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여행: 화음쳄버오케스트라 이카루스 콘서트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것들 가운데 아주 작은 부분만을 경험할 수 있다면, 나머지는 어떻게 되는 걸까?” 파스칼 메르시어의 소설 <리스본행 야간열차>는 그 나머지를 찾아 돌연 야간열차를 타게 되는 한 남자의 이야기다.
누구도 내면에서 요구하는 삶을 다 살아내고 있는 사람은 없을 터, 우리들은 그 나머지의 넓디넓은 공간에 미처 경험하지 못한, 아니 실현할 수 없는 꿈이나 욕망 따위를 숨기고 쟁여둔다. 판타지, 더 나아가서는 예술의 영역이다. “우리 삶에 색깔을 입혀주고 멜로디를 부여하는 건 바로 그 부분이며, 그 부분이 어떻게 구현되는가에 따라 삶은 달라진다.” 때때로 일상과 결별하고 ‘그 나머지’의 다른 삶을 찾아 길을 떠나야 하는 이유다.
20세기 전후, 익숙한 ‘질서’를 뒤로 하고 모험 길에 나선 일군의 선구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그 앞을 예측할 수 없는 미지의 세계로 용감하게 걸어 들어갔다. 화음이 아니라 ‘소음’, 고전이 아니라 ‘인상’, 신사가 아니라 ‘야수’라는 비난을 감수하며 그들이 창조한 세상은 낯설고 혼란스러웠지만 생명력이 넘쳤다. 잘못 든 길이 지도를 만든다고, 덕분에 미술과 음악은 새 지평을 열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새롭던 세상은 다시 익숙해지고, 또 어디선가 누군가는 길을 떠나곤 했다.
나를 비롯한 비전공자에게 현대음악은 가끔은 훌쩍 올라타고 싶은 일종의 ‘야간열차’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대부분 속도가 너무 빠르고 간이역에는 서지도 않아 함부로 올라 탈 수 없던 터였다. 마침 미술과 음악의 통섭을 통해 꾸준히 대중과의 소통에 힘써온 화음쳄버오케스트라가 특별한 야간열차를 마련했다. <이카루스 콘서트>. 20세기 초반 미국의 아이브스로부터 지금 여기의 임지선에 이르기까지 지난 100여 년의 현대음악 여행을 위한 파노라마 기차였다. 더욱이 친절하고 든든한 안내자가 동승(임지선 해설)한다니 길을 잃을 염려도 없는 절호의 기회였다. 이 야간열차가 나를 어디로 데려 갈지 모르지만, 두려움 반 설렘 반으로 기차를 탄다. 내가 누구인지, 어디에서 무얼 하는 사람인지 잠시 제쳐 두고, 덜컹거리는 기차에 몸을 싣는다. 밤의 정적을 가르는 바퀴소리, 창밖의 낯선 경치와 스치는 바람, 간이역마다 타고 내리는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온갖 소리와 풍경에 오감을 내주기로 하고.
모든 여행이 질문에서 출발하듯, 콘서트는 아이브스의 ‘질문’으로 시작한다. <대답 없는 질문>이다. 원래 현악사중주, 4대의 플룻과 트럼펫 솔로를 위한 곡이라는데, 여느 오케스트라와는 다른 악기 편성과 공간적 배치가 이채롭다. 현악기와 목관악기, 그리고 트럼펫은 주거니 받거니 질문을 하고 대답을 한다. 그러나 어울릴 듯 말 듯 각자의 이야기를 하는 악기들은 끝내 익숙한 화음을 만들어 내지는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아이브스 자신의 말처럼, 삶은 ‘존재에 대한 영원한 질문’이기에 정답이 있을 리 없기 때문이다. 합의된 대답이 아니라 새로운 질문이 계속될 뿐이다.
바르토크의 <현악사중주 4번 4악장, 알레그로 피치카토>. ‘바르토크 피치카토’는 신경질적이면서도 기운차고 경쾌하다. 헝가리 뒷골목 어딘가에서 알록달록한 민속의상을 입고 춤추며 다가오는 흥겨운 무리라도 만난 느낌이다. 그러나 웃음 속에 꾹꾹 눌러두었던 상처와 분노가 느닷없이 치밀어 오르기라도 하듯이, 흥겨운 리듬인가 싶다가 서로 날카롭게 부딪치고 어긋나면서 기괴하게 들리기도 한다. 슬픈 듯 기운찬 민속음악의 정서 덕분일까. 다행히도 그 불화 속에 내재된 생명력은 여전히 건강함을 뽐낸다. 바르토크가 슬라브 민속음악을 연구해 서유럽 중심의 기존의 클래식에 적극적으로 응용했다고 하니, 당시 주류 음악이 슬라브 민속음악을 받아들이면서 얼마나 풍성해졌는지 잘 보여 주는 예라고 생각되었다.
침묵도 소리일까? 현대음악 중에서도 파격으로 잘 알려진 케이지의 <4분 33초>는 침묵과 소리, 또 소음과 음악의 본질적 의미를 되돌아보게 한다. 악기가 연주를 멈추자(?) 역설적으로 주변의 모든 소리가 음악으로 편입된다. 숨소리, 기침소리, 부스럭거리는 소리, 자신의 심장소리까지... 연상되는 작품이 있다. 제임스 터렐의 <스카이 스페이스> 연작으로, 전시실의 천정이 사각으로 뚫려있어 올려다보는 하늘이 그대로 하나의 캔버스가 되는 작품이다. 날씨와 시각에 따라 변하는 하늘은 때로 작가가 부여한 빛과 색채를 입고 무궁무진한 파노라마를 펼친다. 말하자면 단 한 번도 똑같은 적이 없었고 앞으로도 결코 없을 그 순간이 작품인 셈이다. 마찬가지로 <4분 33초> 동안의 콘서트장의 침묵은 실은 침묵이 아니다. 과학적으로도 ‘침묵의 소리’는 정말 소리가 없어서가 아니라 우리의 가청범위를 벗어났기 때문이라고 한다. 들을 수 없지만, 바로 그 순간에도 ‘소리 없이’ 세상을 움직이는 더 근원적이고 거대한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만 할 것만 같다.
더 이상 악기는 필요 없다, 몸도 악기다, 박수도 음악이다! 오직 두 손을 이용한 라이히의 박수음악은 뜻밖의 선물 같았다. 어릴 적 운동회에서, 또 월드컵 축구경기를 응원하며 손이 닳도록 쳤던 3.3.7 박수처럼 신나고 경쾌하다. 8분 음표의 반복 리듬만으로도 이처럼 정교한 음악을 연출할 수 있다니, 악기와 음악의 경계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해 주었다. 규범과 인습을 벗어나면 넓고 또 신명나는 세상이다.
페르트의 <벤자민 브리튼을 추모하는 노래>는 차임과 현악기의 조화가 신비로웠다. 추모곡이니만큼 여느 레퀴엠의 비장함과 엄숙함이 깃들어 있지만 장중하면서도 간결하다. 엄격하게 절제된 채 점점 무르익는 음악을 따라가다 보니, 모르는 사이에 깊고 깊은 어떤 피안의 세계에 동행한 느낌이다. 쉽지 않은 작별이지만, 이제는 떠나보내야 할 그 사람이 그곳에서라면 편안한 안식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남아 있는 사람을 위로하는 듯하다. 추모의 본질은 이렇듯 떠나는 자보다 남아 있는 자를 위한 행위인지도 모르겠다.
‘미국의 사계’라는 별명이 붙은 필립 글래스의 <바이올린 협주곡 No.2>은 좀 더 친숙하게 들린다. 그동안 <쿤둔> <디 아워즈> 등 영화음악을 통해 그의 음악을 접할 기회가 있었던 덕분이거나, 비발디의 <사계>라는 모델이 있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미니멀리즘이라고 불리는 단순하고 반복적인 패턴이 복잡한 음악적 표현에 익숙지 않은 일반 감상자들도 음악의 본질에 더 쉽게 다가갈 수 있게 한다는 것도 큰 이유일 듯싶다. 화장을 지우고 서로의 맨얼굴을 마주할 때 진실은 더 분명하게 전해진다는 것은 삶의 경험을 통해서도 이미 알고 있는 바다. "Less is more"! 완벽함이란 무엇 하나 더 보탤 것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더 이상 버릴 것이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라는 미니멀리즘의 존재근거를 다시 생각해 본다. 그러나 “두 번째로 오는 느낌은 처음과 같지 않다. 그것은 반복을 의식함으로써 퇴색된다.” 더 이상 새롭지 않은 일상이 그렇듯이 반복되는 리듬과 선율이 무료하고 지루해지기 시작하면 또 다른 여행을 꿈꾸어야 할 시점이라는 뜻일 게다.
어느새 기차는 여행의 끝, 임지선의 최근작 <이카루스>에 이르렀다. 높이 올라가지 말라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밀랍의 날개를 달고 태양 가까이까지 날아 마침내 추락하고 마는 그리스 신화 속 소년, 이카루스. 아버지의 경고가 인습이나 일상의 벽을 의미한다면, 밀랍의 날개는 인간의 숙명적 한계를 말하는 것일 듯하다. 이카루스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인간의 동경과 모험의 상징으로, 발레나 미술 등 창작의 소재로 다양하게 해석되어 왔다. 또 1949년 발견되어 1968년에는 태양에 가장 가깝게 접근해 화제를 모았던 행성의 이름이기도 하다.
임지선의 <이카루스>는 그의 파란만장한 일생을 다섯 가지 주제로 표현했다. 이카루스의 탄생, 아버지와 함께 미궁에 빠지는 장면, 새들이 밀랍의 날개를 엮어주는 장면, 그리고 태양을 향한 이카루스의 비상, 마지막으로 이카루스의 추락과 에게 해에 남은 슬픔 등 다섯 파트이다. 현악기의 하모니와 관악기의 팡파르로 탄생에 얽힌 신비한 이야기를 듣고 나면, 콘트라베이스와 첼로의 묵직한 울림과 강렬한 피치카토로 들려주는 캄캄한 미궁이 있다. 날개를 만드느라 바쁜 새들의 움직임은 목관 악기로, 밝고 힘찬 비상은 금관악기로 묘사되고, 높은 음역의 현악기가 그 절정의 환희를 위태롭게 연주한다. 그러나 그에게 허락된 자유는 거기까지였을 뿐, 마침내 밀랍 날개는 하나 둘 녹아내리고, 악기들의 퇴장과 함께 이카루스는 바다 속으로 사라진다. 에게 해는 아무 일도 없었던 듯 평온을 되찾는다.
비극적 결말에도 불구하고 임지선의 <이카루스>는 전반적으로 밝고 화려한 느낌이다. 결말보다 과정의 자유를 향한 의지와 열정에 무게를 두고 희망적으로 표현하고자 했다고 작곡 의도를 밝혔듯이, 그의 음악은 루벤스나 브뢰헬의 그림에서처럼 이카루스의 ‘추락’에 무게를 두고 교훈을 주려던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샤갈처럼 몽환적 판타지에 머물지도 않는다. 오히려, 마티스의 말년 작품 <이카루스>에 가깝다. 사방에 노란 별들이 반짝이고 파랑색 하늘(?)을 배경으로 붉은 심장을 품은 채 춤을 추고 있는 이카루스를 단순하고 강렬하게 표현한 걸작이다. 당시 늙고 병들어 더 이상 기존의 작업을 계속 할 수 없었던 마티스가 선택한 것은 색종이 오리기였다. 역설적으로 가장 어려운 순간에 가장 단순한 기법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 할 수 없는 꿈’을 가장 강렬하게 표현해 낸 셈이다. 죽음의 그림자가 다가오는 순간에도 이카루스의 심장은 여전히 불타고, 꿈은 반짝반짝 빛나며, 삶의 춤을 멈추지 않는다니, 멋지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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