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15일 서호 갤러리의 화음 프로젝트에 다녀오면서 해본 생각들을 조금
적어봅니다.
우리는 아름답지 않은 미술작품은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아름답지 않은 음악, 그러니까
감성을 충족하는 '선율 혹은 노래'가 없는 음악은 받아들이기 어려워 합니다.
저는 이 부분을 언어와 관련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언어와 관련해서 제가 느끼는 것은 한국 사람들은 신이 난다거나, 감동을 한다거나 하는 감성적인 충족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현대음악을 듣는 경우 낭만주의 음악을 듣는 것과 같은 감동을 경험하기는
힘듭니다. 그러나 새로운 색채, 소리, 언어에 조금 귀를 열면 현대음악도 흥미롭고
재미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클래식음악이 상당히 활발한 한국의 상황에서
현대음악이 외면되고 있는 것은 아마도 언어와 의사소통의 방식과도 연관이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우리는 음악을 들을 때에 감동, 감성의 충족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반면 현재 제가 거주하고 있는 프랑스 사람들은 새로운 것을 경험하는데 적극적입니다.
그들은 느끼는 것을 분명한 언어로 표현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생각합니다.
물론 파리와 서울의 현대음악의 양상을 동등비교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역사와 시스템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역사를 만들어가고 있을 뿐입니다. 아무튼 프랑스인들의 이 호기심과
새로운 것에 대한 높은 관심의 태도는 음악인을 포함한 예술인들에게는 반가운 일입니다.
제 생각에 한국어는 상대방으로 하여금 추측하고 판단하게 하는 여지가 많은 언어인 반면에 불어는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부드럽게 권유하거나 말을 할 때에는 프랑스인들도
조금 덜 직접적으로 말하기도 합니다.
언어적인 특성이 의사소통에 있어서의 태도를 결정짓는지, 사람들이 이미 지니고 있는
감성적인, 이성적인 성향이 언어를 결정짓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우리의 언어는 더
상징적이고, 그 때문에 우리의 직관은 더욱 발달하게 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또한 오해의 소지도 늘 존재하지요. 조금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유사한 대답과 표현에 있어서도 더 많은 가능성이 있는 반면에 불어는 일반적으로 쓰는
매우 분명한 표현들이 존재할 따름입니다. 그래서 한국 사람들이 불어식 사고와
언어표현에 익숙해지는 것은 그리 쉽지는 않습니다. 특히 의사소통에 있어서, 감정을
주고 받는 데에 그 감정을 분명한 문장으로 전달하는 것은 우리에게는 조금 낯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언어로 표현하기보다는 느낍니다.
비가 무척이나 많이 오는 날씨에도 불구하고 서호 갤러리를 가득 메운 청중들을
보면서 개인적으로도 놀랐고, 또 새로운 희망을 발견했습니다.
예술의 도시로 잘 알려져 있는 파리에서도 화음 프로젝트와 같은 기획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물론 음악과 미술, 음악과 건축, 음악과 문학과 같은 만남의 공간이
존재하고, 서로 다른 두 예술간의 교류가 매우 활발하지만, 단순한 교류가 아닌
음악과 미술, 양쪽 모두 창작으로서, 그리고 진정한 교감의 장으로서 존재하는
화음 프로젝트와 같은 공연은 찾기 어렵습니다. 아마 정기적으로 이렇게 존재하는
프로젝트는 아마 화음 프로젝트가 유일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저는 화음 프로젝트가 새로운 문화예술사를 써 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것은 결코 규모가 아닙니다. 화음 프로젝트의 본질입니다. 그것은 우리시대에
찾기 어려운 창작정신입니다. 하나의 창작이 다른 창작에 대한 원천이 되고, 또한
두 개의 서로 다른 창작이 만나 교감하는 공간 속에 있는 청중들은 새로운 문화예술의
역사 한 가운데에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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