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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畵/音.zine vol.2] 음악의 ‘반복’에 관한 예찬
이소연 / 2022-06-01 / HIT : 497

음악의 ‘반복’에 관한 예찬 

이소연 / 음악-춤 평론가, 아츠인 탱크 공동대표

 

반복이 만든 음악 형식


음악에서 ‘반복’은 중요한 개념이다. 반복을 통해 음악이 발전하고 형태를 갖춘다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음악 형식을 분석하고자 할 때 무엇이 반복되고 어떻게 변형되며 전개되는지를 먼저 살펴보게 된다.

 

반복을 기초로 하여 구조를 이룬 대표적인 것이 소나타 형식이다. 소나타 형식은 제시부-발전부-재현부로 구성되는데 이때 제시부에 등장한 주제는 재현부에 다시 나타나면서 주제가 환기된다. 론도 형식은 새로운 부분이 등장하는 에피소드 사이에서 주제가 반복되며, 변주곡 형식은 주제의 반복이 연속적으로 일어나면서 구성된다. 카논, 푸가 등은 주제가 다른 성부에서 모방되면서 반복된다. 물론 변주곡과 모방 형식은 주제가 반복될 때 다른 모습으로 재현되지만 그 근간은 반복에 있다.

 

낭만주의에서는 고전주의와는 다른 의미에서 반복을 추구했다. 고전적 ‘주제’라는 개념은 낭만주의 시기에 들어와 ‘아이디어’의 개념으로 전환되면서 대칭미, 균형미를 갖춘 악절 구조의 고전적 주제가 극단적으로 축소되게 된다. 이러한 아이디어 개념의 등장은 명확하고 균형잡힌 구조에 가치를 두었다기보다 하나의 방향성을 제시하며 발전하는 양상에 초점이 맞춰졌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새로운 미학적 사고가 반영된 것으로 낭만주의는 무엇이 어떻게 되어가는 그 과정에 음악적 의미를 부여했던 시기다.

 

예를 들어, 브람스 교향곡 4번 1악장에서 주제를 만드는 기본 아이디어는 ‘3도’이다. 최소 단위인 3도 음정이 반복, 변화, 발전하여 거대한 악곡을 형성하는 것이 마치 하나의 세포가 복제, 분열, 성장하여 유기체를 이루는 양상과 같아 보인다(악보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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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보1. 출처: 이강숙 『음악의 이해』)

 

이러한 유기체론적 작곡 방식은 음악을 분석하는 방식에도 적용된다. 음악학자 루돌프 레티(Rudolph Réti)는 베토벤 비창 소나타를 분석하면서 셀(cell)의 개념을 적용하였다. 즉 하나의 셀이 반복되면서 모티브(motif)를 이루고 이것이 서로 결합하여 보다 높은 차원의 패턴(pattern)을 형성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셀-모티브-패턴의 분석 방식은 전악장에 적용되어 작품을 하나의 통일된 전체로 인식하게 만든다.

 

(악보2)는 베토벤 <비창 소나타> 1악장의 도입부이다. 레티는 3도 음정 관계를 기초 셀(prime cell)이라 명명하고 이것으로부터 도입부의 주제 패턴이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 그 과정을 보여준다. 이러한 분석은 부분과 전체를 통합하고 그 상관 관계를 설명하는 흥미로운 방식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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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보2. 출처: 루돌프 레티 『Thematic Patterns in Sonatas of BEETHOVEN』)

 

 

음악의 반복이 불러온 또 다른 예술


특정한 주제와 아이디어가 반복되는 것과는 달리 베이스 성부에서 특정 패턴이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경우가 있다. 이것을 베이스 오스티나토(bass-ostinato)라 하는데 파사칼리아는 베이스 오스티나토가 사용되는 대표적 음악 양식이다. 베이스 패턴이 규칙적으로 반복되면 일정한 맥박이 감지되며, 감지된 맥박은 시간 속에 머무르지 않고 공간 속 움직임을 유발한다. 이렇게 조우(遭遇)한 시간과 공간은 또 다른 예술을 잉태시키는데, 바로 춤이다.

 

네덜란드 댄스 시어터를 세계적 반열에 올려놓은 안무가 지리 킬리안(Jiří Kylián)은 하인리히 비버(Heinrich Biber)가 작곡한 파사칼리아로 안무하여 <윙즈 오브 왁스, Wings of Wax>라는 작품을 만들었다. 이 곡에 사용된 베이스 오스티나토는 ‘라멘토(슬픈 노래)의 엠블렘’이라 불렸던 순차하행하는 4도 패턴으로 이 위에 주제 선율이 얹혀지고 변주된다(악보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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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보3. 하인리히 비버의 파사칼리아 첫 부분. 이 곡은 비버가 작곡한 미스테리 소나타(Mystery sonatas)의 마지막 곡으로 베이스 오스티나토 음형 G-F-E♭-D가 끝까지 반복되고 있다)

 

두 명에서 시작된 춤은 네 명이 되고, 또 여러 명으로 확장되면서 안무적 의미를 생산해 나가는데 이는 끊임없이 반복되는 음악 패턴 위에 Wings of Wax 즉 ‘인간의 덧없는 욕망’이라는 내러티브를 부여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음악의 반복이 움직임을 창조하는 동력이 되며, 의미를 생산해내는 재료가 될 수 있음을 확인한다(영상1).

 

(영상1. <윙즈 오브 왁스> 중 비버의 파사칼리아를 사용한 부분)

                                        

반복 음악의 최고봉이라고 할 수 있는 미니멀리즘 음악도 춤으로 생명력을 얻는다. 안무가 안느 테레사 드 키어스메커(Anne Teresa de Keersmaeker)는 스티브 라이히(Steve Reich)의 총 4개의 곡에 안무를 붙여 <파세(Fase), 스티브 라이히 음악에 대한 네 가지 움직임>를 만들었는데 이 중의 한 편이 <바이올린 페이즈, Violin Phase>이다.

 

이 곡은 처음부터 끝까지 반복되는 하나의 기본음형패턴 위에 그것으로부터 파생된 음형들이 반복되어 쌓여나가는 복잡한 구조를 갖고 있다. 그러다보니 소리는 중첩되고 미세하게 어긋나서 충돌하는 음향으로 점철된다. 춤은 점진적으로 변모하는 음악 구조와 음향을 공유하면서도 한정된 공간의 수직과 수평을 정교하게 사용하며 입체감 있는 움직임을 보여준다. 음악의 구조보다 더 치밀하게 계산된 동선의 시퀀스는 쌓이고 펼쳐져서 마지막에 기하학적인 무늬를 그려낸다. 여기서 우리는 음악의 반복이 움직임과 의미를 창조하는 동력이자 재료라는 사실을 넘어 움직임을 축적하고, 독자적인 무늬를 그려 나가는데 일조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영상2).

 

(영상2. <바이올린 페이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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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 왼쪽은 2018년 키어스메커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바이올린 페이즈>를 공연했던 모습과 마지막에 남겨진 무늬이며, 오른쪽은 그 무늬를 도식화 한 것이다. 출처: 국립현대미술관/Wikimedia Commons)

 

 

음악이 기억되는 방식


음악학자 쉐링은 “음악작품은 울리는 현상으로서, 악보라는 고정된 객체로서, 내적 소유로서 존재”한다고 했다. 여기서 내적 소유란 청자가 음악을 들을 때 순수한 청각적 경험만으로는 음악을 간직할 수 없으며 다른 감각 기관의 경험과 합쳐질 때 기억 속에 깊숙이 저장될 수 있다는 의미로 읽힌다.

 

음악에서의 ‘반복’은 음악을 청각적으로 기억하게 하는 최적의 장치임은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반복되는 부분을 단순하게 여러번 청취한다해도 이는 겹겹이 둘러싸여 미로같이 얽혀진 기억회로의 표피에만 저장될 뿐이다. 그렇다면 기억 속에 깊숙이 저장된다는 것은 무엇일까. 어떻게 해야 가능한 것일까.

 

음악이 귀와 눈으로 동시에 감각될 때, 즉 청각과 시각적 경험이 결합될 때일 것이다. 음악과 결합한 춤 예술처럼. 굳이 춤 예술이 아니더라도 음악의 청각적 경험이 몸의 여러 감각적 경험과 합쳐져서 체화될 때 그러하다. 이때 몸의 여러 감각과 함께 각인될 수 있는 청각은 복제된 반복이 아닌 음악 안의 ‘살아있는 반복’, ‘유기적 반복’을 통해서만이 가능한 일이다. [畵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