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분
음악을 시간의 예술이라 한다. 어느 한 지점에서 시작해서 한 동안 흘러가 어느 한 지점에서 끝나는 음악은 3차원 세계의 인식으로 볼 때, 대표적인 시간 예술이다. 문학이나 회화도 시작과 끝이 분명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음악은 연주가 필수적이라는 점에서 사운드가 현재에서 미래로 흐른다는 우리의 시간에 대한 고정관념을 뒷받침하는 매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시간에 대한 생각을 하면서 퍼뜩 떠오르는 것은 1994년 프랑크푸르트 오페라 하우스에서 본 흥미로운 오페라, 벨라 바르톡의 <푸른수염 공작의 성>이다. 온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유디트는 악명 높은 푸른수염 공작과 결혼하여 그의 성으로 간다. 음침하게 닫혀있는 7개의 방을 모두 열어 보여 달라고 재촉하는 유디트의 성화에 못이겨 공작은 결국 마지막 문을 열고 만다. 그리고 공작의 이전 여자들인 아침, 점심, 저녁의 여왕들과 함께 유디트는 밤의 여왕으로 갇혀버린다는 얘기이다.
이 오페라의 텍스트는 원래 17세기 동화 <푸른 수염 공작>을 헝가리 작가 벨라 발라즈(Béla Balázs)가 각색한 것이다. 흥미로운 오페라의 스토리보다 내게 더 흥미롭게 여겨지는 것은 당시 오페라 연출이었다. 연출자는 헤르베르트 베르니케 (Herbert Wernicke)인데, 그는 오페라를 반으로 나누고, 대칭적으로 진행하여 흥미로운 시간개념을 연출했다. 대칭의 중심축은 네 번째와 다섯 번째 방이었는데, 특히 푸른수염 공작의 광대한 영지를 상상하게 하는 다섯 번째 방은 음악적으로 하이라이트라고 볼 수 있다. 그 때까지의 밝은 양(陽)의 기운이 어두운 음(陰)의 기운으로 바뀌는 전환점이다. 이 정점이후, 무대에서 유디트와 공작은 지금까지 해 왔던 행동을 이제 비디오를 거꾸로 돌리 듯 반대로 행하는데, 예를 들면 처음에 벗었던 양말을 후반부에서는 다시 신어서 원래 상태로 되돌아가게 한다. 따라서 오페라가 끝나면 유디트가 엄청난 심리적 충격을 겪고 감금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가 있는 것이다. 오페라는 약 1시간 동안 진행되었음에도 마치 모든 것이 잠시 꿈을 꾼 듯한 느낌이었다. 저녁 8시에 오페라가 시작했고 한 시간이 흘러 오페라가 끝났으니 9시가 된다는 우리의 고정적인 시간 개념에 ‘딴지’를 걸어보고자 했던 연출이 아니었을까 생각하게 되었다.
연출자 베르니케가 상대성이론을 염두에 두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인슈타인의 이론에 의하면, 시간이 과거-> 현재-> 미래->로 흐르는 것이 아니라 과거, 현재, 미래가 공존할 수 있고, 공간의 이동에 따라 시간의 템포도 달라진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객관적인 시간은 없다는 것이다. 이런 이론이 3차원 감각으로는 구체적으로 다가오지 않겠지만, 지구라는 경계를 넘어 우주공간까지 넓혀 상상해보면 추상적이나마 이해 가능하다. 잠시 우주여행을 한 사람이 지구로 돌아왔을 때 자신의 친구들이 모두 훨씬 빨리 늙어 있는 현상을 현대 물리학은 설명해낼 수 있다.
또한 스테판 호킹의 <빅뱅이론>에 따르면 우주의 생성이 빅뱅이라는 최초의 대폭발에 의해 생기게 되었다고 하는데, 빅뱅이전에는 시간도 공간도 없이 안, 즉 내부만 있었다고 주장한다. 3차원 세계에 사는 우리의 좁은 머리로는 시간과 공간이 없는 것을 상상하기 쉽지 않다. 어쨌든 이런 과학자들의 이론을 들으면 과학은 예술 못지않게 뛰어난 상상력을 요구하고, 과학자들의 큰 상상력에 새삼 놀라게 된다.
물론 지금처럼 첨단 기계가 발전하지 못했던 옛날에 시간에 대한 상상력이 빈약했다는 말은 아니다. 동아시아에서 흔히 알려져 있는 십이간지라는 개념은 시간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이나 생명과 밀접한 관계에 있음을 암시한다. 쥐, 소, 호랑이, 토끼, 용, 뱀, 말, 양, 원숭이, 닭, 개, 돼지. 이 동물들은 빠른 순서도 아니고, 힘센 순서도 아니며, 그렇다고 먼저와 나중의 개념도 아니다. 12개를 분류하는 두 개의 큰 카테고리는 양과 음이라는 성격의 대조이다. 쥐에서 시작해서 돼지로 끝난다고 해서 쥐가 돼지보다 뛰어나다거나 소의 가치가 원숭이의 가치보다 크다는 가치의 등급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각 동물은 자신만의 특성을 가지고, 그 존재로서 가치를 가지는 것이다.
십이간지는 또한 반복과 회귀의 개념이다. 각 사람은 태어난 해의 동물이 5번 회기하면 육순이 되고, 만60이 환갑이 되는 것, 즉, 각자의 주기와 시간을 가진다. 단순히 36세, 48세가 되는 것이 아니라, 48세는 자신의 주기가 4번 돌아온 것, 60세는 5번 회귀한 것이니, 지구가 계절의 주기를 만들며 반복해서 돌고 있듯이, 동양의 시간개념에서 보면 인간도 모두 각자 자신의 주기를 가지고 돌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옛날 사람들의 싸이클적인 시간개념은 과거->현재->미래로 시간이 흘러간다는 평균적인 현대인의 고정관념보다 더 풍부하고 사물의 진리에 더 가까이 다가 서 있다. 반복과 회귀의 12간지 시간개념은 현대물리학이 말하는 과거·현재·미래의 공존이라는 시간개념에 훨씬 더 가깝다. 양띠인 올해 48세가 되는 사람에게 띠의 싸이클로 보면 지나간 12세, 24세, 36세의 과거와 앞으로 올 60세, 72세의 미래가 현재 48세에 공존하고 있다.
2015년 2월7일 세종문화회관에서 있었던 화음 프로젝트 연주회 <십이간지 동화이야기>도 제목이 암시하듯 시간에 관한 것이고, 어린이들을 위한 것이다. 2015년 화음 오케스트라의 전속작곡가인 최한별은 아이들이 흥미롭게 여길 수 있도록 동물이야기를 직접 엮어내고, 뛰어난 내레이션으로 하나의 완벽한 음악창작동화를 발표했다. 십이간지에 속하지 않는 고양이를 등장시켜 쥐와의 앙숙관계를 드라마틱하게 만들고, 이야기 전개의 동기유발이 되는 ‘임금님’이라는 존재를 만들어 전체가 15부로 구성되도록 했다.
<십이간지 동화이야기>에서 모든 동물의 특성이 음악적으로 잘 표현되었지만, 음악적 하이라이트는 단연코 용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상상의 전설적인 동물 용의 등장은 그 이전과 그 이후에 등장하는 그 어떤 동물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차원의 신비함과 존재감으로 압도한다. 십이간지에서는 5번째 동물이지만, <십이간지 동화이야기>에서는 가운데에 위치하고, 음악적 중심이 된다.
유치원아이들까지도 등수와 점수가 유일한 가치임을 배우며 자라나는 한국의 삭막한 풍토에서 <십이간지 동화이야기>를 통해 아이들이 각자 자신만의 재능과 가치가 있으며, 열두 동물처럼 각자 존재의 특성이 다를 뿐, 우월하고 열등한 것이 아니라는 메시지를 간직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