976년이 되어서야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다. 베르크를 연구했던 더글라스 그린(Douglass Dreen)과 조지 펄(George Perle), 이 두 학자의 노력으로 자전적 주해가 담긴 《서정 모음곡》이 발견되면서 이 곡에 담긴 비밀스런 이야기들이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되었다. 

 

펄은 한 음악 학술지(The Musical Times)에 베르크의 자필이 실린 악보를 추적하는 과정과 이 작품이 내포하는 이야기를 자세히 실었다. 펄은 베르크의 오페라 《룰루》(Lulu) 3악장의 오케스트레이션이 늦어진 점과 《서정모음곡》의 실제 헌정 대상을 밝히는 데에 어려움이 있었던 이유로 베르크의 부인 헬레네의 질투로 인한 비협조적인 태도를 꼽으며 아쉬움을 토로하기도 하였다. 

 

 

《서정모음곡》을 향한 펄의 추적

 

펄이 공식적으로 베르크의 자료를 정리하기 시작한 때는 1968년 뉴욕의 ‘국제 알반 베르크 협회’의 부회장이었던 한스 레드리히(Hans Ferdinand Redlich)가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난 직후였다. 미국 작곡가, 이론가이자 음악학자인 펄은 베르크에 대한 연구의 결과물을 정리하기 위해 맨체스터에 거주 중이던 레드리히의 미망인을 방문하게 된다. 펄은 베르크 작품을 정리하는 일이 결코 쉽지 않았다고 토로한다. 소실된 작품들로 인해 연대기적으로 번호를 매기는 것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작품들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원래 《서정모음곡》은 공식적으로 쳄린스키(Alexander von Zemlinsky: 1871-1942)에게 헌정된 것으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쳄린스키의 가족이 작품을 소유하고 있을 거라 판단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독일 슈트라우스 현악4중주단의 단장인 호버(Helmuth Hoever)가 《서정모음곡》의 일부 악보에 대한 레드리히의 해석에 문제점을 발견하는데 악보를 정확히 확인하고자 쳄린스키의 가족의 거주지를 문의하게 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레드리히는 쳄린스키 가족이 《서정모음곡》 악보를 소유한 적이 없음을 확인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서정 모음곡》의 필사본을 분실한 것으로 처리하였다. 

 

작고한 레드리히가 남겨 놓은 자료들을 확인하던 중, 펄은 그가 악보를 찾는 과정에서 한나 푹스-로베틴(Hanna Fuchs-Robettin: 1896–1964)과 직접 전화 통화를 한 적이 있었음을 알게 된다. 당시 유선 대화 중 한나가 베르크의 자필로 쓰인 포켓 악보를 소지하고 있다는 기록이 남아 있었지만 펄은 그때만 해도 이들의 관계에 대하여 알려진 바가 없었기에 별로 주의 깊게 듣지 않았다. 그러던 중 펄은 베르크가 ‘헬레네에게 보낸 서신들’에 등장하는 모핀카(Mopinka)가 한나의 애칭임을 알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베르크와 한나의 관계가 세상에 처음으로 나오게 된다. 1964년 한나가 사망함에 따라 자연스레 이 악보는 그녀의 딸인 도로테아 로베틴(Dorothea Robetin)의 소유가 되었다. 도로테아는 펄이 베르크의 자료를 정리할 무렵 펜실베니아에 거주하고 있었고, 다행히 이를 귀중한 자료라고 생각해서 잘 보관하였다. 그녀는 펄의 요청에 기쁘게 응하며 베르크 자필 주해가 담긴 (작은 포켓) 악보를 건너게 되면서 베르크의 자필 주석이 수록된 악보와 함께 《서정모음곡》에 담긴 비밀이야기가 드디어 공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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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반 베르크와 한나 푹스-로베틴 (출처: 
https://www.laliberte.ch/news/culture/musique/alban-berg-notes-secretes-233517)



《서정 모음곡》 속에 담긴 비밀스런 이야기

 

도로테아가 갖고 있던 포켓 악보는 90페이지에 달한다. 악보에는 세 가지 색깔의 잉크를 사용한 베르크의 자필의 주해가 세세하게 적혀 있다. 악보에 적힌 베르크의 필체는 아주 작지만 식별하는 데에 별 문제가 없어 보인다. 제목이 있는 첫 장에는 ‘나의 한나에게’(Fur mein Hanna) 헌정한다고 표시되어 있고, 쇤베르크의 또 한 명의 제자였던 에린 슈타인(Erin Stein)이 쓴 서문이 있었다. 서문의 끝에는 마지막 악장은 트리스탄 주제를 인용하여 12음 기법을 엄격하게 사용하고 있다고 적혀 있다. 슈타인이 쓴 서문 후반부와 매 악장 사이사이에는 베르크가 직접 설명과 그림이 악보에 자세히 표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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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s://youtu.be/biJHZthyqRw​)

 

베르크가 남긴 비밀스런 열애 이야기를 간략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악장 Allegretto gioviale (알레그레토로 쾌활하게)

“나에게 또 다른 자유를 준 건 바로 당신, 나의 한나! 우리 이름의 첫 글자 H. F.와 A. B.를 음악에 비밀스럽게 넣었소. 모든 악장에 걸쳐, 각 악장의 섹션마다 우리의 숫자 10과 23도 넣었소. 당신(비록 공식적으로 다른 사람을 위해 헌정하지만, 이 작품의 모든 음표는 오직 당신을 위한 거요!)을 위해 이 악보에 다른 의미를 부여하였소. 위대한 사랑의 작은 기념비가 되길...” 라는 메모와 함께 1악장은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이루어진 한나와의 첫 만남을 그리고 있다. 앞으로 닥칠 불행을 전혀 예견할 수 없을 정도로 가볍게 시작한다. 1악장의 주요 주제는 한나의 이니셜인 F-H와 함께 시작하고 끝도 F-H로 감싸며 마무리한다. 1악장의 전체 마디 수는 69이며, 여기에 베르크는 ‘3 x 23’ 마디로 표기함으로써, 마디 수를 23의 배수를 의도적으로 사용하였다고 설명한다.  

 

2악장, Andante amoroso (안단테로 사랑스럽게)

여기 이 론도 악장은 한나와 그녀의 아이들의 일상을 그린 악장이다. 주요 주제에 ‘당신’(Du)과 ‘문초’(Munzo)로 표시되어 있는데 문초는 한나의 7살 아들의 애칭이다. 악보에 ‘체코 풍으로 부드럽게’라고 표기되어 있다. 한나의 딸인 도로테아에 따르면 당시 남동생은 체코 초등학교를 다녔고, 독일어보다 체코어를 더 유창하게 말했다고 한다. 베르크는 악곡 중간에 C-C를 반복적으로 사용하는데, 이 음정을 계이름으로 읽으면 ‘도-도’(Do-do) 소리가 나며, 도도는 바로 한나의 딸 도로테아의 애칭이다. 론도 형식의 주요 주제가 다시 등장할 때, 베르크는 ‘당신에게, 다시 당신에게 돌아감’으로 표시하였다.

 

3악장, Allegro misterioso (알레그로로 신비스럽게) - Trio estatico (황홀하게)

베르크는 1925년 5월 제3회 국제 현대음악협회에 참석하기 위해 프라하를 방문한다. 거기서 알마 말러(Alma Mahler)의 남편(Franz Werfel)의 누이의 집에 머무르게 된다. 즉 알마 말러의 시누이가 바로 한나이다. 3악장의 위쪽에 1925년 5월 20일을 의미하는 숫자 ‘20.5.25’가 크게 적혀 있는데, 아마 프라하에서 짧은 만남 후 이들의 사랑을 확인한 날로 유추된다. 베르크는 이 악장의 기본 음렬에 두 사람의 이니셜을 배치하고, 이 날을 ‘모든 것이 우리들에게 불확실한 때’로 설명하고 있다. 그때의 희미하고 신비로운 감정을 베르크는 약음기를 낀 현악기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다 중간부분 트리오(Trio estatico)에서 ‘갑자기 터져 나오는 소리’로 표시되어 있는데 이 부분은 바로 첫 키스를 연상시킨다. 트리오가 끝나는 마디에 ‘잊어버려’(Forget it!)이라는 설명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도 짐작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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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s://youtu.be/biJHZthyqRw)

 

4악장, Adagio appasionato (아다지오로 열정적으로)

‘다음 날’이라는 서두로 시작한다. 앞선 3악장의 황홀하게 연주된 트리오 부분의 주제를 빌려와서 4악장의 제시부에 부분적으로 등장한다. 4악장은 쳄린스키의 《서정교향곡》 3악장의 ‘당신은 나의 것, 나만의 것’(Du bist mein Eigen, mein Eigen)을 인용한 프로그램 음악으로 이미 공식적으로 알려져 있다. 

 

5악장, Presto delirando (프레스토로 착란을 일으킬 정도로) - Tenebroso (어둡게) 

사랑에 뒤따르는 공포와 고통을 묘사한다. 잠 못 이루는 쉼이 없고 끝나지 않는 어둡고 고통스러운 밤을 그린다.

 

6악장, Largo desolato (라르고로 비탄에 잠기어)

절망적인 사랑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음을 보를레르의 시 ‘심연으로부터 울부짖다’(De profundis clamavi)를 프로그램으로 사용한 것으로 음악학자 그린에 의해 밝혀졌다. 또한 바그너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트리스탄 모티프를 인용하여 12음 음렬로 엄격하게 사용하여 이루어질 수 없는 비극적 사랑을 ‘사랑, 열망, 슬픔으로 죽어가며’로 표현하고 있다. 

 

 

문자, 숫자, 음악형식으로 쓴 서정시 《서정 모음곡》

 

앞서 쇼팽과 조르주 상드, 베를리오즈와 스미드슨과의 관계와 같은 기악음악의 외적정보와 음악작품의 내적구조를 직접적이고 구체적으로 설명하기란 쉽지 않다고 하였다. 이런 점에서 베르크의 《서정 모음곡》은 음악외적 사건을 음악의 내부로 만든 참으로 흥미로운 작품이 아닐 수 없다. 사실 이보다 더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비밀스런 구체적 서사 없이도 베르크의 《서정모음곡》을 극적 작품으로 충분히 감지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베르크는 이 작품에 음악 형식이 갖는 추상성과 구조적 특징을 활용하여 자신의 ‘비밀스런’ 서사를 숨겨 놓았다. 악장의 빠르기말에서 홀수 악장은 점점 빨라지고, 짝수 악장은 점점 느려지는 구조만으로 짐작할 수 있다. 이것은 마치 극적 상황이 전개되는 듯 극화되는 형태로 아도르노가 언급한 ‘잠재적 오페라’는 여기에 기인한다. 

 

또한, 악장별 마디 수, 악장 수는 베르크와 한나의 운명의 수인 23과 10의 배수로 이루어져 있다. 예컨대 1악장 69, 2악장 150, 3악장 138, 4악장 69, 5악장 460, 6악장 46으로 떨어지며, 빠르기 지시어, 사분음표 혹은 팔분음표-46, 50, 69에서도 같은 숫자들이 보인다. 그런데 23은 베르크, 10이 한나를 의미하는 것은 분명해 보이지만, 이 숫자가 만들어진 배경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그중 베르크의 천식 발병일인 1905년 5월 23일에서 23이 나왔다고 주장이 가장 많이 알려져 있는데, 사랑하는 사람에게 헌정한 열애 서사에 자신을 대표하는 숫자로 천식이 발병한 날을 넣었다는 것은 다소 납득하기 힘들다. 또한 한나를 의미하는 수가 10인 것에 대해 한나의 이름으로 쓴 서신의 수라는 등 여러 의견이 분분하다. 그중 가장 그럴 듯한 가설은 알파벳과 숫자를 대응시켜 만드는, 소위 ‘운명의 수’를 만드는 것으로, 놀랍게도 알반 베르크는 23, 한나는 10이 나온다. (알파벳과 숫자를 1에서 9까지 나열하고 대입하여 나온 숫자이다!) 당시 빈에서는 심리학, 정신분석학, 초자연적인 현상을 설명하는 것이 유행했던 것을 감안하면 충분히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정리해보면, 《서정모음곡》의 ‘서정시’(Lyric)는 문학 용어로 노래에 붙은 가사 혹은 시이고, ‘모음곡’(Suite)은 바로크 시대의 춤모음곡이라는 순수한 기악장르를 지칭한다. 그렇게 본다면 베르크의 비밀이야기가 담긴 《서정모음곡》은 서정시의 내용을 담은 6악장의 모음곡이라 정리할 수 있다. 아도르노가 말한 ‘잠재적 오페라’에 기대어 모음곡이 아닌 서정시에 강조점을 찍고 보면, 음악적 숫자와 구조로 이루어진 6악장의 모음곡 형식을 갖춘 ‘음악으로 쓴 서정시’가 더 맞는 표현이 아닐는지.​ [畵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