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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통로 vol. 3] 우리는 왜 음악과 춤을 함께 얘기하는가: 차이가 만들어 낸 사건
이소연 / 2026-09-01 / HIT : 195

우리는 왜 음악과 춤을 함께 얘기하는가

: 차이가 만들어 낸 사건

 

이소연

(음악·무용평론가/음악학박사)

 

 

  춤, 즉 무용은 다른 어떤 예술보다도 음악과 가까이 놓여 온 예술이다. 16세기 후반부터 17세기에 이르기까지 파사칼리아, 샤콘느, 사라방드처럼 음악과 무용이 형식 자체를 공유했던 역사가 있고, 리듬·박자·프레이즈 같은 용어를 지금도 두 예술이 함께 쓰고 있다. 이런 사실들을 보면 음악과 무용은 마치 그 본질마저 같은 예술처럼 보인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음악과 무용은 애초에 서로 다른 방식으로 각자의 세계를 조직해 왔다. 바로 그 차이를 정면으로 들여다보아야 비로소 이 둘이 만났을 때 실제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를 입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이 글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두 가지다. 첫째, 음악과 무용은 각각 시간성과 공간성이라는 서로 다른 축 위에서 설계된 예술이라는 사실이다. 물론 음악에도 공간성이 있고, 무용에도 시간성이 있기 때문에 이 구분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다만 각 예술이 자신의 구조를 세우는 중심 원리가 어디에 있는가를 보면, 그 차이는 비교적 뚜렷하게 드러난다. 둘째, 그 차이에도 불구하고, 혹은 바로 그 차이 때문에 이 둘이 결합할 때 더욱 흥미롭고 복합적인 예술적 경험이 만들어진다.

 

 

  시간을 짓는, 음악

 

  음악은 시간예술이라 불린다. 이 말은 음악이 시간 속에서 흘러간다는 단순한 사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음악이 시간 그 자체를 재료 삼아 구조를 짓는다는 뜻에 가깝다. 회화가 캔버스라는 이차원 평면 위에 형태를 배치하는 것이라면, 음악은 시간이라는 축 위에 소리를 축조해 나가는 일이다.

 

  박(pulse)과 박자(meter)는 그 축에 눈금을 새기는 작업이고, 리듬은 그 눈금 사이의 거리를 소리와 침묵의 길이로 채워나가는 문법이다. 조성 음악에서 긴장과 해소의 화성적 서사는 시간의 흐름에 방향성을 부여한다. 딸림화음이 으뜸화음을 향해 나아가야 할 것 같은 그 감각이 시간을 앞으로 밀어내는 힘이 된다. 박에 대한 우리의 지각 자체가 예측적이고 신체적인 시간 경험에 가깝다는 것은 음악 인지 연구에서 널리 논의되어 온 관점이며, 이 관점에 따르면 음악은 예측과 그 예측이 맞아 들어가거나 어긋나는 과정이 반복되며 만들어진 예술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음악에서의 공간성은 상당 부분 은유의 형태로 내재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높은 음, 낮은 음, 음향의 공간감 같은 공간적 어휘를 별다른 의식 없이 빌려 쓰는데, 인지언어학의 개념적 은유 이론에서 보자면 이러한 언어 사용은 단순한 수사적 장식이 아니다. 추상적 개념을 이해할 때 우리는 근본적으로 신체적 경험에서 비롯된 이미지를 빌려 쓰고 있다. 예를 들어 "음이 올라간다 혹은 내려간다"는 식의 표현은 그런 인지적 사상(mapping)이 언어뿐 아니라 실제 지각 과정에도 작동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다시 말해 음이 높고, 낮다고 얘기하는 것은 우리가 음악을 공간적으로 개념화하는 인지적 경향의 흔적일 수 있다. 

 

  그럼에도 음악은 청자가 몸을 움직이지 않아도, 심지어 눈을 감고 있어도 소리와 시간만으로 하나의 완결된 예술로 성립될 수 있다는 점에서, 실제 몸과 공간이 있어야만 이루어지는 무용과는 층위가 다르다. 정리하자면 음악이 시간예술이라는 것은 음악에 공간성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음악이 그 세계를 조직하는 중심 원리가 시간에 있다는 뜻이다.

 

 

  공간을 그리는, 무용

 

  무용은 이와는 결이 다른 존재 방식을 갖는다. 무용의 일차적 재료는 신체와 그 신체가 점유하는 공간이다. 예를 들어 무용수가 무대의 어느 지점에 서 있는지, 다른 무용수와의 거리는 얼마인지, 팔다리가 그리는 궤적이 어떤 방향성을 갖는지 등의 요소들이 무용의 기본 문법을 이룬다.

 

  무용 동작을 체계적으로 분석해 온 루돌프 라반(Rudolf Laban)의 이론에서는 신체를 둘러싼 가상의 구 형태 공간을 '키네스피어(kinesphere)'라 부르는데, 이는 신체가 팔다리를 뻗어 실제로 닿을 수 있는 개인적 공간의 범위를 뜻한다. 무용수의 동작은 이 키네스피어 안에서 신체와 공간 사이의 관계를 그려나가는 일이다.

 

  동시에 무용은 시각예술이 쉽게 갖지 못하는 것을 지니고 있다. 이는 한 화면 안에 여러 정보를 동시에 펼쳐놓을 수 있는 병치성이다. 회화가 정지된 병치라면 음악은 순차적 전개에 가깝고, 무용은 그 사이 어딘가에서 여러 신체가 같은 순간에 서로 다른 위치와 자세로 공존하는 것을 허용한다. 관객의 시선은 무대 좌측의 군무와 우측의 독무 사이를 한 번에 오갈 수 있다. 반대로 음악은 한 순간에 대체로 하나의 흐름이 제시되며 '여기와 저기'를 동시에 병치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무용의 이러한 특성은 무용이라는 세계가 짜이는 중심축이 공간에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무용에서 시간은 어떻게 존재하며, 음악의 시간과는 어떻게 다를까.

 

 

  시간을 다루는 두 가지 방식

 

  흥미로운 것은 무용의 이론 체계 안에도 '시간'이라는 요소가 이미 자리 잡고 있다는 점이다. 움직임의 질(effort)은 공간(직접적/간접적), 무게(강함/약함), 시간(갑작스러움/지속적), 흐름(통제된/자유로운)이라는 네 가지 요인의 조합으로 설명되곤 한다. 여기서 '시간' 요인은 음악의 박자처럼 규칙적으로 매겨진 시계의 시간이 아니라 동작이 갖는 질적인 긴급함이나 여유로움을 말한다. 즉 갑작스럽게 몰아치는 동작인지, 느긋하게 늘어지는 동작인지를 가리키는 것이다.

 

  이 차이를 조금 더 설명하면 이렇다. 음악에서 시간은 대개 외부에서 먼저 주어진다. 박자표가 정해지고 템포가 지정되면 그 규칙적인 눈금 위에 음들이 얹힌다. 연주자는 그 눈금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한도 내에서 미세한 뉘앙스를 더할 뿐 시간의 틀 자체는 악보라는 외부 구조가 먼저 정해 놓은 것이다.

 

  반면 무용에서 시간은 신체 내부의 물리적 조건으로부터 흘러나온다. 팔을 뻗는 동작 하나를 생각해보면 그 동작이 얼마나 걸리는지는 관절의 가동 범위와 근육의 힘, 무게중심의 이동과 같은 몸 자체의 조건에 의해 정해진다. 무거운 물체를 드는 동작과 가벼운 종이를 흔드는 동작은 똑같이 '2초'라는 시간 안에 담길 수 있어도, 그 안에서 체감되는 시간의 밀도는 다르다. 하나는 느리고 무겁게, 다른 하나는 가볍고 빠르게 느껴진다. 무용의 시간은 몸이 처한 물리적 조건이 매 순간마다 만들어내는 결과로, 악보처럼 미리 고정된 틀 위에서만 흘러가는 것은 아니다.

 

  호흡 역시 중요하게 고려되어야 할 대상이다. 많은 무용 훈련에서 동작의 시작과 끝은 호흡의 들숨과 날숨에 맞춰 조직되는데, 이때 호흡은 심장 박동처럼 신체 내부에서 자연스럽게 되풀이되는 리듬이다. 그래서 무용에서 말하는 '프레이징'은 음악의 프레이즈처럼 악보 위에 미리 고정되어 반복 가능한 것이라기보다 힘이 모였다가 풀리는 곡선, 즉 에너지의 축적과 방출이 매번 새롭게 그려내는 궤적이라 할 수 있다.

 

  물론 무용도 시간 속에서 일어나는 예술이다. 몸은 정지해 있을 수 없고, 동작은 지속되기 마련이다. 다만 그 시간은 음악처럼 미리 나누어 잴 수 있는 단위가 아니라 몸이 이동하고 방향을 바꾸며 힘을 축적하고 풀어내는 과정 그 자체에서 발생한다. 무용 그 자체만 두고 보면, 무용의 시간은 신체의 움직임에 앞서 주어지는 틀이 아니라, 뒤따르는 결과로 이해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

 

  그러나 무용은 대개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무용의 시간은 음악과 만날 때 또 다른 방식으로 조직된다.

 

 

  만남, 하나의 사건

 

  음악과 무용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그들의 세계를 조직한다. 음악은 시간을 따라 흘러가며 구조를 만들고, 무용은 공간 속에 펼쳐지며 구조를 만든다. 그러나 이 차이는 오히려 음악과 무용의 관계를 특별하게 만드는 중요한 조건이 된다.

 

  음악과 무용이 함께 놓이는 순간 음악의 시간은 더 이상 귀로만 경험되지 않는다. 리듬과 박자, 프레이즈와 강세는 신체의 움직임을 통해 눈앞에 나타난다. 소리의 흐름 속에서는 지나가 버리는 순간이 무용수의 몸을 통해 잠시 사로잡힌다. 관객은 음악을 듣는 동시에 그 음악의 시간적 구조를 몸의 변화와 공간의 배열을 통해 볼 수 있다. 음악의 시간은 신체를 만나면서 공간적 형태를 얻게 된다.

 

  반대의 경우도 흥미롭다. 앞서 얘기했듯이 무용 그 자체로서는 시간의 경계를 미리 구분 짓기 어렵다. 그러나 음악과 만나는 순간 무용은, 동작이 언제 시작되고 언제 끝나야 하는가에 대한 시간의 경계를 음악으로부터 빌려올 수 있게 된다. 더 나아가 음악의 구조, 형식과 같은 큰 틀뿐만 아니라 세부적인 요소들도 동작을 만드는 재료가 된다. 때로는 음악의 작곡 원리 자체가 안무적 아이디어로 고스란히 옮겨가기도 하고, 음악이 불러일으키는 정서나 감정이 움직임의 서사를 만드는 동력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하지만 음악이 정해준 시간의 경계 안에서 그 내용을 채우는 것은 여전히 무용 고유의 몫이다. 같은 박자라도 그 안을 무겁고 뭉근하게 채우는 몸이 있고, 가볍고 날카롭게 채우는 몸이 있다. 음악은 시작과 끝을 정해줄 수는 있어도 그 안에서 몸이 느끼는 무게와 속도, 긴장의 질감까지 결정하지는 못한다. 이 질감이야말로 무용이 몸을 통해 스스로 지켜내는 고유한 공간성이다. 몸은 음악이 건네는 시간의 경계를 받아들이면서도 그 경계 안을 채우는 방식만큼은 자신의 것으로 남겨둔다.

 

  이와 같이 음악과 무용, 각각이 지닌 고유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음악의 시간성과 무용의 공간성이 서로 교차하는 과정은 두 예술이 만났을 때 일어나는 가장 근본적인 사건임에는 분명하다.

 

  다만 이 주고받음이 음악과 무용의 완전한 일치를 뜻하지는 않는다. 다시 말해 음악이 움직임으로 그대로 번역되거나 움직임이 음악을 그대로 보여주어야 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음악과 무용의 관계가 가장 흥미로워지는 순간은 둘이 완전히 포개지지 않을 때일 수 있다. 음악의 리듬과 움직임의 리듬이 미세하게 어긋날 수도 있고, 음악이 만들어내는 정서와 신체가 보여주는 모습이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할 수도 있다. 음악은 빠르게 흘러가는데 움직임은 느리게 지속될 수 있고, 반대로 음악은 정지해 있는 듯하나 신체는 격렬하게 움직일 수도 있다.

 

  이러한 어긋남은 단순한 불일치가 아니다. 두 예술이 서로 다른 존재 방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또 하나의 관계 방식이다. 음악과 무용이 완전히 일치할 때 우리는 하나의 통합된 흐름을 경험하게 되는 데 반해, 둘 사이에 차이가 생길 때에는 동시에 두 개의 감각적 층위를 경험할 수 있다. 귀는 하나의 시간을 따라가고 있지만 눈은 다른 시간의 흐름을 보게 된다. 또한 음악은 우리에게 특정한 정서를 기대하게 만들지만 신체는 그 기대를 거스르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온다. 음악과 무용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그들의 세계를 조직하는 예술임에도, 왜 그토록 오랫동안 나란히 놓여왔는가. 우리는 왜 음악과 무용을 함께 얘기하고 있는가. 답은 음악과 무용의 차이가 만들어내는 그 '무엇'에 있다. 시간을 짓는 예술과 공간을 그리는 예술이 마주할 때, 그 자리에는 어느 한쪽으로도 환원되지 않는 하나의 사건이 발생한다. 이 사건은 어느 한쪽만으로 성립되는 것이 아니며, 둘이 마주하는 매 순간 새롭게 발생해 고유한 경험으로 되돌아온다. 우리가 음악과 무용을 여전히 함께 이야기하는 이유는 바로 이 되풀이되지 않는 사건을 매번 '듣고, 보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畵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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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문헌

Lakoff, G. & Johnson, M. 『삶으로서의 은유』(Metaphors We Live By). 노양진, 나익주 역. 서울: 박이정, 2006.

Laban, R. The Mastery of Movement. revised by L. Ullmann. England: Northcote House,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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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발란신 《아곤》  (출처: https://www.miamicityballet.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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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나 바우쉬 《Nelken》 (출처: 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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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나 바우쉬 《봄의 제전》 (출처 : pinte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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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스 베자르 《볼레로》 (출처: pintere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