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 너머의 선율, 루브르에서 되살아나는 음악
노지은
(음악평론가)
미술관에서 울리는 침묵 속 전주곡
사람들은 흔히 미술관을 ‘침묵의 성소’로 여긴다. 말소리를 줄이고, 휴대폰 진동을 끄며, 발소리마저 조심스럽게 내디디는 그곳은 시각의 집중을 요구하는 장소다. 하지만 그런 고요한 미술관 안에서도, 때때로 문득 음악이 들리는 듯한 순간이 있다. 소리로 존재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작품을 바라보는 이의 마음속에 조용히 선율이 흐르는 것이다.
우리는 왜 그런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일까. 마르셀 프루스트는 그의 장편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음악이 감정과 기억을 어떻게 불러일으키는지를 섬세하게 그려낸다. 소설 속 가상의 작곡가 뱅퇴유의 소나타는 주인공 스완이 사랑에 빠지는 순간을 관통하며, 그 선율은 사랑의 정점과 몰락을 모두 껴안은 감정의 흔적으로 작동한다. 스완은 연주가 끝난 뒤에도 그 ‘소악절’이 마음속에서 반복되어 울리는 것을 경험하며, 음악이 실제 소리가 아닌 감각의 반응으로 내면에서 되살아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음악은 단지 귀로 듣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공간이나 장면, 사물 하나를 매개로 감정의 층위에서 반복되는 ‘개인적인 연주’가 되기도 한다. 프루스트에게 음악은 감정과 기억을 일깨우는 언어이며, 들리지 않아도 감각의 깊은 층위에서 울리는 예술의 가장 순수한 형식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루브르 박물관은 특히 음악적인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공간이라 할 수 있다. 고대 이집트와 그리스 유물, 중세 성물과 르네상스 회화, 그리고 나폴레옹 시대의 궁정 미술에 이르기까지, 이곳은 인간 문명이 축적해온 예술적 감각의 밀도를 고스란히 품고 있다. 시각으로 기록된 시간이 겹겹이 쌓인 이 공간을 걷다 보면, 우리는 그림 속 악기의 형상에서, 조각의 손끝에 얹힌 리라에서, 유리관 안에 놓인 하프 하나에서 조용한 울림을 마주하게 될지도 모른다.
소리 없는 미술관에서도 음악은 존재한다. 감정과 기억이 맞닿는 순간 되살아나는 음악은 어쩌면 실제 연주보다 더 생생하고 더 정밀하게 우리 안에 살아 있을 수 있다. 비록 직접 방문해본 적은 없지만, 그곳에서 마주할 수 있는 음악적 경험들을 상상하며 루브르 속에 흐르는 음악의 여러 얼굴을 따라가 보고자 한다. 눈앞에 보이는 작품들 사이에서, 혹은 그 틈과 틈 사이에서, 문득 마음속에 떠오르는 어떤 울림에 대해.
화폭 속 음악, 그림이 들려주는 소리
벽에 걸린 작품들을 감상하며 걷다 보면, 어느 순간 멈춰 서게 만드는 그림이 있다. 그것은 대개 화려한 색채나 인물의 표정, 강렬한 인상을 주는 장면 때문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소리를 담고 있는 듯한 이미지 때문이다. 아무런 음향도 들리지 않는 그 그림 앞에서, 무언가를 ‘들었다’고 느낀다. 바로 그림 속에 등장하는 악기, 연주 장면, 혹은 음악의 분위기를 암시하는 시각적 기호들 때문이다.
르네상스 회화에서는 음악이 이상향의 상징으로 등장한다. 루브르에 소장된 《전원 음악회(Le concert champêtre)》는 티치아노(Tiziano Vecellio, 1488/1490~1576)의 작품으로 추정되며, 두 남성이 악기를 연주하는 가운데 나체의 여인들이 그 곁에 함께 있는 장면을 담고 있다. 이 그림은 고대 목가적 낙원 ‘아르카디아(Arcadia)’를 배경으로 삼는다. 문학과 미술에서 반복되어 온 이상향의 상징인 아르카디아는 현실을 벗어난 유토피아의 감각을 불러일으킨다. 목가적인 자연과 음악의 조화는 시각과 청각이 한데 어우러지는 이상적 감각 세계를 환기시킨다.

이런 초월적 상상과는 달리, 17세기 네덜란드 회화는 훨씬 더 현실의 리듬에 가까워진다. 프란스 할스(Frans Hals, 1580-1666)의 《류트 연주자(Jester with lute)》는 광대 복장의 남자가 활짝 웃으며 류트를 연주하는 장면을 담고 있다. 그는 우리를 향해 손을 뻗으며 함께 노래하자고 말하는 듯하다. 정지된 그림임에도 불구하고, 이 장면에는 생생한 리듬과 에너지가 분명히 흐르고 있다. 유희와 생동감이 가득한 이 그림은, 음악이 단지 아름다움이나 이상이 아니라 일상의 한순간이자 정서적 해방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정물화 속에서도 음악은 생생히 살아 숨 쉰다. 프랑스의 여성화가 안 발레예르-코스테르(Anne Vallayer-Coster, 1744-1818)의 《악기들(Instruments de musique)》은 백파이프, 만돌린, 바이올린, 오보에와 플루트와 같은 여러 악기들과 악보가 가지런히 놓인 장면을 통해 음악적 상상력을 자극한다. 어떤 곡이 기록된 악보인지, 어떤 곡을 연주한 악기들인지, 무엇을 위해 테이블 위에 놓였는지는 알 수 없다. 단지 각 악기들이 어우러져 낼 소리를 상상하며 감상자는 시선을 따라 자신만의 내면 깊숙한 음악을 듣게 된다.

이 외에도 루브르에는 음악을 직접적으로 다룬 수많은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그리고 음악을 주제로 하지 않더라도, 감상자에 따라 내면의 선율을 불러일으키는 회화들이 있다. 이러한 장면들은 말하자면 ‘들리는 그림’이라 할 수 있다. 그 안에는 시각과 청각, 그리고 감정이 교차한다. 침묵 속에서도 살아 있는 그 소리들은, 각자의 상상과 기억 속에서 저마다 다른 음악으로 울린다. 물론 루브르라는 공간 속에서 실제로 마주하게 될 이 순간들은 필자가 느끼는 것 그 이상의 울림을 주리라. 그것이야말로 미술관에서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조용하고도 내밀한 음악적 순간일지 모른다.
유물 속 음악, 사라진 소리의 흔적
회화가 음악을 묘사하는 것이라면, 유물은 한때 음악을 품었던 실체 그 자체다. 그러나 루브르에 전시된 악기와 음악적 순간이 새겨진 유물들은 더 이상 소리를 내지 않는다. 진열장 안에 조용히 놓인 그것들은 연주를 멈춘 지 수백, 수천 년이 지난 존재들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앞에서 음악을 상상하게 된다. 보는 음악, 기억 속 음악, 잊힌 소리를 되살리는 감각의 경험이 시작되는 것이다.
루브르의 고대 이집트관에는 시스트룸(sistrum)과 하프, 류트가 전시되어 있다. 시스트룸은 여러 문양이 장식된 청동 방울 형태의 타악기로, 제사의식에서 신을 부르기 위해 사용되었다. 기원전 수천 년 전의 제례 음악이 울리던 현장을 우리는 알 수 없지만, 이 조용한 악기는 오히려 상상력의 원천이 된다. 하프와 류트 역시 마찬가지다. 이 악기들은 단지 장식물이 아니라, 삶과 죽음, 신앙과 권력의 경계를 울렸던 음악의 매개체였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유물들도 음악적 상상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도자기 속 인물들이 손에 쥔 키타라(kithara)나 아울로스(aulos)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아도 당시의 연주 현장을 떠올리게 한다. 모자이크나 조각상 속 악기는 소리 대신 몸짓과 자세로 그 음악을 암시한다. 어떤 이는 플루트를 불고, 어떤 이는 리라를 튕기며 춤추는 이들과 어우러진다. 그 동작은 멈춰 있지만, 감상자에 따라 다양한 리듬과 선율로 되살아날 것이다.

이 유물들은 침묵 속에서도 ‘사운드의 잔향’을 간직하고 있다. 소리가 사라진 자리에 상상력이 들어서고, 실체가 없는 음악은 감각 속에서 복원된다. 이처럼 유물은 곧 잊힌 음악의 기호이며, 시간을 건너 울리는 가장 오래된 악보일지도 모른다.
되살아나는 음악
루브르의 전시실은 침묵으로 가득하지만, 그 침묵이 곧 ‘실연(實演)되는’ 음악의 부재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2024년 3월부터 6월까지 파리 오케스트라와 지휘자 클라우스 메켈레는 루브르 박물관에서 일련의 음악회를 개최했으며, 박물관 내부에 위치한 미셸 라클로트 강당에서는 전시물과 연계된 다양한 레퍼토리의 공연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공간과 작품, 그리고 음악이 서로의 여백을 메우는 순간, 미술관은 감상의 장소에서 감각의 무대로 변모한다.

그러한 점에서 미술관은 ‘들을 수 있는 음악’보다 ‘되살아나는 음악’이 더 진하게 흐르는 공간이다. 그리고 이 되살아남은 단순한 감상의 차원을 넘어, 누군가의 예술적 영감을 촉진하고 다음 창작의 시작점이 되기도 한다. 국내에서 오랜 시간 미술관 연주를 지속해 온 화음챔버오케스트라의 작업은 바로 이러한 흐름 속에 있다. 이들은 시각예술에서 청각예술로 이어지는 다리 역할을 하며, 예술 간의 경계를 넘나드는 새로운 감각의 장을 열어 왔다. 오늘날 루브르를 비롯한 수많은 소리 없는 예술 세계에서, 개개인의 내면에 울리는 소리—그 소리는 새로운 ‘화음’이 되어 되살아난다. [畵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