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畵/音.zine vol.1] 한국의 현대음악 작곡가, 나운영
송주호 / 2022-02-17 / HIT : 620
한국의 현대음악 작곡가, 나운영
송주호
매년 의례적으로 탄생 100주년을 맞은 작곡가가 누구인지 살펴보곤 한다. 그러다 올해에는 매우 뜻깊은 두 한국 작곡가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바로 나운영(1922-1993)과 이상근(1922-2000)이다. 이 두 분은 교향곡, 협주곡과 같은 서양 고전 양식을 따라 작곡을 했다는 점, 그리고 서양의 새로운 작곡법을 시도하고 우리의 토양에 이식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이로써 두 분 모두 한국 초기 현대음악에 기여하신 공로가 매우 크다.
나는 2022년 3월 11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연주될 화음챔버오케스트라의 ‘고전의 유산 1: 교향곡의 예술’이라는 제목의 음악회 프로그램을 준비하면서 이 두 작곡가를 눈여겨 보았다. 요즘엔 한국 작곡가의 작품이 연주되는 것이 낯설지 않지만, 교향곡만큼은 무대에 거의 올려지지 않는 것을 아쉽게 생각했기에, 이 두 작곡가의 교향곡을 검토했다. 이상근 선생님은 일생을 걸쳐 고른 시기에 여섯 곡의 교향곡을, 나운영 선생님은 1958년부터 1974년까지 집중적으로 열네 곡의 교향곡을 작곡하셨다. 하지만 들어볼 수 있는 곡이 극히 제한되어있었고, 또한 우리가 기획한 2관 편성에 알맞은 작품이 없다는 것을 곧 알게 되었다. 이 때문에 고심하던 중, 나운영 선생님의 초기작인 <현악사중주 1번 ‘로맨틱’>을 확대하여 실내교향곡으로 연주하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필자의 제안을 나운영기념사업회측이 받아들여 이번 연주가 성사되었다.
화음챔버오케스트라의 전신인 ‘실내악단 화음’이 나운영 선생님이 작고하신 1993년에 탄생했으니 단 한 곡도 위촉할 수가 없었지만, 그분께서 탄생하신 3월에 100주년 기념 연주를 할 수 있게 되어 더욱 뜻깊다. 그분의 생애와 음악에 대한 정보는 나운영기념사업회의 홈페이지(http://www.launyung.co.kr)에 본인과 여러 음악학자들이 작성한 매우 유용한 자료를 찾을 수 있었으며, 이외에도 권오향 선생님의 글 ‘나운영의 작품세계: 한국음악의 토착화와 현대화를 위하여’(낭만음악 18호, 1993)와 ‘한국음악 20세기 1’(세종출판사, 2013)에서 홍정수 선생님의 글을 찾을 수 있었다. 이 글들을 토대로 나운영 선생님의 삶과 음악을 간단히 정리해보았다.
나운영의 삶
작곡가 나운영 선생님은 1922년 3월 1일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국악에 조예가 깊었던 아버지로부터 다섯 살 때부터 양금을 배웠다. 하지만 아버지는 2년 후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때부터는 아버지의 유성기로 음악을 듣곤 했는데, 이때 들었던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은 그에게 서양음악에 눈을 뜨게 했다. 어린 시절부터 작곡을 곧잘 시도했던 그는, 중앙중학교를 다니던 1936년에 손기정의 마라톤 우승을 보고 작곡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해에 현재도 불리고 있는 그의 첫 작품인 가곡 <아! 가을인가>를 작곡했으며, 자신이 지휘하는 학교의 밴드를 위하여 <중앙행진곡>을 작곡하여 연주했다. 중학교를 졸업한 해인 1939년 12월에 가곡 <가려나>가 동아일보 주최 신춘문예에서 단 한 차례 열린 작곡부문에 당선되어, 가족의 반대를 이기고 이듬해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본격적으로 음악의 길을 내딛었다. 그는 동경제국고등음악학교의 본과와 연구과에서 히라오 기시오(平尾貴四男)과 모로이 사부로(諸井三郞)로부터 배우면서 버르토크의 <현악사중주 1번> 등 근현대 음악에 심취하면서, 서양음악을 추종하지 말고 민족적 음악을 세울 것을 강조했던 모로이 선생의 말씀을 마음에 새겼다.
나운영 일본유학시절 교우들과. 앞줄 왼쪽 나운영. 1940년대 후반 (c)나운영기념사업회
아직 연구과에 재학 중이던 1943년에 태평양전쟁으로 급거 귀국한 그는, 채동선 현악사중주단, 경성후생악단, 올포이스 사중주단의 첼로 연주자로 활동하면서 조선정악전습소에서 민완식 선생으로부터 양금 교습을 받는 등, 민족과 서양이 균형을 이루는 음악적 방향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당시 스트라빈스키의 <결혼>에 심취했던 것도 이러한 그의 지향점과 관련이 있다.
그는 이후 여러 분야에서 대단히 많은 활동을 이어갔다. 서양음악계에서는 1952년에 한국현대음악협회를 창립하고, 1957년에 국제현대음악협회(ISCM) 한국지부장이 되었다. 1974년에는 미국 국무성의 초청으로 포틀랜드 대학교 교환교수로 강의하기도 했다. 전통음악 부문에서는 1946년에 민족음악연구소를 창립했으며(현재의 ‘민족음악학회’의 전신인 ‘민족음악연구소’는 1991년에 창설된 학술단체로, 나운영의 민족음악연구소와는 다른 단체이다.), 1954년에 동덕여대 국악부를 창설하고, 1959년에 동자아악단을 설립했다. 1966, 67, 70년에 제주도 민요를 채보했던 그는 1973년에는 제주도에 한국민속음악박물관을 설립했다. 하지만 지금은 소장자료들이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예술자료원에 기증된 상태이다. 또한 일생 동안 교육자였다. 1945년에 모교인 중앙중학교의 교사가 되었으며, 한국전쟁 중에는 부산에 피난 중에 작곡 교실을 열었다. 이영자 선생님이 이곳에서 작곡 공부를 시작했다고 한다. 1958년에 대한예술교육회 회장을 지냈으며, 이후, 서울대, 이화여대, 숙명여대, 덕성여대, 연세대, 목원대, 세종대 등 여러 학교에서 학생들을 지도했다. 이외에도 여러 기관에서 많은 직함을 가지고 음악의 여러 부분에서 열정을 쏟았으며, 1000곡이 넘는 찬송가와 성가곡을 작곡하여 한국교회음악의 역사에 중요한 인물로 기억되고있다.
나운영의 음악
나운영의 음악은 동경 유학 시절 스승인 모로이 사부로의 말씀을 기억하면서도, 1956년에 프랑크 마르탱에게 보낸 생일 축하 편지에 대한 답장으로 한국의 민족음악을 창조하고 발전시킬 것을 충고했다. 이로부터 나운영은 ‘선토착화, 후현대화’라는 슬로건으로 작곡에 임하게 된다. ‘선토착화’란, 서양음악이 우리의 음악 환경을 지배하고 전통음악은 낯설게 된 상황에서, 먼저 전통음악이 익숙해지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운영은 이를 위해, 어학을 배우려면 국어를 먼저 배우고, 역사를 배우려면 국사를 먼저 배워야 하듯, 음악도 전통음악을 먼저 배워야 한다고 강조하며, 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리고 ‘후현대화’란, 이러한 전통음악의 토대 위에서 창조적이고 현대적인 감각의 음악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자국의 전통을 현대화함으로써 세계적인 음악을 만들어낸 헝가리의 버르토크와 코다이, 리게티를 예로 들기도 했다. 이러한 생각은 그의 일생토록 바뀌지 않았다. 1993년 ‘아세아연구’ 26호에 기고한 ‘해방 후 한국에 미친 미국음악의 영향과 그 반응’에서 이렇게 결론을 맺고 있다. “우리는 첫째로 고유 음악을 계승해야 하고, 둘째로 외국 음악을 수입해야 하고, 셋째로 고유 음악을 발전시켜야겠다. ... 첫째와 둘째의 그 순서가 바뀌어서는 안 될 것이며, 둘째와 셋째 순서가 바뀌어도 안 될 것은 자명한 이치이니, 이 세 가지 방법만이 우리가 취해야 할 올바른 자세라는 것을 나는 거듭 강조하는 바이다.”
나운영 이화여자 예술대학 음악과 학생들과. 1950년대 초 (c)나운영기념사업회
나운영은 자신의 음악을 세 시기로 나누었다. 제1기는 1942년부터 1954년까지 “한국적인 것을 의식적으로 추구했던 시절”이다. 동경에 있을 때 작곡한 <어린이를 위한 이국풍 조곡>(1942)은 여러 민속음악을 적용해보고, 졸업작품인 <현악사중주 1번 ‘로맨틱’>(1942)은 베토벤과 슈베르트의 방식으로 작곡해보는 등, 학업을 정리하는 성격에 가까워 보인다. 그러다 귀국한 후부터 앞서 언급한 특징이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의 진정한 ‘작품 1’이라고 할 수 있는 <첼로 소나타 1번 ‘고전’>(1946)은 민요조의 선율과 장구의 장단이 사용되었고, 가곡 <접동새>(1950)는 판소리가 녹아있다.
제2기는 1955년부터 1979년까지로, “한국적인 아이디어를 현대적인 스타일로 표출하기 위해 몸부림쳐온 시절”이다.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산조>(1955)는 산조의 장단과 5음음계로 구성되었으며, <바이올린 협주곡 2번>(1968)에서 바이올린은 해금을, <피아노 협주곡 3번>(1970)은 피아노가 가야금과 거문고를 모방한다. 교회에서 일반 신자들을 대상으로 작곡된 <크리스마스 칸타타>(1956)는 오히려 진통음악적인 표현 때문에 반발을 불렀다는 것을 생각하면, 오히려 나운영의 생각이 옳았음을, 그리고 그 시도가 필요함을 방증한다.
이러한 활동의 이면에는 여러 현대적인 작곡법을 사용하며 그 효과를 실험했던 것도 놓쳐서는 안된다. 피아노곡 <여섯 개의 전주곡>(1955)은 한국인이 작곡한 최초의 12음 기법 작품이며, <여덟 명의 연주자를 위한 시나위>(1965)는 복조성을, <교향곡 5번>(1965)은 음렬주의를, <교향곡 7번 ‘성경’>(1968)은 우연성을, <교향곡 10번 ‘천지창조’>(1972)는 그래픽악보를 사용했다.
서울시 문화상(음악) 수상. 1966년 (c)나운영기념사업회
이러한 다양한 시도와 연구를 통해, 그는 한국적 현대음악을 위한 이론 체계를 구축했다. 리듬은 전통 장단을 변형하거나 합성하여 구성하고, 전통 음계인 5음음계와 7음음계를 토대로 ‘양음계’와 ‘음음계’를 제시했다. ‘양음계’는 익히 잘 알려진 5음음계와 장음계이며, ‘음음계’는 5음음계에서 둘째 음과 다섯째 음을, 장음계에서는 둘째 음과 여섯째 음을 반음 낮춘 것으로, 나운영은 이 음음계를 ‘한국 음계’라고 부르며 중요하게 여겼다. 그리고 이 음계를 바탕으로 만든 완전4도와 완전5도가 결합된 화성을 ‘한국 화성’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약간의 변칙과 활용형을 통해 화성 체계를 확립했다. 이것은 김순남과 윤이상의 초기 가곡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나운영은 한국이라면 본능적으로 공감하는 우리의 소리를 체계화한 것이다.
제3기는 1980년 이후로, “구태여 한국적인 것이나 현대적인 것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작곡하면서 이론서 등의 저술활동에 매진한 시기이다. 이 시기에는 <12개의 전주곡>(1989)과 몇 개의 가곡을 제외하고 찬송가를 비롯한 성가 작곡에 집중했다. 사실 그가 1000곡 이상 작곡할 정도로 말년에 성가에 몰입한 것은, 장로이자 성가대 지휘자이며, 교회를 개척했음도 1968년에 발행된 원불교 찬불가에 열한 곡을 작곡했다는 이유로 교계에서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이며, 그의 찬송가는 회개의 표현이라는 견해가 있다. (문성모, ‘찬불가 작곡가 나운영을 어찌할꼬’, 기독교사상 705호, 2017. 9.)
역사의 연결고리
클래식 음악을 전공했다면 응당 서양의 음악을 공부했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유럽이나 미국 등지의 작곡가들과 역사, 음악 이론을 줄줄이 꿰며 그들의 작품을 열심히 연주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한국의 음악가라면 이 땅에 클래식 음악이 있게 한 역사를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 역사는 우리가 서양의 음악을 얼마나 잘하게 되었는가가 아닌, 우리가 서양의 음악가들과 어떻게 다른가를 알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나운영은, 그리고 그 세대들은, 우리가 잃어버린 전통과 우리가 배우고 있는 음악을 연결하고 있는 역사의 연결고리이기에, 반드시 기억되고 무대에 올려져야 한다. [畵音]
나운영 (c)나운영기념사업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