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음챔버오케스트라 미술관 순례 I, II
선택의 이유를 위하여
미술관에서 ‘시각 장애인을 위한 음성 해설’이라는 안내를 보았다. 눈앞의 작품을 볼 수 없는 이에게 음성으로 작품에 대해 설명하는 것이다. 시각 장애인의 TV 시청을 위해 화면을 해설하는 ‘화면해설작가’도 있다. 보이지 않는 이들 앞에 풍경을 그려내는 화면해설작가들 덕분에 많은 시각 장애인들이 영상을 즐긴다고 한다.
한편 음악 작품은 볼 수 없는 이에게도 감상의 가능성이 충분히 열려있다. 게다가 청각 장애인의 음악 감상 역시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 진동이나 시각, 자막 등의 도움으로 음악 감상을 할 수 있다. 이렇듯 장애가 감상의 장벽이 되지 않기 위해 다양한 분야에서 여러 노력과 연구가 행해지고 있다.
그러나 시각과 청각에 문제가 없다고 해서 미술이나 음악을 잘 감상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화음챔버오케스트라는 창단때부터 그림과 음악이라는 서로 다른 두 세계를 연결해 이들의 결합 혹은 충돌에서 발생하는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고자 했다. 특정한 미술 작품에서 작곡가가 새로운 음악 작품을 탄생시키고 연주자들이 이를 전시장에서 또는 연주회장에서 연주한다. 이에 따라 초창기부터 지금까지 많은 시도가 이루어졌으며, 그만큼의 질문들이 따라 만들어졌다.
어떤 미술품은 작곡가에게 큰 영감을 주기도 했을 것이고, 때로는 실제 작곡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했을 것이다. 어떤 음악 작품은 미술 작가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기도 했을 것이고, 때로는 자기 작품과의 연관성을 전혀 찾지 못했을 것이다. 연주자들과 감상자 역시 마찬가지다. 이 연결이 얼마나 견고한가 아니면 느슨한가가 창작과 연주, 감상의 절대적 잣대도 아니다. 그렇다면 창작과 연주, 감상을 아우를 수 있는 연결고리는 과연 없는 것인가?
해석, 취향, 심상
이것은 한없이 복잡해질 수 있는 논의지만, 각각 전시장과 무용 공연에서 경험한 일을 통해 생각해보고자 한다. 어느 도자기 전시회장의 한 작품에서 얼룩이 보였다. 연한 단일 색의 큰 도자기에 짙은 색 얼룩 하나라 더 도드라졌다. 제작 과정에서 생긴 것 같은 형태였다. 전시 해설가에게 묻자 작가 자신은 얼룩이 있는 것을 신경 쓰지 않는다고 했다. 오히려 많은 관람객들이 그 얼룩에 주목하며 작가의 특정한 의도가 담긴 것으로 보았다고 전했다. 소박하게 올챙이를 그렸다는 의견부터 거창하게 작가 자신의 자화상이라는 의견까지 나왔다고 한다. 실상은 우연히 생긴 얼룩이었을지언정 일단 완성품으로 세상에 나오면 감상자의 자유로운 해석이 가능하다. 이때 작가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한 작품의 의도를 읽어내는 것 역시 가능하다. 작가와 감상자가 작품을 통해 각자의 세계를 창조하는 것에 각각의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또 다른 경험은 국립발레단의 공연 <트리플빌>이다. 발레와 함께 1막은 쇼팽, 2막은 바흐, 3막은 베토벤의 음악이 흐른다. 특별히 1막에서는 피아니스트가 나와서 쇼팽의 녹턴을 친다. 무대 위의 피아니스트는 무용수들에게 등을 돌리고 연주한다. 이 공연에는 2명의 피아니스트가 다른 회차에 출연했다. 한 피아니스트는 일정한 템포로 감정을 절제하며 쳤으며, 다른 피아니스트는 템포 루바토를 사용해 보다 유연하고 표현적으로 연주했다. 이때 어떤 연주가 더 좋은가 하는 것은 정답을 찾는 문제가 아닌 취향의 문제가 된다.
그렇지만 분명히 감지할 수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심상이다. 두 번의 공연에서 연주자와 무용수는 시각적으로 철저히 분리된 듯 보이지만 흐르는 음악을 타고 연결됐다. 연주에 따라 무용수의 움직임이 미묘하게 달라졌다. 공연에 참여하는 모든 주체가 그려내는 심상은 개별적으로가 아닌 총체적으로 감상자에게 전달된다. 즉 무대 위에서 다양한 요소들이 상호작용하지만 감상자들에게는 결국 한 무대에서 동시에 일어나는 일이며 하나로 수용되는 것이다. 심상은 마음에 그려지는 상, 이미지다. 예술가들은 각자의 표현 도구를 사용해 보이지 않는 마음을 보여주고, 감상자들은 그 결과물에 따라 나름의 심상을 떠올린다. 그림과 음악 역시 마찬가지다. 미술, 작곡, 연주가 세 축이 되는 화음프로젝트에는 각각의 예술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심상이 담긴다. 여기에서 전달력과 수용력 두 가지 측면을 생각해봐야 한다.
“갤러리를 음악회장으로”
화음챔버오케스트라가 갤러리를 찾아가서 연주하는 화음프로젝트페스티벌이 2022년에는 음악회장에서 행해졌다. 2015년에 대전시립미술관과 2016년에 광주시립미술관에서 행해진 공연을 재현했다. 무대 전면 스크린에 미술작품을 비추고 이를 배경으로 해당 작품에서 영감을 얻어 작곡한 작품을 연주했다. 두 번에 걸친 연주회의 이름은 ‘미술관 순례 I,II’였다. 음악 감상이 동시에 미술관 관람이 된다는 것은 기대를 일으키기에 충분한 기획이다. 단순한 것 같지만 복합적이고, 정적인 것 같지만 역동성이다.
이 프로젝트에서 특별히 작곡가와 연주자는 미술품을 매개로 한다. 이들은 미술품을 감상자들에게 음악으로 해설하는 일종의 ‘음악해설사’로 볼 수 있다. 이 두 공연에서 감상자들은 스크린으로 미술품을 보면서 연주를 듣는다. 여기에 연주에 앞서 해설가가 나와서 작품 설명과 감상에 대한 안내를 한다. 이로써 감상자를 위한 충분한 준비가 된 것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앞의 전시와 공연 예에서 생각해보았듯 나머지는 감상자들의 해석과 취향의 몫으로 돌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시력과 청력에 별다른 문제가 없는 것과 감상력을 가지는 것은 다른 문제다. 예술은 누구에게나 열려있다고 하지만 그 진입장벽이 누구나 쉽게 넘을 수 있을 만큼 완만한 것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화음챔버의 미술관 순례 시리즈에 감상자들을 위한 ‘화면해설’과 ‘음성해설’의 역할을 기대하는 것이다. 미술 작품과의 연관성 속에서 새로운 음악 작품을 만들고 그 창작곡을 지속적으로 연주한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미술관 순례 I’에서는 7개 연주곡 전부, ‘미술관 순례 II’에서는 6개의 연주곡 중 3곡이 화음에서 위촉한 화음프로젝트의 창작물이었다. 개별 작품과 연주에 대한 논의 역시 중요하겠지만, 이는 이번 글의 중심 주제는 아니다. 대부분의 연주회처럼 좋았던 작품과 연주도 있었고, 아쉬움이 남았던 작품과 연주도 있었다. 미술 작품과 음악 작품과의 연관성이 보다 명확히 보이는 작품도 있었으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작품도 있었다. 연주 역시 마찬가지로 보다 몰입된 연주도 있었으며 다소 겉도는 연주도 있었다. 한 가지만 짚고 간다면, 화음 프로젝트의 창작물이 아닌, 대중적으로 알려진 작품의 연주에도 많은 신경을 써야 한다. 창작곡 연주에서 대부분의 감상자들은 연주의 완성도를 가늠하기 힘들다. 그러나 귀에 이미 친숙한 작품 같은 경우에는 다르다.
지향점의 차이
화음챔버는 우리나라 음악계에서 남들이 안 하는 것, 못 하는 것을 하는 단체라는 차별성이 있다.
화음챔버는 이번 미술관 순례 연주회를 처음으로 예술의전당 인춘아트홀에서 했다. 인춘아트홀은 예술의전당 연주홀 중에서 가장 규모가 작은 홀이다. 공교롭게도 화음챔버의 ‘미술관 순례 I’과 같은 연주날 콘서트홀에서는 빈필하모닉의 내한연주가 있었다. 연주곡은 낭만과 후기낭만의 인기 있는 작품들이었다. 콘서트홀 로비에서부터 관객들의 열기가 전해졌다. 해외 유명 악단이 인기있는 레퍼토리를 반복하기만 해도, 상당한 티켓 가격에도 늘 흥행에 성공한다. 여기에서 인지도와 흥행, 규모와 같은 단순한 차원의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화음프로젝트는 창작음악을 핵심으로 한 프로그램으로 단순히 창작음악을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화음챔버가 추구하는 가치의 실현을 위한 기획 프로그래밍으로 세계 어느 악단과도 차별화된 정체성을 보여주고 있다.”
화음챔버가 주창하는 위의 문구는 화음의 역사를 설명하는 동시에 앞으로의 비전까지가 함축된 설명이다. 30년의 경험이 담겨진 잘 정립된 말이다. 그러나 이제 화음챔버의 정체성과 차별성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점검할 필요가 있으며,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서 숙고해야 할 시점이 왔다고 본다.
‘미술관 순례’ 기획은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공연이다. 화음만의 “차별화된 정체성”을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기획 중 하나다. 소규모 홀에서 열린 연주회지만 화음의 가치를 공유하는 멤버들의 적극적 참여가 필요한 공연이다. ‘미술관 순례’에 함께 참가했던 관객들이 세계 어느 악단에서도 경험할 수 없는 특별함에 공감할 수 있는 공연이 되기를 바라는 것은 비현실적 기대가 아니라고 본다.
따라서 전달과 수용의 측면 두 가지를 더욱 의식적으로 생각하며 공연을 해야 한다. 이미 잘 알려진 기존 작품들을 뛰어나게 연주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창작곡과 관객들의 거리감을 좀더 좁힐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어렵고 복잡한 이야기를 어렵고 복잡하게 하는 것은 쉽다. 그러나 이는 소위 ‘현대 음악’ 또는 ‘동시대 음악’에 대한 기존의 편견을 조금도 깨뜨리지 않는다. 어려운 것을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는 것이 어려운 일이다.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이다.
존재의 이유, 선택의 이유
기왕 화음챔버가 우리 음악계에서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걸어왔고, 걸어갈거라면 이 시점에서 다시 한 번 용단이 필요하지 않을까. 동시대의 음악이 동떨어진 음악으로 여겨지지 않으려면 관객이 감당해야 할 몫은 차치하더라도 작곡가, 연주자, 그리고 비평가 모두가 작품과 관객과의 연결고리를 강화하는데 더욱 의지와 애정을 가지고 이 프로젝트에 임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작품에 따라 스토리와 사운드에 집중하는 비중이 다를 수 있다. 연주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나 음악으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와 심상을 보다 친절하게 풀어내고 명확히 그려내는 ‘음악해설가’로서의 역할에 대한 목적의식과 책임의식은 공연을 만드는 모든 이에게 공통적으로 필요하다고 본다. 이것은 화음이 지향해온 가치와 다른 방향이 아니다. 그리고 이 가치를 지켜가는데서 오는 자부심이 화음챔버 공연을 만드는 모든 이들에게 뿐만 아니라 관객들에게도 공유되고 공감받아야 할 것이다. 소규모의 공연, 소수의 관객이라 할지라도 괜찮다. 그 어디든 새로운 소통을 위한 변화의 시작점이 될 수 있다.
유명 악단의 익숙한 연주회를 비롯한 수많은 선택지 중에서 화음챔버의 연주를 주저없이 선택할 수 있다면, 그 이유는 낯선 음악에서 발견하는 나와 우리만의 이야기, 거기에서 오는 뜻밖의 감동에 있어야 하지 않을까.
서주원(음악비평가.음악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