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화음쳄버오케스트라 신년 가족음악회 “십이간지 동화이야기” 공연 평론
열두 동물과 어린이의 만남
이 민 희
2015년 2월 7일 오후 4시 세종문화회관 체임버 홀에서 화음 챔버 오케스트라의 신년 가족음악회 “십이간지 동화이야기”가 열렸다. 이날 공연은 1부와 2부로 나누어 진행됐다. 1부에는 작곡가 하르사니(Harsanyi, 1898-1954)의 어린이용 모음곡 <용감한 꼬마 재봉사>(The Brave Little Tailor, 1939)가 연주됐고 2부에는 2014년 화음(畵音)의 전속작곡가 공모에 선발된 작곡가 최한별(Hannah Hanbiel Choi)의 작품 <어린이를 위한 오케스트라 십이간지 동화이야기>(Orchestea for the child audience 12 Kanji, 2015)가 초연됐다.
<십이간지>는 다양한 타악기를 포함하는 실내 오케스트라 곡으로 총 15악장으로 구성된 35분 길이의 모음곡이다. 악장들의 제목은 1악장 ‘임금님의 부르심’, 2악장 ‘고양이를 속인 쥐’, 3악장 ‘소와 쥐’, 4악장 ‘소와 쥐의 도착’, 5악장 ‘호랑이’, 6악장 ‘토끼’, 7악장 ‘용’, 8악장 ‘뱀’, 9악장 ‘말’, 10악장 ‘양’, 11악장 ‘원숭이’, 12악장 ‘닭’, 13악장 ‘개와 돼지’, 14악장 ‘고양이’, 15악장 ‘임금님의 상’이다. 제목에서 엿볼 수 있듯이 이 작품은 십이간지의 순서를 정하는 옛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는 표제 음악이다. 줄거리 이해를 돕기 위해 음악 사이사이에는 내레이션이 삽입 되었으며 무대 한쪽에는 각 악장의 줄거리를 압축한 일러스트가 상연되어 관객의 이해를 도왔다.
<십이간지>의 가장 큰 특징은 소재의 ‘재현’에 집중한다는 점이다. 12간지 동물 중 ‘소’, ‘닭’, ‘개’, ‘돼지’ 등 뚜렷한 울음소리를 갖고 있는 경우에는 이 소리가 음악으로 묘사됐다. 한편 ‘쥐’, ‘말’ 등 의성어와 의태어가 뒤섞인 표상이 익숙한 동물들은 이 두 가지가 혼합된 형태로 재현됐다. 특히 전자의 경우 특정 악기의 고유한 음역과 음색이 개별 동물 캐릭터를 직접적으로 드러냈다. 예를 들어 3악장 ‘소와 쥐’에 등장하는 ‘소’ 모티브는 트럼본의 글릿산도(음과 음 사이를 이어서 미끄러지듯 연주하는 것)에 전적으로 의지했다. 12악장 ‘닭’ 테마도 오보에가 연주하는 ‘꼬끼오’ 소리가 주요 음악 요소였다. 동물과 대응되는 의성어나 의태어 대신 특정 동물이 가진 인상을 표현한 경우도 있었다. 8악장 ‘뱀’의 경우 뱀의 이미지가 이국적인 음계와 병치됐으며, 10악장 ‘양’에서는 양의 목가적이고 평화로운 이미지가 듣기 좋은 선율과 화성으로 표현됐다. 11악장 ‘원숭이’의 경우에는 이 동물이 가진 ‘잔꾀’ 혹은 ‘사람과 비슷함’을 나타내기 위해 다른 동물 악장들에 비해 박자와 음계가 뚜렷한 음악이 등장했다.
이외에도 ‘임금님이 계신 천상’ 세계를 표현하기 위해 독특한 음계를 현악기로 연주한다거나, 다 같이 박수 치는 동물들을 묘사하기 위해 연주자들이 일제히 바닥을 구르는 것 등의 다양한 음향이 사용됐다. 결국 작품 안에는 12간지 이야기에 등장하는 모든 동물 테마와 줄거리 묘사를 위한 음향까지 최소 15개 이상의 상이한 음향이 나열됐다. 각각의 음향은 반복되지 않으며 전체 악장의 흐름 안에서 논리적인 구조나 클라이맥스를 만들지 않는다. 이런 방식의 음향 운용은 관객의 집중을 이끈 요인이기도 했다. 최한별 작곡가는 서면 인터뷰를 통해 ‘2분 단위로 음향을 교체함으로써 관객들의 집중력을 유지시킬 수 있다’고 한 바 있다. 신기한 소리를 다양하게 교체해 들려줌으로써 신선한 음향을 마주할 때 발휘되는 찰나의 집중을 지속적으로 이끌어내고자 한 것이다.
이 작품이 여러 악기의 음색과 주법을 최대한 활용한다는 점은 크럼(George Crumb, b.1929) · 락헨만(Helmut Lachenmann, b.1935) · 펜데레츠키(Krzysztof Penderecki, b.1933) 등 음향에 집중하는 아방가르드 작곡가 전통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이 곡은 ‘십이간지’라는 대중적인 표제 덕분에 ‘아방가르드’와는 확실한 거리를 둔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재미있는 상황이 발생한다. 작곡가는 누구나 쉽게 떠올릴 수 있는 동물들을 지시(reference)함으로써 이 익숙한 표지 아래에서 자신만의 독자적 실험을 행할 수 있게 되었다.
어떻게 ‘익숙한’ 동물을 지시하며 동시에 ‘독특한’ 음향을 만들 수 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예술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외부에 존재하는 것을 그대로 재생하지 않는다. 예술은 ‘우리의 실재 감각을 구성’하는 새로운 방법을 제시한다. 우리는 반 고흐의 회화 덕분에 해바라기를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경험한다. 반 고흐가 그런 식으로 해바라기를 포착하기 전까지는 그 누구도 그렇게 보지 못했다. 관객들은 <십이간지>를 들으며 ‘고양이와 쥐’, ‘용과 뱀’에 대해 새로운 경험을 했다. 날카로운 음향으로 글릿산도를 주고받는 토끼의 동작을, 그리고 토끼가 가진 ‘날렵함’과 ‘가늘면서도 힘 있는 소리’를 난생 처음으로 인지했다. 특히 이날 공연의 주요 관객이었던 어린이들은 옆에 앉은 가족에게 소곤소곤 질문을 해 가며 <십이간지>의 동물 묘사를 흥미롭게 청취했다. 나이를 고려해볼 때 무척 열성적인 감상태도였다.
다채로운 음향이 관객의 집중력을 이끌어냈다면, 전체 무대를 통틀어 관객의 반응이 가장 좋았던 무대는 ‘앵콜’이었다. 특히 어린이 관객들은 동물 소리를 한 번씩 더 들려준 앵콜을 들으며 왁자지껄하게 떠들며 이날의 음악회를 유쾌하게 마무리 했다. 이날 공연의 주 타겟이었던 어린이들이 음악회에서 즐거운 마음을 담고 집에 돌아갔다면 다른 지점은 차치하고서라도 이 음악회가 성공적이었다고 이야기 할 수 있을 것이다.
앵콜이 중요한 이유는 <십이간지> 마지막 악장의 구성과도 관련이 있다. 작곡가는 이 모음곡의 마지막 악장을 특이한 형식으로 작곡했다. 이제껏 등장했던 모든 동물 테마를 짧게 재등장 시킨 피날레를 만든 것이다. 작곡가는 서면 인터뷰를 통해 이런 구성이 ‘연극에서 주연배우들이 연극을 마친 후 한명씩 나와 커튼콜을 받는 것’을 나타낸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작곡가가 의도한 ‘커튼콜’ 분위기는 정작 이 악장이 연주될 때는 잘 느껴지지 않았다. 이윽고 모든 공연이 끝난 후 박수를 받으며 무대에 선 작곡가는 객석의 어린이들에게 가장 마음에 드는 동물이 무엇이었는지 물어보았다. 잠깐 주춤하던 어린이들은 곧 특유의 열광적인 목소리로 동물 이름을 외치기 시작했다. ‘닭! 소! 쥐! 말! 양! 토끼!..’ 어린이들의 대답에 따라 무대 위 연주자가 동물 테마를 차례로 연주했다. 연주되는 동물 테마 사이사이에는 환호하는 어린이들의 목소리가 뒤따라왔다. 결국 ‘동물의 커튼콜’을 모델로 작곡된 15악장이 앵콜이라는 자리를 빌어서 완전히 재현된 것이다.
15악장의 ‘동물의 커튼콜’은 애초에 관객과 무대의 반응이 동시에 존재해야 가능한 컨셉이다. 이것이 앵콜에서 실현되었을 때 홀 안은 즐거움과 활력으로 가득 찼다. 그리고 작곡가는 바로 이 지점에서 곡을 쓰며 상상만 했던 어린이 관객과 처음으로 마주했다. 불 꺼진 객석에서 숨죽여 음악을 듣는 관객이 아닌, 고조된 목청으로 자신이 좋아하는 동물 이름을 외치는 어린이를 만난 것이다. 객석과 무대가 서로의 경계를 넘어 ‘상호작용’ 하는 것.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는 공연에서 꼭 한번 시도해봄직한 아이디어가 아닌가?
화음의 ‘어린이를 위한 신년 가족음악회’는 특별한 기획으로 클래식 음악의 저변 확대에 기여한다. <십이간지>가 보여준 ‘현대음악’과 ‘대중’의 흥미로운 연결은 대중에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 늘 고민하는 동시대 현대음악 작곡가들에게 좋은 모델이다. 7세 전후의 아이들이 가득 찬 클래식 공연장을 상상해 본 적이 있는가? 계속해서 꿈지럭거리는 아이의 몸동작이 홀 안에 쌓여 이질적인 기운을 뿜어낸다. 작곡가가 그려내는 동물의 재현과 ‘어린이 관객’으로 상징되는 화음(畵音)과 작곡가의 소망이 동시에 충족되는 순간이었다.
이민희李旼姬 odbone@snu.ac.kr 음악학 박사과정.
2011년 제1회 화음프로젝트 평론상, 2012년 제5회 인천문화재단 플랫폼 음악비평상 수상자.