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음챔버오케스트라 레퍼토리 프로젝트 Story Ⅰ: Mythology(신화)
‘상상과 비상(飛上)’
김인겸(음악평론가)
김효영(생황), 한지은(피콜로)
화음챔버오케스트라, 박상연(지휘)
2023년 4월 6일 예술의전당 IBK챔버홀
프롤로그 ‘연속성과 불연속’
화음챔버오케스트라 레퍼토리 프로젝트(이하 ‘레퍼토리 프로젝트’라 한다)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과 CJ문화재단의 후원으로 사단법인 화음이 주최하고 조선통신사가 주관하는 공연예술중장기창작지원사업이다. 지난해에 시작해서 올해 2년째를 맞아 첫 연주회를 지난 4월 6일 예술의전당 IBK챔버홀에서 열었다. 이에 필자는 총 4번으로 구성된 2022년 레퍼토리 프로젝트의 처음과 두 번째, 세 번째 연주회를 비평했던 평론가로서, 둘째 해 첫 번째 연주회를 마친 시점에서 작년의 레퍼토리 프로젝트를 조망하고 ‘이야기’라는 주제를 표방한 올해 레퍼토리 프로젝트의 전반을 언급하며 글길을 트고자 한다.
30년 전인 1993년 창단한 ‘실내악단 화음(畵音)’은 음악을 음악에 가두지 않고 다른 예술장르와 세상 자체와 소통하고 교감하고 때로는 충돌하며 예술의 지평을 넓히고자 하는 기획으로 출범한 단체이다. 1996년 화음챔버오케스트라(이하 ‘화음’이라 한다)로 확대개편한 후 2002년 화음프로젝트, 2011년 화음프로젝트 페스티벌, 2019년 화음커뮤니티 등 다양한 실험적 기획을 통해 문화 소비를 넘어 문화 창조와 주체적 향유라는 가치를 지향하는 등 의미 있는 활동을 지속했다. 화음의 DNA에는 미지에 대한 탐험과 실험정신이 새겨져 있으며 그것은 화음의 정체성이자 활동의 기본정신으로 자리매김했다. 바꿔 말하자면 화음은 개별 연주회의 낱낱의 연주 작품에서 화음의 가치지향과 연속성을 지켜왔다고 평할 수 있다.
작년 프로그램과 연주, 올해 주제를 확인하고 첫 연주회를 감상하니 레퍼토리 프로젝트는 이러한 화음의 연속성 위에서 창발적 불연속이 나타날 수 있는 기획이라고 판단한다. 레퍼토리 프로젝트 첫 해의 주제는 ‘고전의 유산’이었다. 시간의 풍화에 견딘 고전이 현재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모습, 그 영향을 뚫고 자신만의 공간을 창조한 새로운 작품의 면모를 2022년 레퍼토리 프로젝트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시리즈의 첫 주제인 ‘교향곡의 예술’에서는 서양음악에서 빼놓고 이야기하기 힘든 교향곡이라는 기둥을 다루었다. 두 번째 시리즈인 ‘다양한 형식’에서는 형식이라는 틀로 고전의 유산이 시대를 지나며 어떻게 수용・가공・변형되었는지 그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살폈다. 시리즈의 세 번째 ‘현의 환상’에서는 실체로서의 현악기라는 물질매체가 음악이라는 콘텐츠를 생산하고 이를 통해 형이상학의 범주인 환상의 영역을 조성하는 흥미로운 주제를 경험했다. 시리즈의 마지막 ‘그림으로부터의 영감’은 화음의 전통적 주제인 타 예술장르와의 접점 찾기와 통섭을 다시 환기했다.
스토리텔링, 호모 사피엔스의 본체
2023년 레퍼토리 프로젝트의 주제는 이야기(story)이다. 2023년 4월 30일 현재 총 3회로 기획하고 있는데, 4월 6일에 첫 시리즈로 ‘신화’를 다루었고, 5월 20일에 ‘문학’을, 9월 26일에는 ‘음악 속 메시지’를 주제로 올해 레퍼토리 프로젝트를 진행할 예정이다. ‘음악 속 메시지’는 단순히 음악에 내재한 언어적 메시지가 아니라 음악이라는 매체가 본질적으로 갖는 메시지성(性)을 건드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매체가 메시지다”라는 맥루언(H. Marshall McLuhan, 1911-1980)의 이론을 음악에 접목시킬 기대에 개인적으로는 벌써부터 들뜬다.
올해 레퍼토리 프로젝트의 주제는 ‘이야기’지만 필자는 ‘이야기하기’ 또는 ‘이야기 만들기’로 번역할 수 있는 ‘스토리텔링(storytelling)’이라는 키워드로 올해 주제에 접근하고 싶다. 인간과 동물을 가르는 기준은 많다. 직립과 화식(火食), 정밀한 도구의 사용 등을 꼽을 수 있겠으나 문명과 고도의 사회조직을 만들고 예술창작을 하고 문화를 향유하는 인간을 설명하기에 부족한 면이 있다. 생존은 여전히 중요한 문제지만 인간의 삶을 말할 때 생존의 차원에서 그치지 않는다.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 자아를 성찰하고 스스로를 대상화할 수 있는 인간이 인간다운 인간이라면 이러한 인간의 본체는 스토리텔링 능력에서 찾을 수 있다.
달리 말해 인간은 상상할 수 있는 동물이기에 다른 동물처럼 주어진 본능에 종속된 삶에서 탈피하여 자신이 자신의 삶을 상상하고 이러한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여 무언가를 성취하거나 실패하여 좌절하거나, 혹은 성취에 만족하지 못하고 더 상상해서 노력하거나 자족하는 삶을 살거나 좌절에도 불구하고 다시 일어서거나 아예 주저앉아 버리는 것이다.
유발 하라리(Yuval Noah Harari, *1976)는 인간의 언어능력과 상상력의 폭발을 인지혁명이라고 정의하며 『사피엔스』에 아래와 같이 쓴다.
“우리 언어의 진정한 특이성은 사람이나 사자에 대한 정보를 전달하는 능력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정보를 전달하는 능력에 있다. 지금까지 우리가 아는 한, 직접 보거나 만지거나 냄새 맡지 못한 것에 대해 마음껏 이야기할 수 있는 존재는 사피엔스뿐이다. 전설, 신화, 신, 종교는 인지혁명과 함께 처음 등장했다. (중략) 허구를 말할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사피엔스가 사용하는 언어의 가장 독특한 측면이다.”( 『사피엔스』 48쪽에서 인용함)
주목해야 할 점은 인간의 스토리텔링 능력이 육하원칙에 의거한 스트레이트기사를 쓰거나 실화를 다룬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하라리의 말대로 허구를 말할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인간이 언어로 하는 행위가 가진 힘의 가장 중요한 측면이다. 인간은 개인 단위에서 허구를 스토리텔링하지만 이는 개인적 차원에서 머물지 않는다. 인간이 상상하는 허구의 세계는 집단 단위로 공유하고, 집단은 이를 신념체계로 수용함으로써 허구는 실재하는 세계에서 물리력을 행사할 수 있는 차원에 이른다. 고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수없이 많이 벌어진 전쟁과 전투 중 많은 경우가 다른 믿음을 공유하는 집단과의 대립에서 촉발되었다. 물론 현실적인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개입되었겠지만, 십자군 전쟁에 참가한 기사 대다수는 종교적 신념을 현실에서 구현하고자 전쟁터로 달려가 열정적으로 싸우다 피 흘리며 죽어갔다.
인간의 상상력은 언어만을 매체로 발휘되지 않는다. 음악과 미술, 무용이라는 예술장르 역시 인간 고유의 상상의 산물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개인의 예술행위는 집단 차원에서 공유된다. 음악을 예로 들자면, 마치 이야기가 퍼지고 이야기를 통해 가치체계를 공유하듯이 음악이 퍼지고 음악을 통해 무언가를 공유한다. 음악은 정치나 종교의식의 하부구조에서 기능하기도 하고, 음악 자체가 독립적으로 인간의 즐길 거리로서 향유되기도 한다. 즉 음악이 다른 목적의 수단으로서 기능할 때, 혹은 음악 그 자체로서 존재할 때 그 둘 다에서, 언어를 매체로 하는 이야기가 집단 차원에서 공유되는 양태와 닮아 있다.
그러니까 음악 속에 이야기를 담을 수 있는지 없는지에 대한 논쟁은 다소 지엽적인 문제일 수 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언어로 된 이야기와 언어 밖에 존재하는 음악을 살펴보는 시각과 관점을 어디에 정립하느냐의 문제이다(물론 가사가 있는 성악 음악은 또 다른 쟁점을 만든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이야기를 주제로 삼은 올해 레퍼토리 프로젝트는 다른 장르와의 접촉면 확대를 통해 음악의 지평을 넓히고자 하는 실험적 기획을 과감히 시도하는 화음의 가치지향에 매우 부합한다. 그리고 신화는 모든 이야기의 원형이자 출발점으로서 이야기 시리즈의 첫 주제로 손색이 없다.
인간과 신화 ‘정체성 찾기와 만들기’
신화의 주인공은 대개 신과 영웅이다. 그러나 신화 또한 결국 인간 일반의 이야기이다. 아직 과학이 발달하기 전 인간은 자신의 존재의 시원을 찾아 시간을 거슬러 올라갔다. 이 과정에서 권력을 가진 자, 신과 교통할 수 있는 자, 자연을 잘 관찰하는 자, 이야기를 그럴싸하게 지어내는 자 등이 모여 신화를 꾸몄다. 물론 이는 어느 날 갑자기 뚝딱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집단이 시간의 흐름 속에서 생육하고 번성하면서 신화는 깎이고 다듬어지고 덧붙여지고 교체되면서 구성원 간에 공유된다. 공유과정에서 신화는 집단의 결속을 강화하는 한편 개인에게는 삶의 의미를 부여한다.
신화는 신화 고유의 모습을 보존하며 그 자체가 종교로 기능하기도 했고, 고등종교의 탄생에 기여하기도 했다. 혹은 마을 단위에서 더 작은 설화나 전설의 형태로 분화하기도 했고, 설화나 전설도 공유자가 많아지면 신화의 반열에 오르기도 했다. 집단과 인간의 본질을 은유적으로 표현하는 신화는 문학이나 미술, 음악 등 예술에 영감을 주며 확대 재생산되기도 했다.
그러나 21세기를 사는 대부분의 현대인은 신화를 토대로 집단정체성을 형성하지 않고 개인으로서 자신의 존재 근원을 신화에서 찾지도 않는다. 곰이 쑥과 마늘을 먹고 사람으로 변해 단군을 낳았고, 우리가 단군의 자손이라서 마늘 소비량이 세계 1위인 것은 아니다. 인간이 그동안 스스로에게 던져왔던 인문학적 질문, 예컨대 나의 근원은 어디에서 비롯되었고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라는 종류의 질문은 질문 자체의 타당성부터 따져봐야 한다. 오랫동안 답을 제공했던 신화, 근대 이후에 질문과 답변을 구성했던 철학, 그 사이에 오랫동안 정답을 독점한 종교는 힘을 잃었다(물론 종교는 이러한 논의와는 별개로 여전히 우리의 삶에 다양한 양태로 깊숙이 들어와 있고, 여전히 힘을 발휘한다).
진화생물학 이론은 ‘우리는 어디에서 왔으며 인생의 의미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변할 것이다. “우리는 우연한 진화의 산물일 뿐이며 따라서 인생의 의미는 찾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과정에서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이다.” 필자는 이 대목에서 ‘지금-여기’에서 신화의 의미를 재발견한다. 인생이 삶의 의미 ‘찾기’가 아니라 ‘만들기’라면 수많은 신화의 주인공인 영웅 이야기는 이제 타자가 아니라 나 자신의 이야기일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신화를 통해 영웅이 어떻게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경영하고 운명과 맞서 싸우며(진화생물학에 의하면 운명도 유전의 산물일 수 있겠지만) 삶의 의미를 스스로 만들고 규정했는지에 자기 나름의 관심을 기울일 이유를 찾을 수 있다. 프로메테우스는 왜 불을 훔쳤으며 이카로스는 죽을지 모르지 않았을 텐데 어째서 태양 가까이 날았을까, 하는 의문을 개인들 각자의 입장에서 고민해 볼 만하다. 그리고 이 고민과 탐색의 시간에 신화와 관계된 음악을 접하는 것은 또 다른 차원의 미학적 경험까지 가능하게 해 줄 수 있다.
음악과 신화 ‘음악은 그릇인가, 음식인가’
올해 첫 레퍼토리 프로젝트를 감상하며 낭만주의 시대 음악의 논쟁 하나가 떠올랐다. 음악평론가 한슬리크(Eduard Hanslick, 1825-1904)는 음악은 형식과 내용을 분리할 수 없고 형식과 내용은 하나라고 주장했다. 그는 샴페인이 많아지면 병도 따라서 커지는 가상의 샴페인 병을 예로 들어 음악 고유의 절대성은 형식과 내용의 불가분성에서 비롯되는 정신적인 것이며 이는 단순한 감정유발과는 차원을 달리한다고 주장했다. 한슬리크의 관점에 서면 순수 기악음악이 프로그램음악(표제음악)이나 성악음악보다 음악의 본질에 가깝다. 한슬리크의 절대음악적 입장에 따르면 음악은 작품 자체의 내재적 의미로 가득 차게 되어 다른 요소의 개입을 일절 허락하지 않는 폐쇄적인 존재로 고립될 수밖에 없다는 맹점을 가진다.
필자는 19세기적 논쟁에서 탈피하여 이 글의 두 번째 챕터 말미에 언급한 것처럼 인간의 상상의 산물로서의 이야기가 언어에만 의존하지 않으며 비언어적 수단(그렇지만 언어와의 친연성이 있는)인 음악으로도 표현 가능함을 전제하여 신화를 주제로 삼은 음악을 레퍼토리로 삼은 이번 연주회를 말하고자 한다.
라우타바라(Einojuhani Rautavaara, 1928-2016)의 <핀란드 신화>는 음정의 조화보다는 현악기 트레몰로 등 기존의 주법을 활용하되 음향의 질감과 밀도를 다양하게 하여 강조하는 기법으로 청각뿐만 아니라 촉각을 직접 자극하는 음악으로 다가왔다. 화음의 음악감독이자 지휘자인 박상연은 현악기 특유의 공명을 최소화하여 매우 건조한 음색으로 <핀란드 신화>를 해석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대단히 탁월한 전략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스토리텔링이 아닌 풍경 묘사, 더 나아가 단순한 자연의 풍경이 아니라 핀란드 신화를 공유하는 핀란드 인 집단내면의 서정적 풍경을 표현한 것이라면 <핀란드 신화>를 해석・연주하는 데 있어 최선의 전략을 택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두 번째 곡인 전다빈의 <보레아스>는 ‘2021 화음프로젝트 아카데미 탐구’ 공모에 당선되어 같은 해 6월 29일에 김효영의 생황 협연과 박상연 지휘의 화음에 의해 세계 초연된 작품으로 같은 지휘자, 협연자, 연주단체에 의해 재연된 것 자체로도 의미 있는 레퍼토리였다. 필자는 이 작품을 감상하며 영리한 작곡가의 참신한 작품이 노련한 협연자와 경험 많은 예민한 지휘자를 만났을 때 얻을 수 있는 시너지 효과를 경험하여 기쁨으로 충만한 시간을 보냈다. 작곡가가 “솔로 생황과 또 다른 생황인 현악오케스트라를 구성하여 긴장과 대립, 조화로운 에너지를 느낄 수 있도록 작곡하였고, 이를 표현하는 수단으로 각 악기의 ‘소음’과 ‘음향’을 사용하였다”고 말한 대로 그리스 신화의 보레아스를 동양의 악기인 생황으로 설득력 있게 표현했다. 관악기가 아닌 현악오케스트라로 관악기 특유의 바람소리 같은 음향을 만든 작곡가와 이를 표현한 지휘자와 오케스트라의 실력은 수준급이며, 김효영은 이 작품을 통해서 생황이라는 악기의 지평을 넓혔다고 평가한다.
마우리치오 카겔(Mauricio Kagel, 1931-2008)의 <목신>도 전다빈의 <보레아스>처럼 관악 독주악기가 현악오케스트라가 함께 등장하는 작품이다. <목신>에서는 피콜로가 솔로악기로 나오는데, <보레아스>의 생황이 바람소리 같은 음향적 측면과 동시에 여러 음을 내어 복합적인 음정표현 등에 무게중심을 두었다면 <목신>에서의 피콜로는 특유의 음색이 강조되었다. 특히 피콜로의 고음에서 상승하는 음형과 조성의 잦은 변화는 불안감을 고조시킨다. 이 곡에서 모차르트의 오페라 <마술피리> 중 파파게노의 피리소리가 유도동기로 나타나 변형되고 반복되는데, 작곡가는 이를 통해 목신의 원래 이야기와 <마술피리>의 파파게노 이야기를 동시에 비틀어버린 듯하다. 한지은의 피콜로와 박상연이 지휘하는 화음은 이 비틀기에 다이내믹의 대조까지 강조하여 비틀린 신화, 일그러진 클래식을 잘 표현하였다.
전반부 마지막 곡인 박윤경의 <므네모시네 요정나라>에서는 신화학자 조지프 캠벨(Joseph J. Campbell, 1904-1987)이 말한 신화의 병리학적 특성과 대양감(大洋感 ; oceanic feeling)을 엿보았다. 우선 캠벨의 저서에서 한 대목을 인용한다.
“신화의 영웅, 샤먼, 신비주의자, 조현병 환자의 내적 여행은 원칙적으로 동일하다. 그들의 귀환 또는 증세의 완화는 ‘재생’으로 체험된다. 다시 말해 현실의 지평에 더는 구속되지 않는 ‘거듭난’ 자아가 탄생하는 것이다.”(『다시, 신화를 읽는 시간』 295쪽에서 인용함)
일대일 대응으로 박윤경의 작품과 캠벨의 논리전개를 연결하려면 억측이 발생할 수 있겠으나 작품의 전개가 캠벨의 이론과 놀랍도록 비슷하다. 기억을 잃거나 되찾는 순간은 캠벨이 말하는 ‘재생’과 유사하며 이는 때로 ‘거듭난’ 자아의 탄생으로까지 갈 수 있다. 반대로 기억의 상실은 폐허이자 부정적 ‘거듭남’일 수 있다. 박윤경은 첼로 솔로와 바이올린을 통해 이러한 전환의 순간을 묘사했다. 그리고 오케스트라 전체의 화성은 ‘재생’과 ‘거듭남’에 따르는 대양감을 표현한 듯하다. 대양감은 큰 바다를 만난 느낌을 말하는데 요즘 유행하는 말로 ‘웅장함을 느낀다’와 비슷하다. 다만 대양감은 의식이 몸을 넘어 무한함으로 확장하는 순간이며 이는 무한한 힘을 느끼는 순간으로 정신병리학에서는 퇴행의 일종으로 보기도 한다. 어쨌든 박윤경의 작품에서 캠벨이 주장하는 내면여행이 신화를 모티브로 삼은 음악에서 구현 가능함을 느낄 수 있다.
스트라빈스키(Igor Stravinsky, 1882-1972)의 <아폴로>는 발레음악인데, 발레음악에서 아폴로의 등장은 다양한 맥락에서 가능함을 다시 한 번 떠올렸다. 실제로 이 작품은 륄리(Jean-Baptiste Lully, 1632-1687)의 음악과 유사한 스타일이 자주 등장한다. 륄리의 음악은 절대군주였던 ‘태양왕’ 루이 14세의 권력을 형상화하는 데 이용되었고, 루이 14세는 륄리의 음악에 맞춰 태양신 아폴로의 모습으로 분장하고 직접 발레를 추기도 했다. 2000년에 개봉한 영화 <왕의 춤>(Le roi danse)은 이를 잘 고증한 영화이다. 그러나 스트라빈스키는 륄리의 화려함 대신 절제와 최소주의를 택했다. 발레가 빠진 음악공연에서는 음량의 조절, 템포의 변화 등으로 작품을 살려야 한다. 한마디로 말해 유연하고 민첩한 연주가 필요하다. 박상연이 지휘하는 화음은 시시각각 변화하는 작품 속 캐릭터를 정교하게 표현하는 데 주력했다. 전반부 프로그램의 하중이 만만찮은 상황에서 스트라빈스키의 <아폴로>를 끝까지 집중하기란 쉽지 않은 작업이었음에도 지휘자와 오케스트라는 모든 신경을 집중하였다. 2곡과 3곡에서는 바이올린과 비올라의 우아한 선율이 돋보였고, 5곡 폴리힘니아 변주에서는 빠른 진행에도 중용을 지키면서 선율 굴곡의 중후장대함이 잘 살아났다. 8곡 파드되는 이인무의 몽환적 분위기가 묘한 긴장감을 불러일으켰고, 9곡 코다에서 다양한 리듬의 표현을 둔하지 않게 연주하였으며 마지막 10곡에서는 제1곡으로의 귀환이 마치 바흐(J. S. Bach, 1685-1750)의 <골드베르크 변주곡> 마지막 곡 ‘다카포 아리아’를 연상시키게 하며 종교적 승화와 고양감을 불러일으켰다.
에필로그 ‘새로운 지평 열기’
화음챔버오케스트라의 레퍼토리 프로젝트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는 기획은 아니다. 그렇더라도 관행과 관성에서 탈피하여 실현 가능한 실험적 접근을 통해 음악과 다른 예술의 교통을 매개로 기존의 지평을 확대하고 예술의 새로운 지평을 열 수 있는 기획으로는 충분히 의미가 있다고 판단한다. 필자의 본 비평은 레퍼토리 프로젝트의 기획의도를 알아맞히는 목적으로 쓴 글이 아니다. 레퍼토리 프로젝트라는 다양한 가능성을 배태하고 있는 알을 화음 구성원과 화음을 아끼는 음악애호가들과 함께 잘 품어 아름다운 새로 부화시켜 자유롭게 훨훨 날아다닐 수 있도록 체온을 보태고 싶다. 그래서 멋진 새로 변신한 레퍼토리 프로젝트가 또 다른 알을 더 많이 낳는 모습도 보고 싶다. 그렇게 새로운 예술로 풍성해진다면 우리의 삶 또한 좀 더 풍요로워질 것이다. 삶의 의미를 만들어가기도 조금은 더 쉬워질 것 같다. [畵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