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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화음 평론상 입상작] 게임의 규칙
신예슬 / 2015-01-05 / HIT : 1315

<2014 화음 평론상 입상작>

 

   게임의 규칙 

 

2014 화음 프로젝트 Day 7. The Manual 2014. 11. 13

사운드 디자이너 이호용의 <Blueprint>

화음프로젝트 Op. 140  

​-신예슬

 

  

  게임에는 규칙이 있어야한다. 규칙은 참여자에게 행동의 제약을 만들어낸다. 매뉴얼 展, 오산문화공장에서 열린 이 전시에서는 매뉴얼에 의해 만들어진 작품들이 전시된다. 展, 펼 전의 한자 뜻에는 ‘펴다’, ‘늘이다’라는 뜻도 있지만 ‘벌이다’, ‘뒹굴다’라는 뜻도 있다. 작가들은 매뉴얼이라는 규칙을 제시해 그 누구도 지지 않고 누구도 이기지 않는 일종의 예술게임 판을 벌인다. 

 

 재료는 다음과 같다. 목재 판, 종이, 적포도주 1병, 페인트, 탁구공, 고무공, 꽃다발, 감자, 끈, 연예인 잡지 등. 이 재료들을 바탕으로 작가는 매뉴얼을 만들어낸다. 이 재료들을 어떻게 구성composition할 것인가? 작가는 작곡가가 어떤 악기로, 어떤 음으로 곡을 쓸 지 정하듯 재료들로 어떤 결과물을 만들지 정한다. 악보처럼 지시사항으로 가득 찬 매뉴얼이 완성된다. “빈 전시장 바닥에 카트리지 종이 롤을 펼쳐놓는다. … 그 위에 감자를 약 20개 정도 놓는다. … 고무공을 지정된 위치에 놓는다.” 등. 총 20개의 작품이 같은 재료와 다른 매뉴얼을 통해 만들어졌다. 오산문화공장의 2주년 기념전인 매뉴얼展에서 작가는 상황과 행동의 규칙, 그 작품의 룰을 제작한다. 만들어진 매뉴얼은 오산시민들의 손으로 넘어간다. 시민들은 그 매뉴얼에 따라 작품을 실제로 제작한다. 17개의 오브제가 완성되었고, 3개의 퍼포먼스가 기획되었다. 그 중 하나가 이호용의 <청사진> 이다. 미술전시에서는 보통 완성된 오브제가 전시된다. 그러나 매뉴얼展에서 작가들이 만든 것은 각 작품의 매뉴얼이었고, 이는 완수해야 할 게임의 미션처럼 시민들에게 주어진다. 기획과 제작의 분리, 이는 음악에서 너무나 당연한 것들이었다. 작가는 매뉴얼만을 제작하고 작품에 이름을 붙인다. 이 매뉴얼에 따라 작업을 수행하는 이들performer은 오산시민들이다. 악보를 그리는 작곡가와 이를 수행하는 연주자처럼. 

 

음악의 방식으로 만들어진 작품들이 미술의 방식으로 전시된다. 결국 재료는 보이는 사물들이고, 작품들은 갤러리에 있다. 8분가량의 짧은 전자음악 퍼포먼스로 선보여졌던<청사진>은다른 오브제 작품과는 다른 나름의 독자적 원리로 만들어졌다. 재료를 있는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어떤 퍼포먼스를 통해 재료의 소리를 얻고 그 소리로부터 다시 작업을 시작하는 것. 전시되고 있는 오브제들이 하나의 매뉴얼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면 이호용의 <청사진>은 두 개의 매뉴얼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재료로부터 소리를 얻어내기 위한 첫 번째 매뉴얼, 그로부터 얻은 소리조각들을 조합하는 두 번째 매뉴얼. 이호용이 구상한 첫 번째 규칙은 시민들에 의해 이루어지는 ‘소꿉놀이’였다. 시민들이 이 재료들을 가지고 소꿉놀이를 하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소리들은 재료 본연의 소리, 재료들끼리 맞부딪히며 만들어지는 소리, 소꿉놀이를 하며 만들어지는 어떤 리듬이다. 이호용은 이 게임의 규칙 하에서 만들어진 소리들을 다시 재료로 삼아 2번째 규칙에 따라 배열했다. 만들어진 소리들을 그제야 정교하게 디자인한다. 소리의 <청사진>을 그린다. 그러나 <청사진>은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다. 들려진다. 

 

소꿉놀이를 통해 얻은 소리들은 다음과 같다. 재료 자체가 가진 고유한 소리와 소꿉놀이를 하며 만들어지는 소리 패턴. (물론 선율을 기대하긴 어렵다.) 고유한 소리로부터는 음색과 음향을 얻고, 소리 패턴으로부터는 리듬을 얻는다. 재료들은 ‘음'으로 들릴만한 소리들을 만들어냈다. 탁구공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 연필이 사각거리는 소리, 사람들이 움직이는 소리. 여기서 비롯되는 패턴들은 상당히 리드미컬하다. 탁구공이 떨어지며 바닥에 여러 번 튕길 때 점차 빨라지는 리듬, 재료들이 이동하며 소리도 함께 이동하는 것. 점차 커지고 작아지는 소리들. <청사진>에서 재료들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의 귀에 더욱 친밀하게 다가온다. 약 8분의 짧은 퍼포먼스는 이미 갤러리에 오브제로 만들어져 놓여있는 것보다 훨씬 더 촉각적으로 재료에 대해 잘 느끼게 했다. 고정되어있는 오브제가 아니라 변화무쌍하게 살아 움직이는 소리들은 보는 것만으로는 알 수 없는 그 재료의 성질을 드러낸다. 

 

 소꿉놀이를 통해 얻은 소리들은 다음과 같은 규칙에 의해 재배열된다. (소꿉놀이 이후 퍼포먼스에서 들려질 소리를 구성하는 두 번째 규칙은 작품이나 프로그램노트에 전면적으로 드러나 있지 않다.) 첫째, 작품의 앞부분에서는 각 재료의 소리와 음향에 초점을 맞춰서 이것들을 들려준다. 각 재료들이 무엇이고 어떤 소리를 가지고 있는지 하나씩 들어 보여주는 듯하다. 둘째, 작품의 뒷부분에서는 조금 더 폴리포니적인 특성이 드러나게 소리재료들을 중첩시키고, 리듬을 세분화한다. 텍스쳐를 수직적으로, 수평적으로 늘인다. 그러나 앞부분과 뒷부분이 정확히 나뉘는 것은 아니다. 마치 재료를 하나하나씩 가져와서 붙여나가기 시작하는 꼴라주처럼 작품의 음향은 점차 넓어지고, 두터워지고, 복잡해진다. 

 

 작업의 테마는 매뉴얼뿐만이 아니었다. 매뉴얼을 통해 생겨나는 매뉴얼의 전과 후, 즉 재료와 노동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큐레이터 존 칠버(John Chilver)는 이 전시를 통해 예술에서의 노동에 대해 생각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물론 만들어진 오브제를 보는 감상자에게 그 노동의 과정이 크게 느껴지지 않을 수 있다. 우리가 언제나 갤러리에서 보아왔던 완성된 오브제들이 존재할 뿐이니까. 하지만 퍼포먼스, 노동하고 있는 장면은 보다 직접적으로 다가온다. 어떤 결과물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무대라고 설정된 공간에서 수행자이자 노동자이자 연주자들은 일한다. 이호용의 작업에서 오산시민들은 소리재료를 만들어내는 1차 수행자의 역할을 했다. 결국 최종적으로 만들어진 소리재료를 다듬고 새로운 게임의 규칙을 만들어내서 전시장에 선보이는 2차 수행은 다시 작가의 몫이다. 작가는 마치 할 일을 묵묵히 진행하는 프로그래머-노동기계처럼 조용히 기계들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이호용은 “매뉴얼 작성부터 조립과정까지의 모든 행위 자체가 앞으로 벌어질 일들에 대한 청사진으로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작품제목을 <청사진>이라 삼았다고 밝힌다. 여기서 작가가 결국엔 시간 위에 펼쳐질 것들에 시각적인 제목을 붙였다는 점은 퍽 흥미롭다. 음악의 방식으로 만들고 미술의 방식으로 선보이는 이 작품들 중에서 이호용의 작업은 음악의 방식으로 경험되고 미술의 방식으로 이해된다. 이호용이 이 작업에서 작곡가(composer)가 아니라 사운드 디자이너(sound designer)라는 말을 선택한 것은 매뉴얼展과 잘 어울린다. 디자인이라는 말은 지시하다, 표현하다, 성취하다라는 뜻을 가진 라틴어 데시그나레(designare)에서 유래한다. 이 작업에서 작가는 소리를 구성하는 자가 아니라 소리를 지시하는 자이다. 소리를 지시하는 것. 소리를 디자인하는 것. 일견 음악의 재료를 미술의 방식으로 다루는 것처럼 보인다. 매뉴얼 展의 전체 기획과 맞닿은 지점이기도, 혹은 역의 관계이기도 하다. 

 

 <청사진>에서 작품의 주체는 누구이며,우리는 어디까지를 ‘한 작품’이라 말할 수 있을까?작품을 둘러싼 요소들,매뉴얼과 노동,그리고 퍼포먼스.음악에서 작품의 존재에 대해 논하는 문제는 언제나 골칫덩어리였다. 매뉴얼이라는 지시사항의 존재를 통해 미술이 그 질문을 이어받았다. 미술에 있어서 작품은 ‘그 오브제(the object)’였다. 그것이 해체된 순간, 미술과 음악은 같은 고민에 빠진다. 이 작품은 무엇인가, 어디에 있는가, 누구의 것인가. 미술이 매뉴얼이라는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음악은 음악의 방식으로 화답했다. 소리의 청사진을 그린다. 그리고 이를 시공간 위에 펼쳐놓는다. 우리가 경험할 수 있도록. 

 

 

 

 

신예슬 arp273@naver.com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이론전공 석사과정.

제15회 객석예술평론상 우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