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에 새겨진 이름들 (1)
이민희(음악평론가/음악학박사)
알파벳을 ‘계이름’으로 변환해 음악 안에 집어넣는 작곡기법은 오랜 시간 대중의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절대음악과 표제음악, 성악음악과 기악음악의 긴 줄다리기 안에서 ‘텍스트에 기반한 순수한 선율’이라는 독특한 영역을 가로지르기 때문이다. 음악이론가 자를리노(Gioseffo Zarlino, 1517-1590)는 이 기법을 ‘단어에서부터 유도해낸 주제’라고 설명하며 ‘소제토 카바토’(Soggetto Cavato)라 명명했다.[1] 이를테면 바흐를 의미하는 알파벳 “B-A-C-H”는 독일어 계명으로 “시♭-라-도-시”가 되는데, 이 음들을 작품 속 주요 선율 동기로 사용하는 것이다. 음악적 모노그램으로도 불리는 이 기법은 단어의 알파벳 중 계이름과 일치하는 것을 추려 음의 열로 만든다.
이와 같은 ‘글자와 음의 병치’가 시대를 불문하고 ‘사람의 이름’을 대상으로 했다는 점은 흥미롭다. 이 경우 음악은 단지 ‘이름’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발 더 나아가, 누군가를 연상시키거나 특정 인물에 대한 작곡가의 열렬한 마음을 드러내는 매개가 된다. 현장에서의 청취만으로는 그 ‘이름들’을 알아차리기 힘들지만, 나중에 숨겨진 이름을 찾아내고 확인함으로써 독특한 이해에 다다를 수 있다는 점도 청중의 구미를 자극한다. 작곡가도 이를 알고 있었을 터, 이 기법은 다양한 작곡가의 손에서 긴 시간 활용되어 왔다.
역사상 가장 유명한 후원자가 된 “에르콜레 1세”
데스테 가문의 에르콜레 1세(Ercole d'Este I, 1431-1505)는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 페라라 지방의 공작이다. 귀족의 후원으로 예술이 융성했던 시대를 상징하는 인물로, 최고의 작곡가였던 아그리콜라(Alexander Agricola), 오브레히트(Jacob Obrecht), 이삭(Heinrich Isaac), 빌라르트(Adrian Willaert)와 관계를 맺고 있었다. 사실 에르콜레 공작의 영향력을 가장 두렷하게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작곡가 조스껭 데 프레(Josquin des Prez, 1450-55년경-1521년)가 그의 이름을 따서 미사 <페라라의 헤르쿨레스 공>(Missa Hercules dux Ferrariae)를 쓴 것이다.[2] 이 작품을 통해 에르콜레 1세는 명실상부 역사상 가장 유명한 후원자로 남게 되었다.
조스껭의 삶 자체가 비밀에 싸여 있기 때문에 공작과 조스껭이 어떤 관계였는지, 이 작품이 몇 년도에 작곡되었는지는 명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공작의 비서가 남긴 편지 속에는 당시 플랑드르 지방에서 활동하던 조스껭이 “200두캇(ducats)을 요구하고, 이삭은 120두캇을 요구한다”며 궁정에 이삭을 고용할 것을 권하고 있다. 하지만 에르콜레 공작은 조스껭을 데려왔고, 1503년 거처를 옮긴 조스켕은 공작 밑에서 최고수준의 급여를 받으며 활동을 시작한다. 하지만 전염병을 피하고자 이듬해인 1504년에는 다시 프랑스로 돌아가며 공작 또한 1505년에 사망하게 된다.[3]
[사진 1] 에르콜레 1세 데스테의 초상 (출처: https://en.wikipedia.org/wiki/Ercole_I_d%27Este,_Duke_of_Ferrara )
미사의 제목으로 사용된 “Hercules Dux Ferrarie”(페라라의 헤르쿨레스 공)이라는 단어는 각각 “e, u, e, u, e, a, i, e”의 모음을 갖고 있는데 이것을 ‘도’의 옛 계명인 ‘ut’을 포함하여 유사한 발음을 갖는 계이름으로 변환하면 각각 “레(e), 도(ut), 레(e), 도(ut), 레(e), 파(a), 미(i), 레(e)”가 된다.[4] 이렇게 만들어진 선율이 미사곡 전체에서 등장하며 ‘정선율’로 사용된다. 이 경우 신을 찬미하기 위한 ‘미사’라는 장르에 신이 아닌 후원자의 이름이 제목에 등장하고 이를 정선율로 삼는 것이 사뭇 파격적이다. 이를테면 미사의 시작을 여는 ‘키리에’ 악장에서는 고음으로 “주여, 자비를 베푸소서”(Kyrie, Kyrie eleison)라는 가사를 길게 노래하는데, 이 선율이 바로 “레-도-레-도-레-파-미-레”의 계이름을 갖는다. 그리고 이 선율은 다른 악장에서도 주요하게 등장함으로써 작품 전체를 지배한다.
조스껭의 미사곡 <페라라의 헤르쿨레스 공> 첫 11마디의 악보 (출처: https://imslp.org/wiki/Missa_Hercules_dux_Ferrariae%2C_NJE_11.1_(Josquin_Desprez) )
이 곡을 시작으로 다수의 작곡가들이 존경하는 후원자나 왕의 이름을 작품 안에 넣었으며, 이로부터 음악에 ‘이름을 담는’ 긴 전통이 시작되었다. 이 경우 ‘음악에 새겨진 이름들’이란 작품의 음악적인 진행이나 표현과는 상관이 없는, 일종의 음악 외적 표식에 가깝다. [다음 글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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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Willi Apel, Harvard Dictionary of Music, Second Edition (Cambridge, Mass.: harvard University Press, 1970), 785, 김문자, “죠스껭의 『헤르큘레스』미사와 그 후예들: 쏘제토 카바토 기법에 관한 연구”, 『음악이론연구』, Vol.7 (2002), 103에서 재인용.
[2] https://en.wikipedia.org/wiki/Ercole_I_d%27Este,_Duke_of_Ferrara [2022년 2월 28일 접속].
[3] https://www.wikiwand.com/en/Missa_Hercules_Dux_Ferrariae [2022년 2월 28일 접속].
[4] Willi Apel, harvard Dictionary of Music, 785, 김문자, “죠스껭의 『헤르큘레스』미사와 그 후예들: 쏘제토 카바토 기법에 관한 연구”, 103에서 재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