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음쳄버오케스트라가 제시하는 해법
글|송주호(음악칼럼니스트)
클래식의 대중화를 생각하다
클래식 음악계에서는 최근 수십 년간 추구해 온 목표가 하나 있다. 바로 ‘클래식 음악의 대중화.’ ‘대중화’란 무엇일까? 국립국어원에서는 ‘대중화’를 ‘대중 사이에 널리 퍼져 친숙해짐. 또는 그렇게 되게 함.’이라고 정의한다. 그렇다면 ‘대중’은 무엇일까? 역시 국립국어원의 정의를 빌면 ‘수많은 사람의 무리’라고 한다. 결국 클래식 음악의 대중화란, 클래식 음악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퍼져 친숙하게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겠다. 사실 이러한 정의라면 이미 클래식은 어느 정도 대중화가 되어있는 상황이다. 분명 ‘수많은 사람들’은 모차르트와 베토벤을 알고 있고, 심지어 노년층도 ‘정명훈’이라는 이름을 알고 있다. (물론 그들이 기억하는 정명훈은 무개차를 타고 종로 거리를 퍼레이드 하던 1974년의 모습일 가능성이 높지만.)
하지만 실제적으로 클래식의 대중화는 다른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 것 같다. 1996년 3월 25일자 경향신문은 지휘자 금난새를 소개하면서 “청중에 쉽고 친근한 음악”이라는 말을 대중화로 해석했고, 피아니스트이자 지휘자인 김대진은 네이버캐스트에서 “클래식은 어렵다고 생각하는 선입견을 없애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말하며 클래식의 대중화의 운을 땠다. 또한 숙명소식은 바이올리니스트 유시연의 “어려운 클래식 음악을 대중의 눈높이에 맞게 소개”라는 말을 ‘대중화’라는 말로 포괄했다. 이렇게 보면 클래식의 대중화는 “어려운 클래식을 대중의 관점에서 전달하는 것”을 말하는, 보다 적극적이고 구체적인 의미로 보인다.
(클래식의 대중화라는 주제에 있어서 클래식의 대중화가 필요한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있을 수 있지만, 여기에서는 이러한 움직임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클래식은 어렵다?
이 의미에는 몇 가지 전제가 있는데, 그 중 하나는 ‘클래식은 어렵다’는 것이다. 왜 클래식은 어려울까? 음악이론 때문인가? 사실 클래식만큼이나 음악이론을 지닌 재즈도 어렵지만, 재즈가 대중화를 위해 힘쓴다는 얘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이미 대중음악의 범주에 있기 때문이겠지만, 정말 재즈가 대중화되어있다고 보는가?) 그렇다면 역사적 무게 때문인가? 대중에게 역사적 의미란 그다지 의미가 없다. 즉, 대중은 역사적 의미로 클래식 음악을 접근하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이유로 무게감을 느끼지 못한다.
그리고 또 하나의 논점은 ‘대중적 관점’에 있다. ‘쉽고 친근’이라든가, ‘대중의 눈높이’라는 말은 클래식은 수준이 높고 대중은 수준이 낮다는 것을 전제한다. 이런 전제는 높은 수준을 낮은 수준으로 인위적인 질적 저하를 꾀하겠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소지가 있다. 이미 존재하는 음악을 낮은 수준으로 연주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으므로, 결국 ‘대중화’는 낯선 곡은 하지 않고 잘 알려진 곡만 하겠다는 자기안주를 합리화하는 수단으로 오용될 수 있다, 그리고 해설과 같은 음악 외적인 것으로 성취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난다,
그래서 김대진의 ‘편견’이라는 단어에서 중요한 시사점이 있다. ‘클래식은 어렵다’는 것은 편견일 뿐이라는 것이다. 어떠한 복잡한 음악이론을 사용하더라도, 연주가 되는 순간 소리의 영역으로 실현되고, 창자는 그것을 듣는다. 그리고 여기에 호불호가 존재하게 된다. 즉, ‘어렵다’ 혹은 ‘쉽다’가 아니라 ‘좋다’ 혹은 ‘싫다’로 판단하는 것이 옳다. 물론 어떤 음악에 대해 사람들이 ‘어렵다’라고 반응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어렵다’는 것은 ‘이해’의 관점을 바탕으로 하는데, 사실 음악이론에 대해 거의 알지 못하는 대중이 음악을 ‘이해’의 관점으로 접근한다는 것은 상식이 아니다. 그저 ‘낯설다’는 것을 ‘어렵다’라고 표현하는 것으로 보인다. 서양 사람이 ‘맵다’와 ‘덥다’를 구분하지 않고 똑같이 ‘hot’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대중도 ‘낯설다’와 ‘이해되지 않는다’를 모두 ‘어렵다’라고 말하고 있다. (감상자가 노력해야한다는 티보르 크나이프의 주장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클래식을 낯설지 않게 하기
결국 ‘실질적인’ 클래식 음악의 대중화는 낯설지 않게 하는 것에 그 핵심이 있다. (도출된 이 명제는 앞에서 제시한 사전적 의미로 회귀된다.) 이것은 사실 음악가의 영역이라기보다는 기획의 영역에 가깝다. 만약 음악가가 음악의 대중화를 꾀한다면, 그것은 스스로를 기획자로서의 역할로 확장했다고 보는 것이 옳다. (김대진은 위의 기사에서 클래식 대중화의 핵심을 “최상의 연주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한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그는 자신을 기획자의 영영으로 확대되는 것을 경계하고, 음악가로서 충실할 것이라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낯설게 하지 않게 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사람들을 음악회로 초대할까? 한 번도 클래식을 재대로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티켓을 쥐어줬다고 해도, 그들이 공연 시각에 실재로 발걸음을 옮기는 것에는 상당한 용기가 요구된다. 수없이 예술의전당과 세종문화회관을 드나든 나조차도 대학로에 있는 소극장에 가는 데에는 수없이 고민하고, 정작 도착해서는 어떻게 들어가는지 몰라 뻘쭘하게 두리번거리고 서있을 수밖에 없었던 일이 떠오른다. 소심한 성격 탓으로 치부할 수 있 수 있지만, 지구상에 나와 같은 사람이 분명 또 있겠지.
이미 기호가 정립된 성인의 자유 의지에 의존해야 하는 초대권 살포는 성공 가능성이 매우 낮다. 교회에서 매년 뽑는 전도왕보다도 더 열성적으로 클래식을 전도하면 가능할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오히려 수동적인 입장에서 접할 수 있도록, 즉 ‘경험’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그 열쇠이다.
‘경험’이라는 말은 사실 대단히 중요하다. 존 케이지가 말했듯이, 예술은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하고 인지하는 것이다. 경험한다는 것은 의도 없이 접한다는 것이고, 인지한다는 것은 감각적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하지만 요즘의 대중은 예술의 접근을 이해에서 출발한다. 이해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사전 지식이 필요하며, 또한 지식을 활용하여 다름대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응용력 및 비평력을 갖춰야 한다. 이러한 지식과 능력을 갖추었다면 이미 그는 대중에 속해있지 않다고 봐야하지 않을까? 그래서 논리적으로 대중은 예술의 이해에 실패하고, 예술을 떠날 수밖에 없다. 오히려 대중의 특성이 그렇게 정리된다면 해법은 존재할 수 없다.
가장 가능성이 높은 경험의 기회는 학생에게는 학교교육이며, 성인에게는 방송이다. 상업적으로 운영되지 않는 공교육과 공영방송(이미 상당히 상업적이기는 하지만)이 있는 우리나라에서는 다행히 충분한 장이 마련되어있다. 이미 학교에는 음악 교과가 있고, 두 공영 방송인 KBS와 EBS가 클래식 음악을 정규 프로그램으로 방송하고 있다.
교육으로의 접근
이제 문제는 실효성으로 접근한다. 사실 방송 역시 시청자가 능동적으로 프로그램을 선택해야 하는 문제가 있으므로 실효성은 그리 높지 못한 편이다. 하지만 클래식 음악을 거의 접할 기회가 없는 성인에게 그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방송이 제공하는 가치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크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학교에서는 어떠한가? 대한민국에서 정규 학교 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한번 떠올려보자. 음악 시간에 무엇을 했었지? 학교교육은 아니지만 어렸을 때 피아노나 바이올린을 배우는 학생도 적지 않고, 요즘에는 초등학교에서도 악기를 가르치는 곳이 많은 것 같다. 하지만 중학교 이후에는 대학에 갈 때까지 음악은 6년간 금단의 열매로 변신한다. 초등학교까지는 교양의 상징이었던 음악은, 여전히 그렇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중학교와 고등학교에서는 도덕과 음악은 병립할 수 없다는 옛 견해를 한시적으로 받아들이는 물신(勿信)주의적 입장을 취한다. 음악이 중고생의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집중력을 높일 수 있는 방안이 될 수 있음에도, 그저 공부의 방해요소로 전락하고 만다.
학교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공연장을 가면 클래식에 그다지 관심이 없어 보이는 학생들이 종종 있음을 본다. 바로 학교 숙제로 티켓을 받기 위해서 오는 학생들이다. 일부는 티켓만 받고 돌아가고, 일부는 공연을 보고 나오는 사람들에게 티켓을 달라고 부탁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그 중 일부는 기왕 온 거 공연을 보기도 한다. 나는 이 경험을 매우 중요하다고 본다. 공연장에 한번 와봤다는 것, 그리고 공연을 한번 본 적이 있다는 것. 성인이 되었을 때 이 경험은 의사 결정에 영향을 준다. 사람은 경험한 범위 내에서 움직이기 마련인데, 그 경험은 결정에 긍정적 요소로 작용할 수 있다. 즉 또다시 공연장에 참석할 기회가 생겼을 때, 참석하는 행위를 결정하는 데 있어서의 장애물이 그 경험이 없는 사람에 비해 현저히 낮다. 그래서 나는 공연장 티켓을 가져오라는 숙제를 지지하는 편이다.
그래도 최근에는 청소년을 위한 해설 음악회가 적지 않아 숙제를 해결해야하는 학생들을 공연장 안으로 들어오게 하는 가능성이 높아졌다. 이 경우에는 해설의 방향을 고려해야 한다. 대부분의 해설 음악회는 작곡 배경이나 감상 포인트를 설명하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 이것은 주로 능동적인 클래식 음악 감상자에게 도움이 될 뿐이다. 비교적 수동적인 감상자가 많을 수 있는 해설 음악회에는 학생이 공감할 수 있는 프로그램과 해설이 필요하다. 10대라는 나이, 학생이라는 신분, 그리고 그들의 고민 등을 고려하여야 진정한 ‘청소년을 위한’ 음악회가 성립할 수 있다.
화음쳄버오케스트라의 시도
그러한 점에서 화음쳄버오케스트라가 오작교 프로그램에 교육적인 목적을 더했다는 것은 매우 의미가 크다. 또한 2월에 있었던 ‘십이간지’는 유소년, 3월에 있었던 ‘이카루스’는 청소년으로 대상을 달리했다는 것은 그들의 기획력을 보여준다. 나는 특히 유소년을 대상으로 음악회를 꾸몄다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본다. 거의 모든 클래식 음악회가 초등학생 이상만 입장할 수 있기 때문에, 미취학 아동뿐만 아니라 그들의 부모마저도 클래식 음악을 감상할 기회로부터 배재되고 있기 때문이다. 혹자는 어린이방 등이 있지 않느냐고 반문할지 모르겠으나, 기꺼이 부모와 떨어져 놀이방에 들어가 노는 아이들이 얼마나 되며, 또한 이러한 상황을 수용하는 부모도 얼마나 될지 의심스럽다. 많은 음악가들이 유년기에 악기를 시작하다는 사실을 볼 때, 유소년기의 음악적 경험은 그들의 미래에, 더 나아가 대한민국 예술의 미래에 매우 중요하다. 그렇기에 국내의 저명한 음악단체인 화음쳄버오케스트라가 유소년을 위한 음악회를 마련했다는 것은 더욱 뜻 깊은 사건이다.
‘십이간지’ 연주회에서 유소년의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전래동화를 소재로 하면서 새로운 작품을 발표하는 콘텐츠의 내용 또한 매우 긍정적이다. 독일의 저명한 작곡가 볼프강 림이 “요즘도 클래식 음악을 작곡하는 사람이 있나요?”라는 어린 아이의 질문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는 일화가 있다. 클래식이 먼 나라 아득한 과거에 만들어진, 나와 아무 관계없는 별세계의 음악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이야기를 소재로 했다는 데에서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누나 혹은 이모와 같은 사람이 만든 음악이라는 사실은 상당한 친밀감을 유도한다.
‘이카루스’ 음악회도 마찬가지이다. 이 음악회에서는 특히 집중적으로 현대음악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을 마련함으로써, 수백 년 전이 아니라 우리시대의 감성으로 음악을 느끼게 했다는 점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하지만 앞에서 지적했듯이, 현대음악이라는 주제가 기획의도라면, 대부분의 청소년들이 기획의도를 공감할 수 있는 방향으로 해설이 진행되었는지는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화음쳄버오케스트라의 이번 두 연주회를 통해 시도된 방법들은 클래식 대중화의 관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앞으로 클래식 음악에 대한 교육 프로그램으로서 체계적으로 기획되고, 또한 타겟 감상자들의 공감으로 그 키워드를 확장하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