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음챔버오케스트라 레퍼토리 프로젝트
LIFE II: Toward the Beyond
(2024.05.18 예술의전당 IBK홀)
- 임야비
‘리듬, 음색, 반복, 멜로디 같은 요소들이 음악 예술의 매개체로 사용되는 것처럼, 회화도 음악과 유사한 예술이 되어야 한다.’ - 바실리 칸딘스키 ‘점, 선, 면’, 1926.
그림에 음악을 끌어들인 바실리 칸딘스키는 추상화의 창시자이자, 총체 예술의 원류인 바그너의 열광적인 추종자였고, 예술 이론 저술가이기도 했다. 1926년에 출판한 이론서 ‘점, 선, 면’에서 그는 그림을 음악의 음표처럼 점, 선, 면으로 분석해 미학의 본질에 닿고자 했다.
화음 챔버 오케스트라는 화(畵), 음(音), 문(文)을 지향한다. 이는 칸딘스키의 지향점과 같다. 이에 음악의 울림에 몇 개의 점, 선, 면을 긋고 그 위에 박약한 문자를 얹어 그날의 화음을 복기해 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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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과 선 - 문장 부호들
김신의 현악 오케스트라를 위한 레퀴엠(Requiem for string orchestra)은 무대 위에 박힌 묘비였다. 수직선처럼 곧추선 묘비는 그 높이가 너무 높아 무대 위 시작점만 인지할 수 있을 뿐, 하늘로 뻗은 묘비의 끝점은 보이지 않았다.
죽은 이는 노래할 수 없다. 진혼곡은 죽은 이를 위해 부르는 산 이의 노래다. 죽은 이는 들을 수도 없다. 하지만 산 이는 죽은 이에게 살아있는 울림을 들려주고 싶다. 그래서 진혼곡은 땅으로 꺼지는 선(線)이 아닌, 하늘로 뻗는 선에 울림을 얹기 마련이다.
음악은 통상적인 진혼 미사곡의 흐름을 따랐다. 엄숙한 ‘입당송(Introitus)’, ‘자비송(Kyrie)’을 지나 ‘부속가(Sequentia)’ 중 가장 격렬한 ‘진노의 날(Dies Irae)’에 해당하는 부분까지는 무대 위 하늘로 향한 수직선이 느낌표로 느껴졌다. 하지만 이후부터는 허공에 선을 그리며 미사를 집전하는 제단의 사제와 왼손으로 네 개의 선을 쥔 수녀들이 ‘Requiem’을 포획한 작은따옴표라는 작은 두 점에 너무 파묻혔다. 산 이의 울림이 ‘제의’라는 형식에 갇히자, 제단과 신자석 사이에는 ‘말줄임표’라는 점들의 강이 생기고 말았다. 죽음과 삶을 바라보는 작곡가의 직관이 다소 모호했다. 이 때문인지 산 이와 죽은 이를 가르는 강이 무대와 객석 사이를 가로질렀다. 죽은 이는 들을 수 없다. 레퀴엠은 분명 산 이를 위한 울림이다. 그래서인지 하늘로 향해있던 느낌표의 윗부분이 천천히 아래로 구부러졌고, 무대 위 묘비는 커다란 물음표가 되었다.
접합점과 연장선
신체 기관 중 뇌를 정신으로, 심장을 육체로 은유하곤 한다. 뇌와 심장의 고도차 때문인지 정신은 좀 더 하늘과 신에 가깝고, 심장은 땅과 인간에 가깝다. 한 겹 더 들어가 보자. 뇌는 신경의 다발이고, 심장은 근육의 뭉치일 뿐이다. 그런데 신경은 정신과 어울려 ‘신성’이 되고, 근육은 심장과 어울려 ‘세속’이 된다. 이런 식으로 도식화된 ‘신성’과 ‘세속’이 예술의 무대에서 춤춘 지 오래다. 결국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이르러 이 뻔한 이분법은 명을 다한다. 프랑스의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1859~1941)은 ‘물질과 정신은 같은 연장선에 있다.’라고 주장했고, 모네(1840~1926), 르누아르(1841~1919)로 대표되는 프랑스 인상주의 화가들은 파동의 빛을 입자인 색으로 그려냈다. 이러한 철학과 그림의 바통을 음악으로 받은 프랑스 작곡가가 바로 드뷔시(1862~1918)다. 1904년, 그는 성과 속을 춤으로 묶은 ‘신성한 춤과 세속의 춤’을 발표해 신경과 근육을 연장선으로 잇는다. ‘춤’이란 신경과 근육의 협주곡이다. 드뷔시는 그 연결점, 즉 신경근 접합점(Neuro-Muscular Junction)에 하프 협주곡이라는 묘수를 둔다.
무대 맨 앞에 놓인 하프를 중심으로 두 개의 완만한 선이 교차했다. 하나는 위에서 살포시 내려와 하프를 거쳐 관객석으로 퍼지는 멜로디선(線)이었고, 다른 하나는 관객석에서 나와 하프로 모인 후 하늘로 튕겨 올라가는 리듬선(線)이었다.
천사의 악기인 하프는 가장 성스러운 악기지만, 엄청난 무게와 비용 때문에 무척 세속적인 악기이기도 하다. 이런 촌스러운 이분법에 개의치 않는 듯한 하피스트 피여나는 신성한 춤에서는 천사의 아르페지오를 세속에 흩뿌렸고, 세속의 춤에서는 인간의 리듬을 하늘에 봉헌했다. 시간의 접합점도 훌륭했다. 지휘자 박상연은 두 곡의 사이를 거의 아타카(attacca)로 연결해 인상주의 그림처럼 신비로운 흐름을 유지하며 극적인 대비 효과를 냈다. 지휘자와 독주자의 긴밀한 협연은 허공에서 춤추는 천사의 발을 무대에 닿게 했고, 땅을 구르며 춤추는 인간의 발을 공중에 띄우기 충분했다.
하늘과 땅을 잇는 수직선과 무대와 객석을 연결하는 수평선이 교차하는 접합점의 하프는 두 직선의 날 선 각을 없애고, 우아하고 매끄러운 곡률을 만들어냈다. 이 부드러운 연장선은 성과 속을 초월하여 음악과 춤, 신경과 근육을 이으려 했던 드뷔시의 의도에 닿아 있을 것이다.
원과 나선의 맥놀이
무대의 반원(半圓)
‘LIFE II: Toward the Beyond’ 공연의 절정은 존 애덤스의 셰이커 룹스(Shaker Loops)였다.
현대 음악 평론가이자 렉쳐 콘서트 해설자인 송주호에 따르면 ‘셰이커’는 미국에서 한때 흥했던 기독교의 분파로 ‘Shaker(떠는 사람)’라는 단어는 예배 때 신자들이 신과 공명하며 몸을 요동치기 때문에 붙여졌다고 한다. ‘Loop’의 사전적 의미는 ‘고리’, ‘원’, ‘순환’이다. 작곡가 애덤스는 ‘작은 선율 단편의 꼬리가 머리에 연결되어 반복적인 선율의 고리(Loop)가 만들어진다’라고 했다. Shaker and Loops. 제목의 두 단어는 ‘떨리며 원을 그리는’ 4악장제 음악의 원점이다.
객석의 반원
동맥, 정맥, 모세혈관 그리고 심장으로 구성된 인체의 혈관계는 거대한 원들을 그리며 온몸을 순환한다. 그래서 이를 통칭해 ‘순환기’라고 한다. 그런데 인체의 혈관은 딱딱한 쇠 파이프가 아니다. 순환기인 혈관은 정신의 영역인 심리나 물질의 영역인 병리에 따라 요동친다. 그 혈관의 떨림이 바로 맥박이다. 고로 맥박은 고저와 리듬을 갖는 음악이다.
원. 맥놀이.
화음 챔버 오케스트라의 연주는 30분 내내 객석과 무대를 순환하며 요동쳤다.
무대 위 반원(半圓)의 오케스트라가 애덤스의 트레몰로와 트릴을 울렸고, 여기서 튕겨 나간 떨림은 객석을 반원으로 휘돌며 관객들의 맥박을 조율했다. 1악장 ‘흔들림과 떨림(Shaking and Trembling)’은 관객 순환계에 빈맥을 자극했고, 서맥인 2악장 ‘찬송하는 무리(Hymning Slews)는 벌렁거리는 맥을 살포시 진정시켰다. 1, 2악장은 음악과 혈관의 진동수가 중첩되며 벌어진 ‘맥놀이’ 현상이었다. 이는 애덤스가 의도한 원운동이었다.
나선의 상승.
이어지는 3악장 ‘고리와 구절(Loops and Verses)’은 긴장감 넘치는 부정맥이었다. 이때부터 무대와 객석을 휘돌던 원운동이 바닥부터 상승하기 시작했다. 이 나선의 상승은 셰이커 교도들의 신을 향한 들림 그리고 청중의 음악적 흥분과 궤를 함께했다. 4악장 ‘마지막 진동(A Final Shaking)‘은 걷잡을 수 없이 하늘로 치솟아 버린 나선 운동을 1악장의 빈맥과 2악장의 서맥으로 차츰 진정시키면서 완만한 하강을 만들었다. 하지만 상승의 짜릿하고 강렬한 힘에 매료된 모두는 하강이 주는 진한 진정을 느낄 수 없었다.
원과 나선. 순환과 상승의 중심점.
현대 음악 작곡가 애덤스의 ‘셰이커 룹스’는 요사한 예배 장면을 묘사한 음악이 아니다. 애덤스는 울림의 원운동을 구상했다. 그리고 악보에는 정확히 원의 반만 그려 놓았다. 그리고 나머지 반은 관객의 맥박에 맞춰놓았다. 그의 의도는 주파수 중첩이다. 이 맥놀이는 연주자의 현과 청중의 맥박 사이에서 공명하고, 커다란 원을 그리며 상승하는 나선 모양을 그렸다. 이는 그 어떤 심령 부흥회 못지않은 짜릿함을 혈관에 새겼다.
마지막으로 작곡가의 의도 그리고 공간을 휘감은 나선과 원의 중심점에는 지휘자 박상연이 있었다. 악보에 반만 그려진 원을 온전한 곡률로 순환시킨 주교에게 신앙 못지않은 찬양을 봉헌해 본다.
부유하는 면
공연의 마지막 곡인 애런 제이 커니스의 ‘천국의 음악(Musica Celestis)’은 앞선 김신, 드뷔시, 애덤스가 공중으로 띄운 면에서 서서히 떠오른다. 이 높이는 “하늘에 있는 천사들이 하느님을 찬양하며 끝없이 노래하는 것을 가리키는 중세의 개념에서 영감을 받아 작곡했다.”라는 작곡가의 말과 정확히 같은 고도였다. 하늘을 떠다니는 천사는 땅에 발붙이고 있는 인간보다 훨씬 높은 면에서 노래한다. 그렇기에 천사가 신에게 올리는 노래는 인간이 신에게 올리는 노래보다 훨씬 수월할 것이다. 인간의 높이를 배제한 상승의 영역. 이 고도차의 이름이 ‘숭고’다.
화음 챔버 오케스트라의 ‘천국의 음악’은 무대의 한참 위에서 울리기 시작했다. 무대와 평행한 평면은 매우 천천히 하늘로 상승했는데, 그 면이 닿을 종착지가 어디일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숭고의 고도를 훌쩍 넘어버린 천사의 음악 때문에 무대의 인간이 올리는 울림이 공허할뻔했다. 다행히 첼리스트 김진경이 휑한 숭고의 아랫면을 유려한 독주로 가득 메꿔냈다. 덕분에 무대의 평면은 천사의 면과 포개져 더 강하고 성스러운 상승의 힘을 가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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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김신의 음악은 무대의 점과 하늘을 잇는 수직선이었고, 드뷔시의 음악은 이 수직선의 발인 하프에 관객의 수평선이 교차한 상승과 하강의 연장선이었다. 2부 애덤스의 곡에서 떨리던 반원은 관객의 맥박과 어우러져 큰 원이 되었고, 이내 나선으로 요동쳤다. 마지막 애런 제이 커니스의 음악적 면은 무대와 객석을 천천히 하늘로 끌어 올렸다.
‘예술은 예술의 한계를 넘어 ‘인간’과 ‘신’이 통합되는 영역으로 뻗어나가, 포괄적인 종합에 이르게 될 것이다.’ - 바실리 칸딘스키 ‘점, 선, 면’, 1926.
이렇게 화음 챔버 오케스트라는 음으로 점, 선, 면을 그리며 삶과 죽음 그리고 영혼과 육체의 궤적을 IBK 홀에 남겨 놓았다.
이 그림의 울림은 화(畵)와 음(音)의 너머를 향해 지금도 상승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