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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제45회 정기연주회 화음(畵音) 30년 기념 II : 낭만, 아다지오의 미학​] “음악의 변증법과 음악의 미래”
김인겸 / 2024-11-23 / HIT : 98

화음챔버오케스트라 제45회 정기연주회 화음(畵音) 30년 기념 II : 낭만, 아다지오의 미학​

[평론] “음악의 변증법과 음악의 미래”

 

 

프롤로그 – 음악 텍스트의 팽창성

‘음악은 음악이다’라는 명제와 ‘음악은 음악 이상이다’라는 명제는 고전논리학에 따르면 모순 관계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첫 번째 명제는 음악의 자기 동일성을 주장하며, 두 번째 명제는 음악이 자기 동일성을 초월한 확장적 의미를 지닌다고 선언하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두 명제는 상호배타적이며 동시에 참일 수 없다는 모순율에 따라 충돌하게 된다. 그러나 헤겔 논리학에서는 모순을 부정적인 개념으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모순은 사물의 발전과 운동을 가능하게 하는 핵심 요소로, 변증법적 과정을 통해 더 높은 차원의 진리를 향해 나아가는 힘으로 작용한다.

음악의 본질도 이와 다르지 않다. 음악은 자기 동일성을 유지하면서도 끊임없이 확장되고, 이를 통해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낸다. 이 팽창적 성격은 음악이 단순히 청각적 경험에 머물지 않고, 우리의 사고와 감각을 넘어서는 더 큰 지평으로 나아가게 한다. 이런 점에서 음악감독 박상연이 해석하고 지휘하는 화음챔버오케스트라(이하 ‘화음챔버’)의 연주는 단순히 ‘음악’으로서의 자기 동일성에 머무르지 않고, 그 이상으로 나아가는 음악의 본질적 팽창성을 보여준다. 더 나아가 이들은 음악이 가진 모순적 성격을 수용하고, 이를 변증법적으로 통합하여 새로운 차원의 통찰과 감각을 열어 보인다.

이번 연주회는 브루크너, 배동진, 말러, 바그너 등 다양한 작곡가의 작품을 통해 음악의 확장적 가능성을 실질적으로 경험하게 했다. 작품마다 서로 다른 방식으로 음악적 경계를 넘어서려는 시도가 담겨 있었으며, 이는 청중에게 음향적 감상의 차원을 넘어 음악으로 확장 가능한 존재론적 의미를 성찰하게 했다. 이 글에서는 연주회의 주요 작품들을 통해, 화음챔버가 음악의 자기 동일성과 초월성을 어떻게 변증법적으로 통합하며 청중을 감동으로 이끌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브루크너와 배동진 - 음악의 확장성

첫 번째로 연주된 작품은 브루크너의 현악오중주 아다지오를 현악 오케스트라로 편곡한 버전이었다. 브루크너의 오리지널 작품은 현악오중주라는 제한된 음향적 자원을 통해 밀도 높은 화성과 깊이 있는 선율 전개를 보여준다. 그러나 화음챔버의 편곡 버전은 이 기본 구조를 더욱 입체적으로 확장하며, 저음부에서 더블베이스를 활용해 단단하고 깊이 있는 음향을 만들어냈다. 특히 더블베이스의 역할은 원작에서는 들리지 않던 저음의 무게감을 부여하며, 음악이 단순히 아름다움이나 감상적 매력에 머무르지 않고 청중에게 존재론적 깊이를 체험하게 했다. 현악 오케스트라라는 확장된 편성은 단순히 음량이나 울림을 키우는 데 그치지 않고, 각 악기의 배음과 조화가 한층 더 치밀하게 얽히게 하며 폴리포니적 텍스처를 풍부하게 직조했다. 이러한 음악적 확장은 브루크너의 음악이 지닌 내재적 명상성을 더욱 극대화하며, 제한된 자원 속에서도 무한한 가능성을 모색했던 작곡가의 의도를 입체적으로 드러냈다.

이어진 배동진의 <musica notturna per archi>는 음악적 확장의 또 다른 방식을 보여준다. 작곡가는 “최소한의 재료를 사용해 최대한의 변화를 창출하려는” 철학을 바탕으로, 단순한 테마를 시간의 흐름 속에서 점진적으로 변형시켜 나갔다. 이 작품은 미술에서 ‘녹턴 페인팅’으로 알려진 양식을 떠올리게 한다. 미술에서의 녹턴 페인팅이 어둠 속에서 빛과 색의 미묘한 변화로 장면을 묘사하듯, 배동진의 음악은 밤이라는 시간적, 감각적 풍경을 섬세하게 묘사한다. 음향적으로는 낮은 현의 지속음과 중첩된 멜로디가 얇은 베일처럼 서서히 변화하며, 이 과정에서 새롭게 드러나는 음색들은 각기 다른 감각의 층위를 자아냈다. 화음챔버의 연주는 이 작품이 요구하는 미세한 뉘앙스의 차이를 치밀하게 구현하며, 음악이 단순한 시간적 흐름의 매체가 아니라 감각적 경험의 확장임을 설득력 있게 전달했다. 이러한 점에서 이 곡은 음악적 확장이라는 주제를 단순히 논하는 것을 넘어 그 자체로 입증해 낸 사례라 할 수 있다.

 

말러와 바그너 - 음악적 모순의 미학

말러의 교향곡 5번 4악장 아다지에토는 상반된 감정의 대비를 통해 음악적 모순을 탐구한다. 말러는 이 곡에서 상승과 하강을 오가는 선율을 반복적으로 교차시키며, 반음계적 미끄러짐을 통해 긴장을 점진적으로 쌓아간다. 이 긴장은 고독과 열정, 소멸과 영원의 모순적 관계를 은유적으로 드러내며, 삶과 죽음이라는 존재론적 질문으로 확장된다. 화음챔버의 연주는 이러한 말러의 음악적 기법을 섬세한 템포 조절과 다이내믹을 통해 철저히 구현했다. 특히 곡의 중심을 이루는 선율은 단순한 감정의 표현을 넘어, 청중에게 보편적이고도 초월적인 미학적 경험을 선사했다.

말러의 아다지에토는 토마스 만의 중편소설 ‘베네치아에서의 죽음’에서 노년의 주인공이 젊음과 아름다움, 그리고 그로 인해 불가피하게 따라오는 죽음의 예감을 마주하는 순간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음악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이를 바탕으로 루키노 비스콘티는 이 곡을 영화 ‘베네치아에서의 죽음’에 삽입하여 고독과 욕망, 그리고 소멸이라는 주제를 탐미주의적으로 부각시켰다. 더불어 박찬욱 감독은 영화 ‘헤어질 결심’에서도 이 곡을 활용해 인간관계의 복잡성과 모순을 깊이 있게 탐구했다. 화음챔버의 해석은 이러한 작품들에 공통적으로 흐르는 감정적, 존재론적 깊이를 충실히 반영하며, 말러의 음악이 가진 시간적 초월성과 철학적 울림을 온전히 담아냈다.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 서곡과 사랑의 죽음은 후기 낭만주의의 정점이자 모더니즘으로 넘어가는 전환점에 놓인 작품이다. 이 곡은 불협화음과 협화음이 끊임없이 충돌하며 긴장과 해소 사이에서 정체를 거부하고, 끊임없이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는 특징을 지닌다. 특히 바그너가 창안한 무한선율 기법은 조성과 불협화음의 경계를 흐릿하게 하며, 음악이 특정한 결론에 도달하는 것을 거부한다. 화음챔버는 이러한 바그너의 음악적 모순을 정밀하게 다루었다. 특히 현악기 섹션은 모호한 조성 체계를 유연하게 풀어내며, 곡이 가진 불안정성과 긴장을 재현했다. 이는 곡이 가진 내적 모순이 단순한 혼란이 아니라, 초월적 미학으로 나아가기 위한 동력이 될 수 있음을 실감하게 했다. 화음챔버의 연주는 바그너 음악의 본질적 복합성을 충실히 재현하며, 음악적 모순이 창조적 가능성으로 전환되는 순간을 잘 포착하여 생생하게 전달했다.

바그너와 말러의 두 작품은 각각 다른 방식으로 음악적 모순을 탐구하면서도, 이를 단순한 충돌로 끝내지 않고 초월적 미학으로 승화시켰다. 화음챔버의 연주는 이 두 작곡가가 음악을 통해 전하려 했던 복잡한 내면의 세계와 그것이 가지는 확장성을 정밀하게 탐구하며, 음악이 가지는 가능성의 지평을 한층 넓혔다.

 

에필로그 – 음악의 미래

화음챔버의 이번 연주는 단순한 음악회에 그치지 않고, 음악이 가진 본질적 성격을 재조명하며 그 사회적 함의를 탐구하게 만드는 기획이었다. 음악은 종종 개인적이고 내면적인 경험으로 한정되는 예술로 여겨지지만, 이번 연주회는 음악이 단순히 개인의 감정을 표현하는 매체를 넘어, 인공지능과 로봇이 대두되어 초연결과 파편화라는 모순적 상황이 증폭되는 시대에 사회와 인간 사이의 복잡한 관계를 성찰하고 대화를 제안하는 플랫폼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했다. 그 예로 브루크너의 장엄한 화성과 배동진의 밤의 음악은 개인적 감상의 영역을 넘어 청중들에게 집단적 사유와 사회적 연결성을 제안하는 방식으로 다가왔다고 생각한다. 이는 음악이 단지 예술적 즐거움을 주는 콘텐츠를 넘어, 인간 공동체가 공유할 수 있는 보편적 가치를 담고 있음을 시사한다.

특히, 화음챔버가 선택한 레퍼토리는 음악적 미학을 넘어, 우리 시대가 직면한 문제들과 깊은 관련성을 보여주었다. 바그너와 말러의 작품은 모순과 긴장을 음악적으로 풀어내며, 혼란과 갈등이 팽배한 현대사회에서 화해와 통합의 가능성을 암시했다. 말러의 아다지에토가 삶과 죽음, 고독과 열정이라는 모순적 주제를 은유적으로 표현했다면, 바그너의 무한선율은 고정되지 않은 정체성을 통해 변화와 초월의 가능성을 드러냈다. 이는 음악이 단지 미적 경험을 넘어, 현대사회가 당면한 다양한 갈등과 문제에 대한 통찰을 제안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화음챔버의 연주는 이러한 작품들을 음악으로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음악이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하고 공동체를 형성하는 매개로 작동하게끔 만들었다. 특히 연주자들 간의 정교한 앙상블은 서로 다른 목소리가 조화롭게 결합하며, 다양성과 통합이라는 주제를 음악적으로 구현해냈다. 이는 현재의 분열된 사회 구조 속에서 음악이 새로운 소통의 가능성을 열어줄 수 있다는 희망을 제시한다. 청중이 단순한 감상의 주체에서 그치지 않고 연주가 만들어낸 공동의 경험을 공유하며, 음악을 통해 새로운 연대감을 느낄 수 있는 전망을 보여준다.

이번 연주회는 음악이 단지 청각적 쾌감에 머무르지 않고, 우리 시대의 사회적·문화적 맥락 속에서 어떻게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를 탐구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음악은 멈추는 법이 없다. 연주가 끝난 뒤에도 그 여운은 우리의 내면에서 지속되고, 새로운 질문과 사유를 불러일으킨다. 화음챔버의 연주는 음악이 가진 이런 잠재력을 극대화하며, 단지 과거를 재현하는 예술이 아니라 미래를 열어가는 예술이라는 점을 환기시킨다. 앞으로도 화음의 연주가 우리 사회에 더 넓은 대화의 장을 열어주기를 기대하며, 음악의 지평이 지속적으로 확장되길 바란다.

 

글 김인겸(음악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