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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레퍼토리 프로젝트 Heritage of Classics Ⅲ: Fantasy of Strings]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김인겸 / 2022-11-02 / HIT : 1050

비평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화음챔버오케스트라 레퍼토리 프로젝트

Heritage of Classics : Fantasy of Strings (고전음악의 유산 : ‘현악기의 환상’)

김인겸 (음악평론가)

 

 

현악기론()

 

음악의 재료인 소리는 인성(人聲)을 제외하면 악기라는 도구에 의해 만들어진다. 성악음악과 기악음악의 분류는 도구의 인위성을 기준으로 하는데, 기악음악이 성악음악에 비해 더 인위적이라고 단언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음악 그 자체가 자연은 아니기에 인위적일 수밖에 없으며 작품의 완성도와 연주의 숙련도 등에 따라 더 자연스러운지 덜 자연스러운지(혹은 부정적 의미에서 인위적인지)의 차이가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예술이란 무언가를 미적 형식으로 표현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면 소재와 기법, 형식 등에서 지평을 넓히기 위한 새로운 시도나 실험은 언제나 용인 가능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악기라는 음악의 도구를 변형·개량한 시도와 그 결과물은 작곡가와 연주가, 음악애호가의 평가와 선택에 의해 획득된 자연스러움을 가지거나 부자연스럽다고 비난을 받을 것이다.

 

인간이 만든 악기가 모두 현재 연주되는 것은 아니다. 나타났다 사라진 악기도 많을 것이고, 한 시대를 풍미했으나 지금은 거의 연주되지 않는 악기도 있다. 슈베르트(F. P. Schubert, 1797-1828)<아르페지오네 소나타 a단조>(Arpeggione Sonata in a minor D. 821)는 기타와 첼로의 장점을 결합하려고 만든 아르페지오네라는 악기를 위한 작품으로 슈베르트가 아니었으면 이 악기는 이름조차 잊혔을 공산이 크다(요즘에는 대부분 첼로로 연주한다). 반면,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기타, 하프 같은 현악기, 플루트, 클라리넷, 트럼펫, 트롬본 등의 관악기, 팀파니와 여러 타악기는 여전히 건재할 뿐만 아니라 서양 기악음악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악기들이다. 즉 이들 악기는 시대의 변화에도 자신의 존재이유를 스스로 증명하며 여전히 중요한 음악예술의 도구이자 매체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것이다.

 

현악기로 범위를 좁혀보자. 현악기도 현을 뜯어서 소리를 내는 기타나 하프 같은 발현악기와 활 같은 도구로 현을 마찰시켜 음을 만드는 바이올린 등의 찰현악기로 나눌 수 있다. 물론 바이올린도 피치카토 주법으로 발현악기처럼 사용할 수 있다. 위에 예시로 든 아르페지오네는 발현악기를 찰현악기처럼 사용하겠다는 발상에서 등장한 악기다. 그러나 바이올린 음악의 근간은 활 주법에 있고 기타 연주기법의 대부분은 손가락 뜯기에 있다.

 

범위를 좀 더 좁혀 바이올린족()은 어떠한 연유로 서양음악의 주류악기로 위상을 획득했는가. 바이올린의 기원에 대한 상세한 논의는 생략하고 비올족()과의 비교를 통해 바이올린족의 특장점을 생각해보자. 비올라 다 감바(무릎의 비올)로 대표되는 비올족은 바이올린족보다 앞서 나타나 발전했다. 외관이 비슷하고 활을 사용하는 찰현악기라는 점에서 공통된 면이 있으나 구조는 다소 다르다. 비올은 기타처럼 프렛(frets)이 있어 미분음 표현에는 바이올린보다 불리하다. 바이올린족이 4개의 현을 완전5도 관계로 조율하는데, 비올족은 6개의 현을 완전4도로 조율한다. 완전4도로 조율하는 더블베이스가 바이올린족에 속하는지는 논란이 있어 이 글에서 언급하지는 않겠다. 또한 브릿지의 각도가 6개의 현을 가진 비올족이 4현의 바이올린족에 비해 상대적으로 완만하여 비올족이 바이올린족보다 다성적인 표현(더블스토핑이나 펼침화음 연주 등)에 유리하다. 그러나 음향학적 구조에서 바이올린족은 비올족보다 큰 음량을 가진다(영어의 ‘fiddle’, 우리말의 깽깽이등이 큰 볼륨의 바이올린을 비하하는 표현으로 종종 쓰인다). 음량과 구조에 기인한 음색의 다채로움 등 표현의 확장이라는 측면에서 바이올린족은 비올족보다 큰 잠재력을 보유했고, 이는 18세기 이후 기악음악의 판도를 바꾸었다.

 

결론부터 말해 바이올린족은 음악사의 주류로 부상했지만 비올족은 뒤로 밀렸다가 20세기 이후 고음악 연주’, ‘당대 연주’, ‘정격 연주등의 논쟁적 명명과 함께 음악사 연구자들로부터 재조명되며 음악애호가들의 관심을 얻고 있다. 물론 이러한 위상 변화가 절대적이며 본질적인 것은 아니다. 음악사적으로 바로크시대는 시민혁명 이전, 귀족이 지배하던 구체제(앙시앙 레짐)와 겹친다. 귀족들은 주로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은 실내 살롱에서 음악을 즐겼으며 이때 비올은 적합한 악기다. 물론 루이 14세 같은 절대군주는 음량이 큰 바이올린으로 구성된 악단을 활용하여 자신의 권위를 과시하기도 했다. 어쨌든 18세기를 지나 19세기로 접어들어 대형 콘서트홀에서의 공공음악회가 일반화됨에 따라 비올과 대비되는 바이올린의 특징이 바이올린의 장점으로 부각되었다.

 

그렇다면 바이올린족 현악기의 장점은 무엇일까? 첫째, 음의 연속과 단절을 극단적으로 대조시키고 자유로운 볼륨 조절로 다양한 스펙트럼을 표현할 수 있다는 점이다. 활을 짧게 튀기는 스피카토와 활을 바꾸면서도 끊이지 않게 레가토로 표현할 수 있다는 사실은 작곡가의 표현의 폭을 비약적으로 넓힌다. 둘째, 비브라토를 활용해 음의 떨림으로 생동감을 극대화할 수 있다는 점이다. 노련한 현악기 주자는 예외 없이 비브라토를 잘 이용해 연주하는 데 명수이다. 마지막으로 바이올린족 악기의 재료를 보자. 단풍나무, 가문비나무 등 잘 건조한 목재를 물고기 부레 등에서 얻은 천연접착제로 붙여 울림통을 만들고 온갖 유기물과 무기물을 섞어 만든 바니시로 칠을 한다. 현은 과거에는 거트(동물의 창자)를 썼으나 지금은 기술발달에 힘입어 나일론 등 다양한 재료를 사용해 목적에 맞는 최상의 제품을 만든다. 활털은 말총이 여전히 주류이다. 활털에 발라 현과의 마찰을 연주의도에 알맞게 조절하는 송진 역시 여러 재료를 혼합해 제조한다. 그 결과 바이올린족 악기에서 나오는 소리는 어쿠스틱 악기의 풍성함과 따스함, 예리함과 날카로움을 모두 포괄하는 음질을 보유한다.

 

바이올린족 현악기는 관악기나 피아노가 갖지 못하는 차별화된 장점을 지니며 이는 독주뿐만 아니라 합주에서도 힘을 발한다. 현악4중주와 현악오케스트라의 차이는 단순히 연주자 수의 다과에서 오는 음량 차이에만 있지 않다. 현악오케스트라가 내는 음은 질적인 차원에서도 결을 달리하여 예술적 표현의 가능성을 확대한다. 화음챔버오케스트라 레퍼토리 시리즈의 세 번째 순서인 현악기의 환상은 현악기로 가능한 예술적 성취를 압축적으로 보여준 무대였다.

 

 

환상과 현실의 혼재

 

오랫동안 음악은 소음을 배제했다. 고른 주기적인 울림을 갖는 소리를 악음(樂音, musical tone)이라 하여 소음(noise)을 타자화한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소음이 주류이다. 악음을, 그것도 악음이 음악의 형태로 온전히 존재하는 양태는 실제 연주가 아니면 접하기 어려웠다. 적어도 녹음매체가 발명되는 20세기 전까지는 그랬다. 그래서 오랫동안 악음이 음악을 지배했는지도 모르겠다. 달리 말해 음악은 도입부에 서술한 것처럼 인위적인 것이고 꿈꾸는 것이다. 음악이 자연을 모방할 수는 있지만 자연을 모방한 음악이 자연은 아니다. ‘자연현실로 바꾸어도 마찬가지다. 즉 음악은 특히 좋은 음악작품은- 독자적인 시공간을 구축하며 독립하여 존재하는데, 때로는 연주되는 시간을 초월하여 감상자의 마음에 오랫동안 자리 잡기도 한다.

 

김지향의 <현을 위한 밤의 노래>는 음악의 존재론을 웅변하는 작품으로 다가왔다. 이 작품은 미분음을 활용하고 브릿지와 테일피스를 긁거나 누르는 등 다양한 소음을 작품 내로 끌어들인다. 음악의 구조를 구축하는 대신 음향의 인상을 대조하면서도 음의 울림보다 이음이 강조되는 모순적 모습도 보인다. 이 작품에서 오케스트라 파트는 고전적인 악기별 파트 단위로 기능하지 않고 흩어진 톱밥처럼 음의 클러스터나 군집체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비올라의 뚫고 나오는 듯한 멜로디는 모순성을 증폭시킨다. 필자는 이 작품을 감상하며 여러 모순적인 요소들과 그것들을 가르는 경계를 강하게 의식했다. 모순과 그 경계의 강렬함은 소통되기 어려운 현실과 환상 간의 관계, 그보다 더 소통하기 힘든 현실 속 다양한 인간 군상을 표현한 듯했다. 작품의 진행은 무작위성이 강조되는 뽑기 같은데, 이는 이성(또는 권력)의 토대이자 근거인 시각 기능을 저하시키는 밤을 은유한다고 생각했다. 한편 가끔 등장하는 협화음은 모순을 증폭시키고 현실을 환기시켜 작품에 대한 관조를 가능하게 했다.

 

 

유장한 흐름

 

멀고 길고 오래이며 차분하고 느리다는 뜻을 복합적으로 가지는 유장하다는 형용사는 조만간 사어(死語)가 될 것 같다. 유튜브 영상도 점점 짧아져 요즘은 5분 이내, 심지어 1분짜리 영상도 자주 보인다. 속도가 미덕인 시대에 느림에는 옛것이자 답답하다는 이미지가 덕지덕지 붙었다. 즉 현실은 온통 가깝고 짧고 잠깐이고 들썩이게 하고 흥분시키는 빠른 것들이 지배하는 세상이다. 과연 어디까지 빨라질 수 있을까. 더 빨라지고 더 쪼개져 찰나가 되면 그것은 소멸에 다름 아니다. 바버(Samuel Barber, 1910-1981)<현을 위한 아다지오>는 단순히 느린 음악이 아니라 현악기의 레가토를 방패로 삼아 세상의 모든 찰나를 거부한다. 필자는 화음챔버오케스트라의 아다지오가 더욱 유장하기를 바랐으나 지휘자 박상연이 지향하는 유장함에 단원들은 조바심을 내는 듯했다.

 

 

어떤 한[a certain] 밤의 음악, 심리드라마로서의 음악

 

한글 제목에 이탈리아어 소문자를 병기한 배동진의 <현을 위한 밤의 음악>(musica notturna per archi)을 필자는 20181월 초연무대에서 처음 들었다. 2020년 재연무대를 놓치고 2022년에 다시 들었으니 4년 만이다. 하행하는 도입부 저음과 눈을 감으면 밤에 관련된 환상들이 눈꺼풀에 맺히는 경험이 인상적이었다는 기억만 남은 채로 다시 감상했는데, 작품이 진행될수록 초연 때와 다르게 들렸다. 들을 때마다 다르게 들으라고 작곡가는 제목을 소문자로 표기해 작품이 고정되는 것을 막았을까? 그렇다면 최고의 명명이다.

 

배동진의 <현을 위한 밤의 음악>은 언뜻 밤의 풍경을 묘사한 것처럼 보인다. 하행음계와 그에 이은 느린 트릴, 빠른 트릴, 다시 느린 트릴에 이어 나오는 좁은 비브라토까지는 밤의 세계로 인도하는 통로 같다는 생각을 한다. 여기까지는 긴 호흡의 메사 디 보체(messa di voce)처럼 자연스럽게 부풀다가 잦아드는 긴장과 이완을 경험한다. 2018년 초연 때 필자는 이후의 전개를 밤의 풍경, 혹은 컴컴한 지하세계로 내려가는 모습으로 음악을 들었으나, 이번에는 다르게 감상했다.

 

현악기 주법 중에는 하모닉스와 술 폰티첼로(sul ponticello)가 있다. 둘은 휘파람 소리와 비슷하다는 공통점이 있으나, 전자가 배음이 울려 맑은 소리가 나는 데 반해 후자는 신경을 긁는 것 같은 기괴한 소리에 가깝다. 작품이 진행됨에 따라 어떤 주법인지 구별이 어려울 만큼 색채가 제각각인 가성(假聲)이 들렸는데, 좀 과하게 표현하자면 컴컴한 정신병동에 들어와 있다는 환각에 빠졌다. 또 가성들은 귀에서 붕붕 울리는 이명(耳鳴)으로도 느껴졌다. 이 소리들은 간혹 절규로 변했다가 다시 한숨으로 바뀌는 등 병리적 소음의 집합으로 들렸다. 필자는 배동진의 또 다른 작품 <사운드 플레이>를 듣고 쳇바퀴처럼 반복되는 일상에 매몰된 현대인을 묘사했다고 평한 적이 있었는데, 이 작품은 인간의 본질적 고독과 숙명적인 내면의 슬픔과 병리를 그려내었다고 생각한다.

 

창작음악을 연주하는 작업은 연주자 입장에서 낯설어 어려움이 불가피하겠으나, 오케스트라 창작음악의 경우 지휘자가 해석자 역할을 잘 한다면 낯섦에 기반 한 난점을 극복할 수 있다. 특히 지휘자와 작곡가의 소통이 원활한 관계라면 창작음악 연주의 장점을 살릴 수 있다. 화음챔버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 박상연은 이 작품을 초연을 포함해 세 번째로 지휘하였다. 그래서인지 박상연은 한 편의 심리극 같은 배동진의 작품을 드라마투르그(dramaturg) 역할까지 하며 연출에 성공했다. 작품은 마지막 대목에서 화성이 사라지고 하나의 음으로 수렴한다. 디미누엔도로 사라지다가 다시 메사 디 보체로 존재감을 나타낸 후 음은 소실점으로 향한다. 이 대목에서 필자는 이 작품을 묘사가 주종을 이루는 초상화(portrait)가 아닌 묘사와 서사가 잘 배치된 한 편의 극(drama)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바그너(R. Wagner, 1813-1883)의 음향으로 압도하는 거대한 음악극이 아니라 음을 재료로 쓴 수채화이거나 대사를 음으로 번역한 일종의 무언가에 가까웠다.

 

필자는 아래에 소개하는 신은주의 삽화를 보고 모노드라마로 배동진의 작품을 읽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한 사람의 내면에 존재하는 다중자아를 표현했든 심리적 병리를 겪는 현대인 군상을 표현했든 음악이 동시대를 품을 수 있는 넉넉한 은유의 그릇으로 기능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확인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고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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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증법 배동진의 <현을 위한 밤의 음악>을 감상한 다음,

종이에 연필·수채 210mm × 145mm, 2022. 10., 신은주

Dialektik ; After Listening to Dongjin Bae <musica notturna per archi>

Watercolor Pencil on Paper, 210mm × 145mm, 2022. 10., Eunju Shin
 

힘겹게 지키고 싶은 것들과 공들여 굴복시키고 싶은 것들, 완강하게 버티는 것들과 스스로 무너지는 것들이 뒤섞여 요동치는 어둠의 시간이 배동진의 음악에서 보였다. 나는 사람들이 수많은 모순을 통과하며 자아를 찾는 모습을 이미지로 표현하고자 했다.”

- 신은주(전주예고고려대 미술학부 졸업, 현 시의회 정책지원관)의 작가노트에서

 

 

나아감과 돌아봄

 

여러 장르의 예술은 창작이나 스타일의 방향을 정할 때 타인이 가지 않은 길을 개척하고 싶어 한다. 새로운 길로 나아가다 보면 방향을 잃을 때가 많은데, 그때 왔던 길을 돌아보거나 자신은 가지 않았던, 그러나 선배들이 갔던 길을 되짚어 돌아가기도 한다. 어차피 처음 가기는 마찬가지다.

 

알반 베르크(Alban Berg, 1885-1935)<서정모음곡 중 세 악장>은 선배인 쇤베르크(Arnold Schoenberg, 1874-1951)가 개척한 무조음악과 12음 기법에 조성음악 및 낭만주의의 미덕을 잘 결합할 수 있음을 증명하는 작품이다. 달리 말해 베르크는 낯선 재료를 익숙한 레시피로 능숙하게 요리해 낯섦에서 오는 거부감을 완화한 솜씨 좋은 요리사 같다. 두 번째 악장에서 약음기를 장착하고 활의 압력을 높여 세게 연주하는 부분은 억압된 자의 악다구니 같았으나 좀 더 속도를 높였다면 속주(速奏)의 효과가 극대화되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본 윌리엄스(Ralph Vaughan Williams, 1872-1958)<토마스 탈리스 주제에 의한 환상곡>은 앞으로 조금 나아간 베르크와 비교하면 회고적인 성격이 강한 작품이다. 그는 튜더 왕조의 가운데를 살다 간 선배 토마스 탈리스(Thomas Tallis, 1505-1585)의 작품을 환상곡으로 새로 썼다. 반복되는 음형은 일종의 프랙털(fractal)처럼 기하학적 반복구조를 만들며 환상의 세계로 이끈다. 본 윌리엄스는 현악오케스트라에도 프랙털 구조를 변형·적용하여 현악4중주, 조금 확대한 현악4중주, 큰 현악4중주 세 개로 나누었다. 이는 화성의 울림을 증폭시키거나 감쇄시키거나 때로는 비틀기도 하며 음향적 새로움을 표현한다. 다만 작곡가가 의도한 음향효과를 극대화시키기 위해서는 보다 큰 연주 공간에서 세 연주집단이 거리를 두고 연주해야 하는데, 화음챔버오케스트라는 콘서트홀 무대 내에서 이를 구현하여 음향효과가 다소 아쉬웠다. 합창석을 활용했다면 어땠을까.

 

 

담장과 소통이라는 꽃

 

세 번째 레퍼토리 프로젝트의 주제가 현악기의 환상인지라 환상의 대척점에 있는 현실을 지속적으로 소환하며 연주회를 감상했고, 또 이 글을 쓰고 있다. 그러나 글을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현실과 환상, 아니면 여러 대립하는 속성들 가운데를 가르는 경계라는 개념까지 자꾸만 생각이 미친다. 먼저 시 한 편을 읽어 보자.

 

달빛과 그림자의 경계로 서서

담장을 보았다.

집 안과 밖의 경계인 담장에

화분이 있고

꽃의 전생과 내생 사이에 국화가 피었다.

 

저 꽃은 왜 흙의 공중섬에 피어 있을까

 

해안가 철책에 초병의 귀로 매달린 돌처럼

도둑의 침입을 경보하기 위한 장치인가

내 것과 내 것 아님의 경계를 나눈 자가

행인들에게 시위하는 완곡한 깃발인가

집의 안과 밖이 꽃의 향기를 흠향하려

건배하는 순간인가

 

눈물이 메말라

달빛과 그림자의 경계로 서지 못하는 날

꽃철책이 시들고

나와 세계의 모든 경계가 무너지리라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함민복, 1996

 

시인은 담장 위에 화분이 놓여 있고 그 화분에서 꽃이 핀다고 노래한다. 그러나 눈물이 메마르면 달빛과 그림자의 경계에 서지 못하여 꽃철책이 시들어 나와 세계를 가르는 담장(경계)가 무너질 것이라고 예언한다.

 

여기서 담장은 너와 나를 분리하는 경계이자 꽃이 피는 공간이다. 논리전개 상 경계가 선명하지 않으면 꽃은 피지 못한다. 꽃은 생물학적으로 열매의 전 단계이고 만남, 아름다움의 만개, 예술적 성취 등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그러나 필자는 꽃을 소통으로 해석한다. 꽃이 피기 위해서는 만나야 하고 만나면 통해야 한다. 소통이라는 단어에서 에 해당하는 한자는 이다. 이 글자는 관계가 소원하다할 때 소원’(疏遠)와 같은 한자이다. ‘는 빽빽하지 않고 트여 있음을 의미하는데, 잘 통하려면 잡스러운 것들이 거치적거리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분리하는 경계는 분명해야 한다. 경계 없이 아예 한 몸이면 소통은 무의미하다. 시인은 명확한 경계를 통해 개별 존재의 정체성을 선명하게 유지하면서(비록 고독할지라도) 때때로 서로가 맞닿는 담장으로 나아가 거기에서 꽃을 피워야 한다고 노래한다. 그래야만 전생과 내생이라는 시간적 간격을 초월해 소통하고, 달빛과 그림자도 조화로울 수 있다.

 

바이올린족 현악기로 묶인다고 해서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가 같은 악기는 아니다. 오케스트라 내에서 제1바이올린과 제2바이올린의 역할과 경계도 분명하다. 악기들이 내는 악보 속의 개별적인 음과 표현기법도 엄밀하게 구별된다. 좋은 작곡가의 좋은 작품일수록 작품의 개성과 정체성은 뚜렷해진다. 차이를 인식하는 바탕에서만 소통을 통한 조화와 협력을 도모할 수 있으리라. 담장이 배제와 차별, 불통의 기제로만 기능하지 않도록 경계에서 만나 담벼락의 축제를 열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