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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畵/音.zine vol.4] 한국의 서양 음악 비평의 양상 II: 한국의 서양 음악 비평의 역사
서주원 / 2022-12-01 / HIT : 539

한국의 서양 음악 비평의 양상 II: 한국의 서양 음악 비평의 역사 

서주원 (음악평론가, 음악학박사)

 

 

한국의 서양 음악 비평은 1919년에 시작됐지만 시대적으로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지나며 1950년대까지는 간신히 맥만 이어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초반 30년의 도입기와 암흑기를 거쳐 1960년대부터 70년대까지 20년간 연주회의 증가와 더불어 비평도 활성화되며 70년대까지 발전기를 맞이했다. 60년대는 일간신문에, 70년대는 음악전문지에 연주평을 중심으로 양적 성장을 이루었다. 1980년대는 비평의 도약기였다. 1981년에 서울대학교에 음악이론전공 개설된 것과 맞물려 음악 잡지는 전성시대를 맞이했고, 신문사와 잡지사에서 평론상을 제정해 신예 평론가들을 배출했다. 1990년대에는 음악비평과 학술 활동의 분화가 두드러지면서 새로운 전환기를 맞이했다. 80년대에 전문성을 갖춘 비평가들이 지속적으로 큰 변화를 만들 것으로 기대했으나 이들 대부분이 90년대에 이르러 비평 현장에서 멀어져 학계에 흡수됐다. 2000년대 이후 비평계는 외적 성장과 함께 내적 빈곤·내부 분열 문제가 겹쳐 혼란기와 확장기가 이어지고 있다. 

 

 

도입기

 

음악계와 음악 비평은 함께 성장한다. 창작과 연주가 활성화될수록 비평 또한 활발해지는 것이다. 서양 음악이 한반도에 전해진 후 연주 분야는 1900년에 군악대 창설로 시작됐으며, 창작 분야는 1904-1905년에 김인식의 《학노가》로 시작된 것에 비해 비평분야는 비교적 늦은 1919년에 시작했다. 1919년 홍난파가 발행한 『삼광』은 한국인이 발행한 최초의 음악잡지로, 창간호에 서양음악의 소개와 계몽적 성격을 가진 홍난파의 세 편의 글이 실렸다. 『삼광』을 시작으로 홍난파는 우리나라 최초의 음악평론가로 선구자적 역할을 담당하며 우리나라 평론의 첫 장을 열었다. 홍난파는 또한 1925년에 음악잡지 『음악계』와 1938년에 국내 최초의 음악 산문집 『음악만필』을 펴냈다, 1920년대는 우리나라에 음악회 문화가 자리 잡지 못한 상태여서 작품평이나 연주회평은 거의 없었고 주로 계몽적 성격의 글이 많이 발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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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난파의 『음악만필』

 

 

1930년대는 비평문화가 조금씩 형성되어 갔다. 1930-1931년에 조선일보에 음악평론으로 등장한 김관은 연주자나 작곡가로서 평론을 하지 않고 직업적 성격을 가진 최초의 음악평론가였다. 김관은 1936년에 월간 『음악계』를 창간하고 신문의 음악평론을 주도했다. 그는 비평과 음악비평가의 중요성, 음악잡지의 필요성을 강조했으며, 당시 악단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 잡지의 창간을 주장하기도 했다.1940년대는 일본의 음악전문지에서 평론활동을 하다가 귀국한 박용구가 『동아일보』에 평론을 기고했다. 그렇지만 1945년 해방 이전까지는 일제 강점기라는 시대적 상황으로 음악을 비롯한 모든 문화계가 크게 위축된 상태였기 때문에 비평 활동에 많은 제약이 따랐다. 해방 후 1949년 박용구는 첫 평론집 『음악과 현실』을 출간했다.  

 

 

암흑기

 

첫 20년간의 도입기를 거쳐 해방 후 1950년대는 한국전쟁의 발발로 암흑기를 맞이했다. 50년대에 박용구는 일본에서 망명생활을 했으며, 전문 평론가가 아닌 필자들이 일간신문에 평론을 기고했다. 1960년대에 들어서 연주회가 활발해지며 비평 활동 역시 활력을 얻었다. 연주회평이 주를 이루었지만, 창작, 전통음악, 교육에 대한 비평문 또한 발표됐다. 1960년대는 음악잡지보다 일간 신문이 음악평론의 주요한 무대였으며, 박용구, 김형주, 이강숙, 김정길, 이상만 등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일본에서 귀국한 박용구는 『조선일보』, 『한국일보』에 비평문을 기고하며 여론을 주도했고, 김형주와 이상만은 『동아일보』에, 작곡가 출신의 김정길은 『경향신문』에 고정란을 확보해 오랫동안 비평 활동을 전개했다. 

 

 

발전기

 

1970년대는 경제성장과 더불어 일반인들의 문화예술에 대한 관심이 서서히 높아지고 미국과 유럽에서 공부하고 귀국한 젊은 음악인들의 음악활동이 증가하면서 연주, 작곡, 평론 등 음악계 전반에 양적 팽창이 이루어졌다. 1970년 7월에 음악전문지인 『월간음악』이 금수현에 의해 발간되어 유신, 김원구, 한상우 등 당대 주요 평론가들의 평론에 많은 지면을 할애했다. 이와 함께 1970년대 후반에 『음악세계』, 『공간』, 『뿌리 깊은 나무』, 『신동아』 등의 잡지에도 음악평이 지속적으로 실리며 음악평론의 발전에 기여했다. 

 

1980년대는 한국 음악평론역사에서 중요한 시기로 평가된다. 1977년 귀국 후 평론과 교육활동을 재개한 이강숙은 1980년에 음악평론집 『열린 음악의 세계』를 발표했으며, 1981년에 서울대 음대에 국내 최초로 음악이론 전공이 개설되면서 신예 평론가들이 배출됐다. 또한 음악잡지의 전성시대로 『객석』, 『음악동아』, 『피아노음악』, 『음악교육』, 『음악춘추』, 『음악저널』 등의 잡지가 창간돼 비평문을 실었으며, 평론상을 신설한 월간 『객석』과 일간지 『동아일보』를 통해 김춘미, 민경찬, 주성혜, 이소영 등 음악 이론을 배경으로 참신한 시각을 가진 젊은 평론가들이 다수 배출돼 활발히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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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동아』 창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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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객석』​ 2022년 3월호

 

 

전환기

 

1990년대에는 음악비평과 학술 활동의 분화가 두드러지면서 새로운 전환기를 맞이했다. 80년대에 전문성을 갖춘 비평가들이 지속적으로 큰 변화를 만들 것으로 기대했으나 이들 대부분이 90년대에 이르러 비평 현장에서 멀어져 학계에 흡수됐다. 음악학자 민경찬은 이러한 현상이 음악학술지의 활성화로 기존에 활동하던 음악평론가들이 음악학으로 방향을 전환하면서 발생했다고 지적했다. 한편 1988년에 서울올림픽 개최와 예술의 전당 음악당 개관은 문화예술이 비약적 발전을 이루는 계기가 되었다. 경제가 발전함에 따라 문화 수요가 증대됐으며, 늘어난 자본과 무대와 지면은 연주와 비평의 증가로 이어졌다. 그러나 외형적 성장과 대조적으로 빈약한 내실의 문제가 더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음악학과 비평이 결합된 짧은 시기가 막을 내리고 둘 사이의 분화는 점점 심해져 활발해지는 음악학계 활동과 대조적으로 음악비평은 1990년에 후반에 이르러 음악학자 민경찬은 음악평론이 위기에 처했다고 진단했다. 

 

 

혼란기와 확장기

 

위기의식 속에서 별다른 변화나 대안 없이 2000년대를 맞이하며 혼란기와 확장기가 시작됐다. 음악학계와 평론계의 분화는 더 심화돼 음악학자 허영한은 각각 2003년 『문예연감』에 “음악학계와 평론계는 완전히 분리되어 별도의 영역을 이루는 듯”보인다고 평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외적 팽창은 비약적으로 이루어져 수많은 연주회 비평이 쏟아져 나왔다.  

 

이렇게 2000년대 이후 비평계는 외적 성장과 함께 내적 빈곤·내부 분열 문제가 겹쳐 혼란기와 확장기가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인터넷 문화의 급속한 발달로 이전 시대에 전문가들의 영역이었던 정보가 일반인들에게도 공유되고, 개개인의 소통과 표현의 욕구가 활발해지고 개인의 취향이 존중됨에 따라 음악 애호가들은 음악 동호회나 개인 블로그 등을 통해 음악과 연주, 연주자에 대한 정보를 주고받고, 연주회 리뷰 등을 공유하며 다양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미디어 매체의 변화로 2010년대 중반기 이후 그동안 수많은 연주평을 실었던 오랜 역사를 가진 음악잡지들마저 줄줄이 폐간하며 비평가들의 입지가 좁아졌으며, 표절에 대한 문제가 발생하며 비평가들에 대한 제도적 검증 장치나 자체 정화와 태도의 변화에 대한 필요성이 심각한 문제로 대두됐다. 이처럼 2000년대 이후 지금까지 한국의 비평계는 정체기와 혼란기가 공존하며 변화를 겪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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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한국에서 서양음악 비평의 역사가 시작된 후 비평의 양은 지속적으로 증가해왔지만, 비평 활동이 활발해지기 시작한 1960년대부터 ‘평론부재’의 문제 역시 계속적으로 제기돼왔다. 비판의 요지는 우리나라에 평론다운 평론이 없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비판한 다양한 비평가의 의견을 종합해보면, 첫째, 전문성, 둘째, 독립성, 셋째, 독자성이 없다는 것이다. 전문성은 실력에 대한 문제다. 학문적·이론적 배경과 지식 없이 주관적 감상평이나 인상평에 치우쳐 설득력이 없다는 것이다. 독립성은 선택과 관련이 있다. 신문이나 잡지에 고정란이 없기 때문에 비평가들은 청탁에 의존하게 되는데, 대개의 경우 비평의 대상도 비평가가 선택하지 못한다. 대부분 청탁하는 곳과 이해관계에 있는 공연에 대한 평을 쓰게 마련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비평가는 자유롭게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지 못하고 칭찬일색인 소위 ‘주례사 비평’으로 치우칠 수 있다. 독자성은 개성의 문제이다. 비평문이 획일적이고 비슷한 말의 반복과 나열로 채워져 비평가 고유의 세계관이나 비평의 틀, 목소리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비평이 과연 존재하는가 하는 근본적인 물음이 계속 행해지는 가운데서도 연주평 분야는 그 명맥을 계속해서 유지해 왔으며, 다양한 배경을 가진 비평가들이 유입돼 늘어난 지면을 채움으로써 비평문의 성격 또한 다양해졌다. [畵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