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의 그림자, 사회
신예슬
2015년 7월 9일 목요일 오후 8시 예술의전당 IBK 챔버홀
화음쳄버오케스트라 제39회 정기연주회: 쇼스타코비치 쳄버심포니 15곡 전곡시리즈 III
1. 앙코르
연주회의 마지막 순간을 기억한다. 앙코르로 쇼스타코비치의 재즈 모음곡 중 2번 왈츠가 연주되었고, 익숙한 선율에 관객들은 열띤 환호를 보냈다. 나 역시 뜨거운 박수를 보냈지만 마냥 기쁜 마음으로 환호할 수는 없었다. 어딘가 쓸쓸했다.
연주회장에서 마주하는 음악은 보통 과거의 음악들이다. 한참 옛날에 만들어진 음악을 들으며 현재의 나는 그 음악이 직면했던 세계를 굳이 떠올리지 않는다.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5번을 들으면서 숙청에 대한 두려움을 몸서리치게 느끼거나, 메시앙의 시간의 종말을 위한 사중주를 들으면서 죽음을 앞에 둔 이들의 공포 혹은 초연함을 느끼지 않는다. 나는 보통 작품을 들으러간다. (음악은 음악일 뿐, 사회와 무관하다는 입장처럼.) 시간이 흐르며 음악들은 추상이라는 옷을 걸친 채 듣는 이들의 관심을 음악 그 자체에게로 돌렸다. 콘서트홀이라는 공간에서 그 음악이 정말로 말하고자 했던 음악 바깥의 것들, 혹은 의미는 희미해졌다. 그러나 어떤 음악들에는 꿋꿋하게 과거와 과거의 사회가 서려있다.
음악을 들으며 과거의 사회를 느낄 때 보통 드는 감정은 동경이다. ‘내가 그 때 태어나 이 음악을 초연으로 들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같은 마음. 그러나 쇼스타코비치를 듣고 과거의 사회를 떠올릴 때의 마음은 동경으로만 가득 차 있지 않다. 어떤 장면들이 떠오른다. 모두가 쉬쉬하는 어두운 시대, 사진 속에 젊고 밝은 모습으로 박제된 사람들, 약음기를 낀 채 거칠게 활를 그어대는 현악기 연주자의 모습, 잔뜩 화난 채 억지로 웃는 사람들의 표정. 1938년, 정치적 탄압과 전쟁의 공포가 사회에 산재해있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 곡 재즈 모음곡 중 2번은 춤곡-왈츠다. 쇼스타코비치는 무슨 마음으로 이 왈츠를 작곡했을까.
정치와 사회가 개인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한 인간의 생활 전반에 영향을 미치는 것처럼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에서 느껴지는 이중성은 단지 정치적인 이슈에만 국한되어있지 않다. 삶의 태도와 행동, 감정에서도 묘하게 이질적인 것들이 맞물려있다. 사람들에게 들려주려는 목적으로 작곡되었지만 서랍 속으로 들어간 작품들, 그리고 슬프지만 애써 추는 춤처럼. 쇼스타코비치와 사회라는 키워드가 너무 자주 엮이기 때문인지 혹은 정말로 그래서인지 나는 그의 음악들에서 사회의 무게와 사회로부터 비롯된 불안의 기운을 느낀다. 그가 사회에 내놓았어야만 하는 것들이 있었고, 사회에 숨겨야만 했던 것들이 있었다. 그건 생의 문제였다.
그럴 때면 연주가 마친 뒤 내가 치는 박수가 무대 위 연주자들과 작품을 넘어서 그 아슬아슬한 사회를 버텨냈던 사람들에게도 전해지기를 바라곤 한다. 사회가 서려있는 음악을 듣고 나면 그 음악과 그 사회를 견뎌낸 사람들에게 존경과 경외, 안타까움과 그리움, 그리고 약간의 동경이 뒤섞인 복잡한 마음이 된다. 전해지지 않겠지만 기꺼이 과거에 보내고 싶은 박수. 묘한 기분이다.
앙코르가 연주되고 나서야 음악의 뒤에 따라붙은 사회의 그림자들이 뚜렷해졌다. 사회라는 키워드를 불러일으키는 쇼스타코비치라는 인물, 사회라는 바깥에 나가지 못해 서랍에 잠자고 있던 음악, 동시대를 살아가는 작곡가가 김환기의 작품을 보고 표현한 음악, 탄생 150주년인 닐센(C. Nielsen)과 시벨리우스(J. Sibelius), 화음의 리더 바이올리니스트였던 배익환 선생님에 대한 추모 등등. 이 날 화음의 연주는 내게 사회를 이루는 사람들의 삶, 과거의 사회, 현재의 사회라는 생각들을 던져주었다. 공연을 보고 나온 뒤부터 이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까지 내 뇌리에는 그 날의 음악이 던졌던 무언無言의 메시지가 남아있다. ‘이 음악의 발 끝에서 절대 떨어지지 않는 사회의 그림자를 들어보라’는 말 없는 말. 천천히 연주회를 되짚어본다.
2. 실내교향곡으로 확장된 현악사중주 제 4번
공연 프로그램의 마지막 순서로 쇼스타코비치의 현악사중주 4번이 실내교향곡으로 편곡되어 연주되었다. 현 하나하나는 날카로운 소리를 내는 반면 수많은 현은 풍요의 상징처럼 느껴진다. 현악사중주 편성에서 악기 한 대가 한 성부만 연주할 때 생기는 치열함과 부담감이 있다. 하지만 실내교향곡으로 편곡한다면 현악사중주라는 편성만의 담백함과 예리함은 어느 정도 사라져버릴 것이다. 현악사중주의 불꽃 튀는 느낌을 잃으면서까지 편성을 확장시킨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음악칼럼니스트 송주호가 공연 프로그램노트에서 밝혔듯, ‘현악사중주는 쇼스타코비치의 진솔한 메시지를 담는 장르’이다. 우리는 교향곡과 현악사중주가 작곡가들의 음악적 진면모를 진실하게 보여주는 장르라고 배워왔다. 쇼스타코비치는 교향곡을 작곡할 때는 현악사중주를 쓰지 않았고, 현악사중주를 작곡할 때는 교향곡을 쓰지 않았다. (그는 같은 해에 현악사중주와 교향곡을 함께 발표한 적이 없다.) 자신의 진솔한 메시지를 담아내는 두 장르를 동시에 작곡하지 않았다는 점은 쇼스타코비치가 가지고 있었던 음악적 아이디어가 현악사중주와 교향곡이라는 다른 옷을 입은 것처럼 느껴진다. 이런 점은 화음이 현악사중주를 실내교향곡으로 왜 편곡하느냐라는 질문에 대한 한 대답이 될 수 있을 듯하다.
현악기의 음들만 두터워진 것이 아니다. 한층 더 윤택한 음색을 자랑하는 관악기들도 포함됐다. 현악사중주 4번엔 유대인들의 음악이 짙게 배어있다. 쇼스타코비치는 “유대인은 나에게 하나의 상징이 되었다. 어떤 방어도 할 수 없는 인간이 겪을 모든 고통이 그들에게 집중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 그들에 대한 감정을 내 음악에 담으려고 노력했다”고 말한다. 쇼스타코비치의 감정은 단순히 고통을 겪은 이들에 대한 위로나 안타까움에만 그치지 않았다. 여러 가지 감정들이 엿보인다. 유쾌함, 슬픔, 서정, 멜랑콜리, 분노, 답답함 등. 현악사중주 4번엔 유대인들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느꼈을 그 감정들이 있었다. 유대인의 음악적 언어로 다양한 감정들을 그려낸 이 곡에서 유대인을 향한 쇼스타코비치의 슬프고도 따뜻한 시선이 느껴진다면 과한 해석일까. 현의 날카로운 소리가 여러 대의 현악기로, 부드러운 관 소리로 변했기 때문에 느낄 수 있었던 마음인지도 모르겠다.
3. 김환기의 작품 속에, 화음프로젝트 Op. 120
1부의 마지막 곡은 ‘화음프로젝트’의 작품 중 하나였다. 지난번 쇼스타코비치 시리즈 연주에서는 쇼스타코비치로부터 영감을 받아 쓰인 작곡가 유진선의 작품 <Reformation for Strings – 쇼스타코비치를 기억하며, 화음프로젝트 Op. 127>이 연주되었지만, 이번 연주에서는 위촉 작곡가였던 강준일의 갑작스러운 부음으로 2년 전에 작곡된 작곡가 김성기의 <김환기의 작품 속에, 화음프로젝트 Op. 120>이 연주되었다. 연주되는 동안 김환기의 회화 작품이 무대 뒤편에 계속 영사되었다.
‘김환기의 작품에서 보이는 조화와 균형의 아름다움’을 표현한 이 작품은 일곱 악장으로 쓰였고, 친절하게도 작곡가는 각 악장이 무얼 표현한 것인지 프로그램 노트에 적어주었다. 1악장은 작품을 향한 작가의 내면적 세계, 2악장은 작가의 작품에 대한 사랑과 대립, 3악장은 해학적 표현, 4악장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낸 작가의 작품과 대한 사랑과 대립, 5악장은 의지와 소생의 표현, 6악장은 내면의 열정, 7악장은 작품의 탄생에 대한 흥과 멋이 바로 그것들이다.
사실 김성기가 표현하려 한 것들을 음악만 듣고 감지하기 어렵다. 추상적 개념들, 내면적 세계, 표현에 대한 표현이 어떻게 음악으로 구현되는지 완벽히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다. 음악과 미술이 다른 영역이기 때문이다. 김환기의 그림은 시각-평면의 세계에서, 김성기의 음악은 청각-시공간의 세계에서 구현된다. 그럼에도 깊이감, 밀도 면에서 김환기와 김성기의 작품이 비슷하다는 느낌을 분명히 받았다.
김환기의 그림은 작은 요소들이 나름의 질서를 가지고 배열된 형태를 보인다. (완벽히 자로 잰 듯 떨어지는 타입의 질서와 조화, 균형은 아니다.) 한 평면을 구성하는 요소들은 단지 전체를 구성하기 위한 부분으로 쓰이지 않으며 고유한 생동감을 가지고 있다. 김성기의 작품을 듣고도 이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각 악장에서 쓰이는 음소재들은 변화가능성이 있는 작은 단위로 쓰였고 대체로 움직임이 크지 않았다. 길게 선율을 늘여놓지도, 같은 것을 반복해 어떤 것을 전면적으로 강조하지도 않았다. 견고하게 조직된 짧은 단편들이 아주 세밀하게 움직였다. 이 곡은 김환기의 작품에 대한 김성기의 음악적 아이디어를 응집시켜놓은 것처럼 보였다. 화음프로젝트는 늘 동시대를 공감각적으로 되돌아보게 해주고, 김성기의 작품 역시 마찬가지였다.
4. 닐센, 시벨리우스, 드보르작
프로그램의 첫 순서로는 현악오케스트라를 위한 세 개의 작품이 연주되었다. 닐센의 <어느 젊은 예술가의 관 앞에서>, 시벨리우스의 <현악 오케스트라를 위한 즉흥곡>, 드보르작의 <현악 오케스트라를 위한 슬라브 무곡 No. 16>. 세 곡 모두 길지 않지만 깊은 울림을 남기는 곡들이다. 닐센의 경우엔 추모가, 시벨리우스의 경우엔 낭만이, 드보르작의 경우에는 민족이 각각 진하게 새겨져 있었다. 그렇지만 예술가를 추모하려는 목적으로 쓰인 닐센의 작품과 뒤의 작품이 끊이지 않고 연주되었기 때문일까, 닐센의 곡뿐 아니라 이후의 곡들 또한 바이올리니스트 배익환에게, 작곡가 강준일에게 보내지는 듯 했다. 선배 음악가들을 추모하기 위해 연주된 곡들 역시 동시대의 사회를 되돌아보게 만든다. 지금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겪는 일이다.
음악가들의 사회에서 그들의 방식으로 애도가 펼쳐진다. 단원들은 진심을 담아 지휘봉 끝이 아닌 서로의 눈을 보며 그들의 음악을 들려주었다. 연주되는 작품의 한 음 한 음에, 연주되는 그 시간 위에 그들과의 추억을 함께 실어 보내듯 화음이라는 한 사회를 떠난 음악가들을 위해 단원들이 소중한 마음으로 연주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5. 입장
연주회의 첫 순간을 기억해본다. 객석에 앉은 채 연주자들의 입장을 바라보던 그 때. 무대 위에 서는 마음을 모르는 나는 여러 가지를 살핀다. 연주자들이 어떤 표정으로 무대에 오르는가. 얼마나 편한 옷을 입었나, 혹은 얼마나 자유롭게 입는가. 옆자리의 연주자와 담소를 나누며 들어오는가. 단원들은 얼마나 친밀해 보이는가. 연주를 준비하며 음정과 자세 등 모든 것을 조율하는 연주자들을 바라보며 생각한다. 화음쳄버오케스트라라는 음악가들의 사회는 어떤 사회일까.
가끔 공연을 보다보면 무대가 평소보다 멀거나 높게 느껴질 때가 있다. 음악학자 크리스토퍼 스몰(Christopher Small)은 “어떤 공연에서 연주자들은 마치 객석과 무대 사이에 투명한 막이 있어서 무대에서 객석을 보지 못하는 것처럼 행동한다”고 말한다. 바로 이런 경우에 나는 공연이라는 이벤트에서 소외된 사람처럼 느껴진다. 관객은 무대를 오매불망 바라보지만, 무대는 연주가 끝나기 전에는 객석에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화음쳄버오케스트라가 성공적으로 출범한 지 20년이다. 연주자들은 화음쳄버오케스트라로서 무대에 오르는 일이 자연스럽고, 여기서 연주를 어떻게 하는 게 좋을 지 이미 잘 알고 있는 느낌이다. 무대에 감도는 여유롭고 친밀한 분위기가 객석에도 전달된다. 그래서인지 화음의 공연을 볼 때는 음악가들이 만드는 음악이 관객석의 내게 향해있다는 느낌이 든다. 연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들려주기 위해서 하는 연주. 관객으로서 그런 느낌을 받는 이유는 아마도 그들이 정말로 오랫동안 화음을 맞춰온 사이이기 때문일 것이다.
신예슬 arp273@naver.com
2014년 화음프로젝트 평론상, 2013년 제 15회 객석예술평론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