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창작음악의 현장을 짓다 (I)
: 창작, 현대, 현장의 경계 허물기
안정순
(음악평론가, 음악학박사)
“음악은 어떤 고정된 작품이나 음표가 아니라, 사람들이 함께 만들어가는 살아있는 활동으로,
음악을 만들고 듣고 연주하고 반응하는 관계 속 사건이다.”
-Christoph Small, Musicking(1998)-
한국 근현대사의 궤적 위의 화음
화음챔버오케스트라는 1993년 ‘실내악단 화음’이라는 이름으로 출발한 연주단체로, 1996년 화음챔버오케스트라로 확대 개편한 후 올해로 창단 32년차를 맞는다. 이 단체의 등장은 단순한 연주단체의 탄생을 넘어 한국 근현대사 속 예술 생태계의 흐름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상징적 사례라 할 수 있다.
해방과 분단, 전쟁을 거친 뒤 한국 사회는 1950과 60년대에 들어 근대적 제도와 조직들을 본격적으로 정착시켜 나가기 시작했다. 음악계 역시 이 시기에 제도화의 흐름 속에서 작곡가협회와 교향악단들이 잇따라 창립되었다. 한국작곡가협회(1954), KBS교향악단(1956), 한국현대음악협회(1956), 서울시립교향악단(1957), 창악회(1958), 서울시립국악관현악단(1965), 그리고 서울음악제와 범음악제(구, 서울국제현대음악제, 1969) 등의 창립은 한국 현대음악사에서 중요한 이정표들이다. 특히 범음악제는 창립 이후 동시대 세계 음악계의 흐름을 국내에 소개하고, 한국 작곡가들의 작품을 국제적으로 알리는 데 기여했다. 이와 더불어 KBS교향악단은 1974년부터 1980년대까지 ‘한국 작곡가의 밤’을 개최하였고, 서울시향 또한 정기연주회를 통해 국내 작곡가의 작품을 초연하거나 재연하는 등 현대음악에 대한 관심이 점차 확산되었다. 1980년대는 88올림픽이라는 국가적 행사를 중심으로 한국 문화예술계가 가장 역동적으로 움직였던 시기로 평가된다. 당시 두 개의 주요 교향악단은 지휘자나 감독의 주도 아래 창작곡 위촉을 시도했으나, 이는 체계적인 위촉 시스템으로 자리잡지는 못했다. 1990년대 들어서면서 한국 음악계는 또 하나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냉전체제가 해체되고 문민정부가 출범하며 민간 차원의 창의적 예술활동이 활발히 이루어졌고, 이때 다양한 현대음악 연주단체들이 새롭게 등장하였다. 그중 하나가 바로 ‘화음’이다.
연주에서 기획으로: 위촉의 시작
1990년대라는 시대적 배경 속에서 실내악단 화음은 원래 백화점 내 갤러리에서 소규모 실내악 공연를 선보이기 위해 창단된 단체였다. 갤러리 회원제를 기반으로 현악 중심의 레퍼토리를 연주하던 이들은 1995년 6월 발생한 삼풍백화점 붕괴사고로 인해 활동을 중단하게 된다. 이듬해인 1996년, ‘화음챔버오케스트라’로 명칭을 변경하고 예술의전당에서 창단 연주회를 열며 새로운 출발을 알렸다. 이후 남양주에 위치한 서호미술관을 거점으로 활동을 이어가던 화음은 2002년 ‘창작곡 위촉’이라는 개념을 본격적으로 도입하게 된다. 특히 당시에는 작곡가에게 작곡료를 지불하고 작품을 위촉하는 관행이 드물었기 때문에 이 시도는 한국 음악계에서 선도적인 행보로 평가된다. 연주자가 단순한 해석자나 수용자에 머무르지 않고 새로운 작품의 필요성을 인식하며 이를 직접 제안하고 요청하는 주체로 나섰다는 점에서 그 의미는 더욱 크다. 화음은 이후 서호미술관뿐만 아니라 다른 갤러리로 활동 무대를 넓혀가며 작곡가와 연주자, 청중이 함께 호흡할 수 있는 공연 환경을 조성하는 데 주력해 왔다. 특히 시각 예술과의 연계를 시도하거나 지역 사회와 협업하는 등 창작의 현장을 예술간 교류와 사회적 연대의 장으로 확장해 온 점이 주목된다.

창작 음악의 흐름을 만든 연주단체들
화음뿐이 아니었다. 1980~90년대 이후 국내에는 다양한 현대음악 연주단체들이 속속 창립되었다. 1986년 박은희가 창단한 ‘한국페스티벌앙상블’을 비롯해, 1998년 결성된 ‘CMEK’(한국현대음악앙상블), 고(故) 박창원 음악감독이 2001년 창단한 ‘현대음악앙상블 소리’, 통영국제음악제 홍보를 목적으로 같은 해 출범한 ‘팀프앙상블’, 작곡가 김진수를 중심으로 2004년 결성된 ‘앙상블에클라’ 등이 대표적이다. 이후 2010년대에 들어서며 타악기 연주자 심선민이 주축이 된 ‘서울모던앙상블’(2012), 작곡가 박명훈이 이끄는 ‘앙상블아인스’(2015), 그리고 작곡가 최재혁을 중심으로 한 ‘앙상블블랭크’(2015)등 비교적 최근에 등장한 제2세대 연주단체들 또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이외에도 한국의 창작음악은 작곡가협회, 작곡동인, 각종 음악제를 통해 꾸준히 발표되어 왔다. 그러나 작곡가 중심의 학술제나 동인 발표회 위주로 형성된 음악 생태계에서는 대부분의 창작음악이 발표되자마자 소멸되듯 사라지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상황에서 연주자나 연주단체가 새로운 레퍼토리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창작을 의뢰한 사례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는 공연장의 수요와 창작의 접점을 형성하고, 프로그램 구성 또한 그에 따라 보다 유연하게 변화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화음과 비슷한 시기에 창단되어 연주자 중심으로 활동을 시작한 현대음악 연주단체로는 ‘현대음악앙상블 소리’와 ‘팀프앙상블’이 있다. 현대음악앙상블 소리는 현재 첼리스트 이숙정이 음악감독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 단체는 2013~2021년 ‘트릴로지’라는 기획을 통해 정기연주회, 한국 작곡가의 작품, 실험적인 프로그램이라는 세 가지 축을 중심으로 활동을 전개했다. 이어 2022년부터는 ‘동방신곡’ 프로젝트를 통해 젊은 작곡가 9인의 신작을 꾸준히 소개해 왔다. 이 기획은 작곡가 개인뿐 아니라 그들의 음악에 영향을 준 인물까지 함께 조명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었다. 팀프앙상블(TIMF Ensemble)은 본래 ‘Tongyeong International Music Festival Ensemble’의 약칭으로, 통영국제음악제의 홍보 단체로 출발했다. 그러나 현재는 작곡가시리즈, 연주자시리즈, 한국 작곡가의 밤, 실험적인 무대, 교육 프로그램 등 다양한 활동을 폭넓게 전개하고 있다. 2011년부터 시작된 ‘사운드 온 디 엣지’ 시리즈는 현재 ‘SPICE’라는 이름으로 이어지고 있으며, <피노키오>(2023)와 <행복의 파랑새>(2024) 등 어린이 대상 음악극도 기획하였다. 이들 단체는 공통적으로 자체 기획, 교육 연계, 가족 대상 프로그램 등 다양한 층위에서 창작음악의 확장 가능성을 실험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연주단체들이 새로운 음악의 필요를 인식하고 이를 중심으로 기획과 위촉을 진행하며 반복 연주의 가능성까지 염두에 두기 시작한 흐름은 단순한 연주 활동을 넘어서는 의미 있는 전환이라 할 수 있다. 화음챔버오케스트라는 이러한 전환을 비교적 이른 시기에 시작했으며 지금까지도 그 방향을 일관되게 이어가고 있다. 화음은 새로운 음악이 생성되고, 이어지고, 살아남을 수 있는 환경을 스스로 만들어가는 창작 생태계의 현장을 주도하고 있다. [畵音]
(다음 호에서는 화음이 다른 연주단체들과 공유하는 지점, 그리고 구별되는 지점을 살펴볼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