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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화음 평론상 입상작] 이현주의 <바인>(Vine), 넝쿨의 영속성에서 피어난 음악
이민희 / 2011-12-01 / HIT : 1224

<2011 화음 평론상 입상작>

이현주의 <바인>(Vine), 넝쿨의 영속성에서 피어난 음악

 

 

​이민희

 

 

일상의 많은 음악청취는 시각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우리는 음악이 홀로 존재한다는 절대음악 연주회에서도 연주자들을 응시하고 있다. 베토벤의 심포니를 들으면서도 그 선율의 흐름과 프레이즈를 도형으로 연상시켜 본 적이 있다. 영민한 예술가는 특정 화음에서 색을 보기도 한다. 이토록 일상에서 시각과 청각의 연계는 자연스럽다. 이러한 상황에서 ‘음악과 미술의 만남’이라는 주제로 펼쳐지는 화음프로젝트 연주회는 눈과 귀를 적극적으로 이용해 감상할 수 있는 시청각 축제의 장이다. 11월 중순 스페이스 C에서 열린 음악회의 관객들도 마찬가지였다. 관객들은 손바닥만 한 팸플릿에 그려진 그림을 보며 연주되는 곡과의 연관성을 끊임없이 떠올렸다. 그리고 연주되었던 몇몇 작품 중 단연 돋보였던 것은 이현주의 <바인>(Vine for flute, clarinet and cello, Hwaum Project Op.82, 2009) 이었다.

 

이현주의 <바인>은 미술과 음악의 단순한 병치를 넘어 팸플릿 속 작은 넝쿨 그림을 증폭하고 확장시켜 3차원의 공간으로 끌어낸다. 음악이 진행될수록 음향으로 가득 찬 갤러리는 4차원의 시간 축을 얻어 애초에 화가가 푸르스름한 넝쿨 그림을 그릴 당시에 떠올렸던 특정 관념을 되살려내고 있었다. 이현주의 음악은 어떤 연유에서 이와 같은 아우라를 만들 수 있었을까? 이현주의 작품과 그림의 어떤 연관성이 이토록 독특한 감상을 가능하게 하는 것일까?

 

이현주의 작품에서 남다른 시청각적 연상이 가능했던 이유는 몇 가지 측면에서 추측해 볼 수 있다. 먼저 작곡의 착상 단계에서 이현주 작곡가는 그림의 시각적인 요소와 화가의 작품 의도를 구체적인 음악 요소로 상정했다. 자신의 작곡 노트에 썼듯이, 작곡가는 그림 안의 넝쿨에서 ‘장식’이라는 요소와 ‘링’이라는 요소를 취했으며, 홍주혜 화가가 품고 있던 그리스도의 ‘영원성’이라는 개념에 집중했다. 이는 ‘장식’이라는 인상이 음악적인 ‘장식음’으로, ‘링’과 ‘영원성’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음악 형식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표현된다. 작품의 기본적인 디자인과 형식을 화가와 같은 관점에서 취하려는 노력은 이현주의 작품이 가지고 있는 힘의 근원이 된다. 이 지점에서 이날 연주된 다른 곡들, 이를 테면 임지선 작곡가의 ‘Memory of Footsteps’ 그리고 강은수 작곡가의 ‘Kiss, Kiss’ 그리고 김용희 작곡가의 ‘Desire Patchwork’는 이현주의 작품과 달리 미술작품과 작곡된 곡의 연계가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다소 아쉬움이 느껴졌다.

 

이현주의 음악이 남다른 두 번째 이유는, 이현주의 음악이 시각적인 요소와 함께 구체적인 형태로 상징화될 수 있는 가능성에 있다. 달리 말해, 이현주의 곡이 연주될 때 홍주혜의 그림은 훌륭한 가이드라인이 될 수 있다. 먼저 그림 속 넝쿨이 가진 ‘줄기’라는 선적인 형태와 중세의 성화같은 ‘납작한’ 입체감의 표현은, 이현주의 곡이 음들을 펼쳐놓은 선적인 선율의 진행을 갖고 있으며, 수평적 짜임새를 갖는 것과 대응된다. 또한 작곡가가 밝힌 첨가리듬 기법은 청각적으로 끊임없이 이어지는 시간의 운용으로 인식된다. 그리고 이것은 그림 속 이파리들이 불규칙하게 그리고 계속해서 줄기를 돌며 돋아 있는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악기의 구성도 그림과 연관 지어 떠올려 볼 수 있는데, 두 개의 목관악기와 하나의 현악기가 갖는 음향적인 비율 그리고 플룻과 클라리넷의 중첩되는 움직임들과 그에 대조되는 첼로의 움직임은, 그림 안 갈색 줄기를 중심으로 녹색 잎들이 돋아 있는 모습으로 형상화된다. 즉 첼로 음향은 넝쿨의 줄기로 상징되며 클라리넷과 플롯은 잎이 된다. 또한 형식적으로 음악의 중앙 섹션에 위치한 바흐 인용, 그리고 처음의 솔 음정으로 회귀하는 음악의 원형 구조는 그림이 가진 아치형의 넝쿨 형태와 일치한다. 

 

한발 더 나아가 ‘바흐 음악의 인용’이 주는 충격은 그림과 음악의 결합 안에서 더욱 효과적으로 표현된다. 불협화음 안에서 솔(G) 조성과 함께 서서히 등장하는 바흐 음악은, 청각적으로는 협화음이라는 물리적인 실체다. 이윽고 음악 안에서 불협화음과 협화음의 청각적 구분은, ‘불안정하고 유동적이고 변화 가능한’ 불협화음과 ‘절대적인 것, 아름다운 것, 불변한 것’으로서의 협화음의 구별로 변화된다. 이는 바흐 음악의 인용을 ‘신적인 것의 출현’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이유가 되며, 이와 같은 협화음의 극적인 출현은 그림의 크랙(Crack)과 넝쿨 안에 잠재워져 있던 ‘신성’의 발아로 인식된다. 즉 인용기법으로 등장한 바흐 음악의 아름다움은, 평범하고 소박해 보이는 그림이 가지고 있던 성스러움이 불현 듯 발현하는 순간을 체험하게 한다.

 

이 모든 것을 바탕으로 이현주의 음악은 그림과 함께 이야기가 된다. 클라리넷과 플룻은 하나의 솔 음정에서 실처럼 가느다랗게 뻗어 나오기 시작하며, 시작한 장소에서 이탈하려는 음정들은 마치 넝쿨처럼 다시 중심을 감고 돈다. 곧 아랫부분에 자리 잡은 도샾에서 등장하는 첼로의 음정이 울퉁불퉁하게 튀어 오른다. 수직으로 치고 올라가는 첼로의 진행은 섬세하게 구축된 수평적 솔의 공간에 마치 십자가의 세로기둥처럼 파고든다. 홍주혜의 그림에서 표현되었던 넝쿨이 가지고 있었던 대칭성은, 이현주의 음악에서도 음향의 십자가로 구현되는 듯 하다. 이어지는 알록달록하게 얽힌 잎들은 짧고 활동적인 음들로 형상화되며, 곧이어 나타나는 고음부에서의 도샾 음정의 비명은 ‘영원성’을 획득하기 위한 고난을 떠올리게 한다.

 

그림 안에 등장하는 벌레 먹은 이파리, 말라버린 이파리들도 음악으로 되살아난다. 높은 미 음정으로 경계 지어지는 이 활동적인 생의 공간 안에서, 잎들은 각자 자신의 시간을 회상하기도 하고 활발히 움직이기도 한다. 한참을 진행하던 음들은 첼로의 라플렛-솔 음정의 움직임과 함께 무언가가 엄습할 것 같은 전조를 느낀다. 이 암시적인 단2도 하행 선율은, 영원불멸한 존재인 하느님의 등장에 앞선 두려움과 경외심을 표현한다. 이윽고 솔 조성의 음향 구름 속에 ‘바흐 인용’이 드러난다. 갤러리는 순간 한여름 오전의 노랗고 부드러운 채광에 둘러싸인다. 섬세하게 재조립된 바흐의 음악은 마치 휘파람과 같은 여리고 순수한 음향이 되어 이 따뜻한 날의 영광과 기쁨을 충만함으로 읊조리는 농부를 떠올리게 한다. 옅은 복숭아색과 연두색, 연갈색의 울림은 부드러운 온기로 솔 음정의 음향층을 맴돈다. 이 공간 안에서 홍주혜가 그려낸 ‘영원성’은 온도를 가지게 되고, 시대를 초월한 개념인 영원성은 지금 실재하는 ‘현재’로 드러난다. 이어지는 짧은 악구들과 첼로의 하모닉스가 뒤따르고, 조용하게 클라리넷이 다시 넝쿨을 연주하기 시작한다. 결국 가늘고 잔 선율들은 다시 솔 음정으로 서서히 합해지고 곡은 끝이 난다. 

 

화가가 자신의 생각을 평면에 묘사했다면, 이현주는 화가가 평면에 봉인한 그림을 음향으로, 공간으로 다시 녹여내고, 입체감을 갖도록 입김을 불어넣는다. 화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매체의 특성에 따라 평면의 그림에 꼭꼭 눌러 담았다면, 이현주의 음악은 그것을 다시 펴고 음향 안에 널어놓아 감정의 본래 형태, 즉 ‘상’ 안에 봉인되어 있던 심상의 원초적 개념으로 되살려낸다. 관객들은 연주를 들으면서 ‘넝쿨’이라 이름 붙여진 이 그림의 내면이 사실은 둥글고 풍성한 강한 구와 같은 것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평면 안에 타원형으로 나타나는 예수님의 영원불멸함이 본래 형태인 아우라의 모습으로 온기를 갖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현주의 작품은 그림을 단순히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의도를 서로 다른 매체로 사유했을 때 어떻게 표현될 수 있는지를 정확히 보여준다. 홍주혜 화가의 ‘영원성에 대한 갈망’은 크랙을 바탕으로 돋아 있는 넝쿨의 가련함과 그 조합으로 말미암은 내면의 초월성으로 드러나지만, 이현주의 음악에서 그것은 실재적 음향이 된다. 그래서 이현주의 음악을 듣고 있으면, 이 두 가지 매체가 이렇게 서로 표현하는 방식이 다르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된다. 아마도 미술관에 홍주혜의 그림이 있고, 그 앞에서 이현주의 곡이 연주된다면 사람들은 음악에 대해서도 그리고 그림에 대해서도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이현주의 음악이 가진 매력이다. 

 

역사상 수많은 음악과 미술의 만남이 있었다. 우리는 낭만주의 시대 미술가와 음악가의 사랑에서부터, 시청각적인 음악을 시도한 스크랴빈, 화가이자 작곡가였던 쇤베르크, 그리고 미니멀리즘 미술과 이상을 공유하며 발전했던 라 몬테 영의 음악을 떠올릴 수 있다. 모든 만남은 특정시대의 독특한 개성을 가진 결과물을 내 놓았다. 그리고 2011년 한국에서 이 둘의 만남은 대안적이고 신선한 프로젝트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미술관이라는 독특한 공간을 현대음악으로 물들이는 화음 프로젝트는 이현주의 작품 <바인>이라는 독특한 작품을 탄생시켰다. 그림과 함께 더 깊은 뜻을 가지게 되는 이런 작품이 계속해서 위촉되고 연주되는 것. 이는 화음챔버 오케스트라가 한국 창작 음악계 안에서 확고한 영역을 구축하고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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