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은 왜 다른 예술을 꿈꾸는가
: 에크프라시스, 음악을 이해하는 또 하나의 시선
안정순
(음악평론가/음악학박사)
Agon과 Ekphrasis
음악은 언제부터 그림을 보기 시작했을까. 조금 엉뚱한 질문처럼 들릴지 모르겠다. 우리는 음악을 귀로 듣고, 그림은 눈으로 본다. 음악은 시간 속에서 흘러가고, 회화는 공간 위에 머문다. 서로 다른 감각과 서로 다른 매체에 속한 예술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음악을 들으며 바다를 떠올리고, 한 폭의 풍경을 그려 내며, 한 편의 소설을 읽은 듯한 감정을 경험한다. 드뷔시의 <바다>를 들으며 파도의 빛과 움직임을 상상하고, 무소르그스키의 <전람회의 그림>을 들을 때는 전시장 안을 거니는 자신의 모습을 떠올린다. 음악은 소리만을 들려주지 않는다. 음악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하고, 때로는 존재하지 않는 공간까지 우리 앞에 펼쳐 놓는다.
오랫동안 이러한 현상은 표제음악이나 묘사음악이라는 말로 설명되어 왔다. 그러나 표제음악의 설명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음악은 정말 그림을 ‘묘사’하는 것일까. 문학을 ‘번역’하는 것일까. 아니면 전혀 다른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이러한 질문은 최근 몇 년간 ‘음악적 에크프라시스’에 관한 글들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더욱 선명해졌다. 처음에는 에크프라시스를 그저 하나의 음악학 용어로 생각했다. 회화를 음악으로 옮기거나 문학을 소리로 표현하는 방식 정도로 이해했다. 그러나 이 개념은 생각보다 훨씬 오래되고 깊은 질문을 품고 있었다.
음악철학자 리디아 고어(Lydia Goehr)의 글은 에크프라시스를 전혀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게 만든다. 고어는 에크프라시스를 현대 음악학이 새롭게 만들어 낸 개념으로 보지 않고, 그 기원을 고대 그리스의 수사학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에 따르면 에크프라시스(ἔκφρασις)는 사물이나 사건을 언어를 통해 마치 눈앞에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현전시키는 수사적 기술이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에나르게이아(ἐνάργεια), 즉 언어가 청중의 상상력을 움직여 보이지 않는 것을 마치 눈앞에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하는 힘이다. 예컨대 『일리아스』 제18권에서 호메로스가 아킬레우스의 방패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길고 생생하게 묘사한다.
그(헤파이토스)는 방패 위에 인간들의 두 도시를 만들었다. 한 도시에서는 결혼식과 축제가 열리고 있었고, 한편 광장에서는 살인 사건의 배상금을 둘러싼 재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다른 도시에서는 전쟁이 한창이었다. 무장한 군대가 도시를 에워싸고 있었고, 성 밖에서는 매복과 습격, 치열한 전투가 이어졌다.

흥미로운 것은 이 방패가 실제로 존재하는 미술작품이 아니라, 호메로스의 언어 속에서 비로소 모습을 얻는 이미지라는 점이다. 호메로스의 아킬레우스 방패에 대한 묘사는 독자의 상상 속에서 방패를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게 만든다. 방패에는 평화와 전쟁, 농사와 축제, 생명과 죽음, 자연과 인간의 모든 양상이 담겨 있다.
그런데 고어가 특히 주목하는 것은 ‘agon’, 즉 ‘경쟁’이라는 그리스어 개념이다. 오늘날 우리는 경쟁을 승패를 가르는 대결로 이해하지만, 그리스인들에게 ‘agon’은 자신의 능력을 시험하고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는 창조적 긴장이었다. 시는 회화를 흉내 내지 않았고, 회화도 시를 그대로 모방하지 않았다. 서로 다른 예술은 각자의 언어를 지키면서도 상대 예술과 끊임없이 겨루었고, 바로 그 긴장 속에서 새로운 표현의 가능성을 발견했다. 고어가 주목하는 에크프라시스 역시 이러한 예술 간의 역동적인 긴장 속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음악적 에크프라시스
음악은 오랫동안 다른 예술과 관계를 맺으며 자신의 표현 가능성을 넓혀 왔다. 그렇다면 우리는 음악을 들을 때 무엇을 듣고 있는 것일까. 단순히 음과 리듬, 화성과 형식을 듣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음악이 다른 예술과 맺고 있는 보이지 않는 대화까지 함께 듣고 있는 것일까. 이것은 음악을 분석하는 방법을 바꾸자는 제안이 아니다. 악보는 여전히 중요하고, 형식과 화성의 분석 역시 음악학의 중요한 토대이다. 그러나 음악은 언제나 다른 예술과 만나며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 왔다. 그렇다면 음악을 이해한다는 것은 악보 안에 머무는 일이 아니라, 음악이 다른 예술과 어떤 관계를 맺으며 자신을 새롭게 만들어가는지를 함께 읽는 일일지도 모른다.
『음악적 에크프라시스』(Musical Ekphrasis, 2000)의 저자 지글린트 브룬(Siglind Bruhn)은 에크프라시스를 단순한 감각의 번역으로 보지 않는다. 그가 주목하는 것은 하나의 예술이 다른 예술과의 만남을 통해 어떻게 새롭게 변형되는가 하는 문제이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음악적 에크프라시스는 단순한 작품 분석의 방법을 넘어, 음악을 바라보는 하나의 시각이 된다. 음악적 에크프라시스는 단순한 재현의 문제가 아니라, 매체를 가로지르는 변형의 문제라 할 수 있다.
다시 무소륵스키의 <전람회의 그림>을 예로 들어야겠다. 흔히 우리는 이 작품을 ‘그림을 음악으로 옮긴 작품’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은 작품의 본질을 충분히 드러내지 못한다. 특히 작품 사이를 연결하는 ‘프롬나드’는 원작 그림에는 존재하지 않는 음악적 장치이다. 무소륵스키는 그림만을 음악으로 옮긴 것이 아니라, 그림을 바라보며 전시장을 걷는 관람자의 경험까지 작품 속에 끌어들였다. 이 순간 그림은 더 이상 음악의 ‘대상’으로만 남지 않고, 음악 안에서 새로운 시간과 서사를 획득한다.
음악은 그림을 소리로 치환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그림은 음악이라는 새로운 매체 안으로 들어오면서 이전과는 다른 의미를 획득한다. 음악은 원작을 복제하는 것이 아니라, 원작과의 만남을 통해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예술적 의미를 만들어낸다. 하나의 예술은 다른 예술로 곧바로 이동하지 않는다. 다른 매체와 해석을 통과하는 과정에서 의미는 새롭게 덧붙여지고 변형되며, 음악은 그 여정의 끝에서 하나의 독립적인 예술로 다시 태어난다. 바로 이 점은 음악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시사점을 던진다. 우리는 흔히 음악이 무엇을 '표현'하는지 묻는다. 이 선율은 바다를 묘사하는가, 이 화성은 슬픔을 나타내는가, 이 리듬은 전쟁을 의미하는가와 같은 질문들이다. 그러나 에크프라시스의 관점에서 더 중요한 질문은 ‘음악이 다른 예술과의 만남을 통해 무엇을 새롭게 존재하게 하는가’이다.



무소륵스키에게 영감을 준 하르트만의 그림을 (출처: Wikipedia)
오늘날 예술은 그 어느 때보다 다양한 매체와 자유롭게 만나고 있다. 음악은 더 이상 콘서트홀 안에만 머물지 않으며, 영상과 공간, 몸짓과 디지털 기술 속에서 새로운 표현 방식을 만들어 간다. 이러한 시대에 에크프라시스는 과거의 수사학적 개념이 아니라, 예술이 서로를 이해하고 새로운 의미를 생성하는 방식을 설명하는 살아 있는 개념이다. 이것은 표제음악을 넘어, 음악이 다른 예술과의 만남을 통해 ‘무엇이 되어 가는가’를 묻는, 음악이 스스로를 새롭게 만들어 가는 과정을 이해하게 하는 또 하나의 미학적 사유이다. 어쩌면 예술이 다른 예술을 꿈꾸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자신에게 없는 감각과 시간, 공간을 빌려 자신의 가능성을 시험하고, 그 만남을 통해 이전에는 없었던 자신이 되기 위해서 말이다. [畵音]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